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16
215화 미련(3)
은퇴를 하겠다고 했다. 기념으로 한 번 대결을 해달란다. 그러면 미련 없이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스노우볼을 굴리기 시작한 손지훈의 덩어리 병력을 보며 이신은 피식 웃었다.
손지훈이 들고 나온 전략의 테마는 그리운 옛날 정도가 적당할 듯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리해 줄까?
옛날처럼 똑같이 해줄 수도 있고, 인류의 정석대로 업그레이드 된 한 방 병력으로 결판 지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래, 해주마.’
이신은 결심했다.
‘숨통을 끊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럼 끊어줘야지.’
다만, 속이 후련해지고 미련도 더 이상 남지 않게 되는 아름다운 결말 따위를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임이 좋아서 게임에 미친 프로게이머의 은퇴는 그렇게 뿌듯하고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다.
더 하고 싶고 더 이기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고통이다.
손지훈의 스노우볼 운영에 대하여 이신이 내놓은 카드는 바로 의무병.
단 1명의 의무병이 슬그머니 바깥에 나왔다.
“의무병?”
“지금 설마…….”
“저거 섬광탄 쓰려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거신병기 한 무리와 마주치자, 이신은 레이더를 찍었다.
-띠리링-!
투명한 정찰기가 레이더에 의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즉시 이신의 손길이 움직였다.
-파아앗!
의무병이 정찰기를 향해 섬광탄을 던졌다.
섬광탄이란, 일시적으로 터지는 빛으로 적의 시야를 제압하는 무기.
스페이스 크래프트에서는 군사학교 건물에서 섬광탄을 개발하면, 의무병이 이걸 사용할 수 있다.
이 섬광탄은 어떤 유닛이든 한 번 맞으면 영구히 가시거리가 1칸으로 전락해 버린다.
한 치 앞밖에 못 보는 바보가 되는 것.
일반 전투 유닛은 가시거리가 1칸이 되어도 문제가 없다. 다른 유닛이 밝혀주는 시야도 있으니까.
하지만 정찰기의 가시거리가 1칸으로 전락하면 아주 큰 문제가 생긴다.
그게 뭐냐 하면,
-퍼어엉! 퍼엉!
-으악!
-악!
지뢰에 당해 거신병기 3기가 폭사됐다.
정찰기가 땅속에 매설된 지뢰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가시거리가 1칸으로 전락한 결과였다.
“……!”
손지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신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왔는지 알아차렸다.
이신의 진영에서 고속전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닥치는 대로 지뢰를 매설하며 손지훈의 병력이 함부로 맵 센터를 활보하고 다니지 못하게 했다.
손지훈은 급히 병력의 기동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정찰기를 뽑아서 보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파아앗!
2명밖에 안 되는 의무병에 의하여 신족의 대병력이 또다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정찰기가 장님이 되어버리자 지뢰가 도처에 깔린 맵 센터를 다닐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스노우볼을 굴릴 수가 없어!’
센터 장악에 지장이 생기자, 비로소 이신 역시 본색을 드러냈다.
지뢰를 전부 소모한 고속전차 6기가 치고 들어왔다.
신족 병력을 피해 우회하여 12시 확장 기지를 기습.
-으악!
-으아악!
캐논포와 거신병기 몇 기에 의하여 고속전차는 전부 격파되었지만, 신도도 4명 죽었다.
어차피 지뢰를 다 썼기 때문에 버리는 고속전차였다.
신도를 몇 명이라도 솎아주기만 해도 이득이었다.
계속해서 지뢰로 맵 장악을 하고 상대 일꾼 솎아주는 이신의 플레이가 펼쳐졌다.
손지훈은 계속 고통 받았다.
맵 센터에 장님이 되어 홀로 서성거리는 정찰기의 숫자가 벌써 4기나 되었다.
‘안 돼. 스노우볼은 안 되겠어. 차라리 빨리 아바타를 뽑아서 소환 공격을 하자.’
그러나 이신은 손지훈에게 일절 여유를 주지 않았다.
견제 플레이로 상대를 괴롭히면서 모아놓은 대병력으로 마침내 치고 나온 것이다.
위풍당당한 이신의 지상군 중에는 의무병도 4명이나 섞여 있어서 손지훈으로 하여금 지긋지긋함을 느끼게 했다.
지뢰를 밟아 터지고 견제를 당해 갈팡질팡한 손지훈은 이신의 위풍당당한 진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제 맵 센터를 잡은 쪽은 이신이었다.
라인을 끌어올린 이신은 확장기지 2개를 추가로 가져갔다.
손지훈은 애간장이 타는 심정으로 아바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본진 안으로 항공수송선 1대가 나타났다.
“……!”
항공수송선은 고속전차 3기와 의무병 2명을 드롭했다.
고속전차가 그의 본진 곳곳에 지뢰를 매설했다.
-띠리링-
-띠리링-
이신은 레이더를 2번 연속으로 찍었다.
정찰기가 보이자 즉각 의무병이 달려들어 섬광탄을 쐈다.
-파앗! 파아앗!
장님이 된 정찰기 2기.
그 사이에 지뢰를 다 매설한 고속전차들이 신도들을 공격했다.
병력이 다수 있음에도, 손지훈은 지뢰 탓에 고속전차들을 퇴치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도들을 대피시키고, 광신도를 돌격시켰다.
-으악!
-크아악!
광신도들이 한 명씩 달려들어 지뢰를 온몸으로 치웠다.
그렇게 고생을 한 끝에 간신히 이신의 견제를 막을 수 있었다.
아니, 견제는 끝나지 않았다.
고속전차들과 의무병들을 간신히 처리했을 즈음, 절벽 건너편에서 기동포탑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항공수송선 1대가 다시 나타나 본진 안에 기동포탑 1기와 고속전차 2기를 드롭했다.
절벽을 기점으로 안팎에서 기동포탑이 포격을 시작했다.
본진 안에 들어온 병력을 걷어내려고 덤벼들자 절벽 밖에서 쏘는 포격에 얻어맞아야 했다.
유리한 국면을 맞이한 뒤에도 이신은 끊임없이 소수의 전력으로 상대를 크게 괴롭게 만드는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전 방위적으로 손지훈을 압박하는 이신.
압살에 가까운 경기 운영에 당하는 와중에도, 손지훈은 악착같이 참으며 마침내 아바타 준비에 성공했다.
생산된 아바타의 마법 에너지가 다 충전되자, 비로소 손지훈이 반격에 나섰다.
‘소환 마법 한 방에 역전이 나오지는 않아. 일단은 7시 확장 기지부터 부수자.’
아직 판단력만은 예전의 기량 그대로인 손지훈이었다.
손지훈의 아바타가 희망을 안고 7시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파앗!
7시로 향하는 루트에 대비하고 있던 의무병이 섬광탄을 던졌다.
아바타는 삽시간에 시야 1칸짜리 장님이 되었다.
‘이 개자식!’
손지훈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깟 장난 같은 의무병의 섬광탄에 이 지경까지 농락당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이번 판 대결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괜찮아. 시야가 1칸이라고 소환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야.’
전술위성에게 무력화탄을 맞은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아바타가 이신의 7시 확장 기지에 당도했다.
하지만 시야가 1칸인 아바타는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
기동포탑과 고속전차 등이 7시 확장 기지 외곽에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바타가 소환 마법을 펼쳤다.
본진에 있던 병력 한 뭉치가 7시 확장 기지에 소환되었다.
소환되자마자,
-퍼퍼퍼퍼퍼퍼펑!!
외곽 지역에 대기하고 있던 기동포탑의 포격에 얻어맞았다.
아바타는 시야가 1칸이 된 까닭에 바깥 상황을 아무것도 못 보고 무작정 병력을 소환한 것이었다.
손지훈의 얼굴이 멍해졌다.
일말의 희망조차 짓밟혀 버린 것이었다.
이기는 건 불가능하나 아직 진 것도 아닌 괴로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신은 맵 센터를 장악한 병력을 한 발 더 전진해 턱밑까지 숨통을 조였다.
기동포탑들이 줄줄이 포격모드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앞은 지뢰밭이 깔렸다.
지뢰밭 위에 서 있는 의무병 몇 명은 손지훈으로 하여금 최후의 항전조차도 시도하지 못하게 했다.
압박 라인을 뚫으려다가 의무병의 섬광탄에 정찰기가 또 병신이 되면, 병력은 고스란히 지뢰밭에서 초라하게 몰살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미치겠다. 너무 막막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이기고 싶은데도 이길 길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이대로 GG치자니 자신의 결말이 너무나도 초라해 견딜 수가 없었다.
***
“거의 압살이지?”
“관광당한 수준이지. 확장 기지 숫자 차이 봐라.”
“그러게 저 형은 왜 또 헛소리를 하면서 이신한테 개기냐.”
“자기 주제도 모르고. 아, 쪽팔려. 우리 팀 망신이야 이게 다.”
손지훈을 바라보는 팀 넥스트 선수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손지훈.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주목받아온 기대주였다.
프로리그 무대에 데뷔했던 첫해에 찍은 승률은 무려 7할.
그리고 2018년 후반기에는 개인리그 준우승과 함께 이신의 새로운 적수로 주목 받으며 전성기를 찍었다.
팀 넥스트 선수들에게는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물론 다 옛날 이야기였다.
그 이듬해인 2019년부터 손가락 관절염이 심각해져 경기력에 지장을 받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인간계 천재, 인간계 우승자 등과 함께 손지훈을 따라다니는 별명이 또 하나 있었다.
먹튀신족.
손지훈은 전성기를 찍었던 2018년 전반기 이적 시즌 때 팀 넥스트와 재계약을 했던 것이었다.
쌍성전자, JKT, 화성전자, CT, 팀 넥스트 등등.
심지어 중국과 미국, 유럽 몇 개국의 프로팀들도 손지훈에게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도 손지훈은 순진하게도 애걸복걸하며 붙잡는 팀 넥스트와 동료들을 위해 잔류를 택했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팀을 최고로 만드는 길을 택한 것이다. 어린 날의 어리석은 치기였다.
3년 계약.
물론 팀 내 최고액의 연봉이었다.
하지만 계약한 후, 손지훈의 기량은 하락했다.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데 제 역할은 못해주는 불편한 선수가 된 것이다.
그러자 팀은 손지훈에게 계약을 조정하자고 요구해 왔다. 부진을 하고 있으니 당초 계약대로 연봉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안면몰수한 팀의 태도에 충격받은 손지훈은 배신감을 느껴 반발했다.
손지훈은 절대로 계약을 번복하지 못하겠다고 버텨 결국 약속한 연봉을 다 받았다.
계약에 명시된 당연한 일.
이신이 소속 팀과 법적 다툼을 벌여 팀이 해체될 뻔했던 일도 있는 탓에, 팀 넥스트도 더는 손지훈에게 강압적인 수를 쓸 수는 없었다.
다만 팀은 치졸하게도 감독과 코치 등이 합심하여 손지훈에게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주었고, 다른 선수들에게도 손지훈 때문에 팀이 힘들다는 식으로 떠들고 다녔다.
하나둘 팀에서 친구가 떠나가고 손지훈은 점점 고립되었다.
그럼에도 손지훈은 독하게 버텼다.
계약에 명시된 연봉을 다 받아내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일념이었다.
그게 엄청난 영입 제의를 마다하고 이 팀에 남았던 실수를 만회할 유일한 길이었다.
“먹튀 주제에 옛날 생각이라도 났나?”
“낄낄.”
“이신은 그냥 말려 죽일 생각인가?”
“이제 다 끝났는데 왜 GG를 안 쳐?”
“오, 아직 뭔가 더 해볼 모양인데?”
손지훈이 다시금 움직였다.
수송기 2기가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맵 끝에 붙어서 움직였다.
견제 플레이로 두 군데를 동시에 타격하여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함이었다.
‘그래. 조금씩 떠오른다.’
손지훈은 생각했다.
‘그때도 이렇게 괴로웠지. 내가 왜 잊고 있었을까.’
심리를 꿰뚫기라고 하듯, 하지 말았으면 하는 플레이만 골라서 했던 이신.
위장이 끊어질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싸워야 했다.
피 튀는 승부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순간은…….’
이 모든 시련을 다 이겨낸 뒤에 찾아온다.
그 중간 과정을 깜빡 잊고 있었다.
‘간다.’
손지훈은 이를 악물고 향했다.
견제를 위해 두 군데로 나눠 움직인 수송기.
이와 함께 모아놓은 대병력도 출진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견제와 동시에 저 압박 라인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두 군데에서 동시에 견제 받는 와중에, 의무병으로 섬광탄을 실행해 정찰기를 정확하게 클릭하는 컨트롤이 가능하지는 않지.’
설령 2군데 동시 견제가 실패해도 좋다. 그건 시선을 끌기 위한 페이크다.
진짜는 돌파.
큰 싸움을 이겨야 승산이 생긴다.
‘옛날의 신이 형이라면 3군데서 모두 완벽하게 대응했겠지.’
하지만 그건 과거다.
‘내가 옛날의 나일 수 없듯이, 형도 옛날의 형일 수 없어. 형은 나보다 더 아팠었잖아. 우리 모두 옛날 같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형?’
프로게이머 인생의 끝자락.
손지훈의 감각이 옛날처럼 날카롭게 살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