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me of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280
279화 공허(1)
패장은 말이 없었다.
항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이사는 분한 얼굴로 이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승자가 된 이신 역시 꽤나 놀란 눈치였다.
‘항우는 정말 강하군.’
조아생 뮈라와 충분히 모의전을 가져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항우의 무력은 실로 역사에 길이 명성을 떨칠 만했다.
사도 셋이 합세해서 덤볐는데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사전 계획대로 콜럼버스의 마비침을 저격용으로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었을 터였다.
‘완벽하게 코너로 몰아넣고 두들겨 팼는데도 위험했다.’
작전은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먹혔다.
항우의 군세를 11시 구석으로 몰아넣고서 완전히 밀봉시켜버렸다.
이리저리 치고 다니며 소모전을 펼쳤으면, 기동성에서 밀려 한 지점에 화력을 집중시킬 수 없는 이신이 불리할 뻔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마력석 채집장 하나를 통째로 내주면서 항우를 몰아넣은 것이다.
“아까웠다.”
이신은 항우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항우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쳇 하고 혀를 차고는 마지못해 손을 맞잡았다.
“또 마주쳤을 땐 네놈이 패하게 될 것이다.”
“기대하지.”
이어서 악마군주 아미가 소원을 물었고, 이신은 당연히 마력이라고 이야기했다.
악마군주 아미는 점성술과 학예에 조예가 있고 적을 불태워 죽이기도 하며, 충실한 패밀리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신은 그 어떤 것도 흥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특유의 음울한 말투와 함께, 악마군주 아미는 이신에게 마력을 제공했다.
마력 총량의 1%인 3,410마력!
[마력: 13,871/13,871]‘이제는 마력을 달리 쓸 데가 없군.’
이미 사도 5인에게 무기·방어구·능력을 부여했고, 하급 악마로 만들어주며 권속으로 삼기도 했다.
이제는 더 마력을 쓸 데가 없었다.
‘마력에 여유가 생기면 사도들을 중급 악마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군.’
중급 악마가 되어서 자신의 치유 능력이 더 발전한 것처럼, 사도들의 능력도 더 진화할 테니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중급 악마가 되려면 마력 1만이 넘어야 하므로, 당분간은 사도들에게 마력을 쓸 일이 없어 보였다.
악마군주 아미 일행이 돌아가 버리고, 그레모리가 다가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또 이겼네요.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배팅이 큰 판에서 이겨서 다행입니다.”
“네, 덕분에 52위로 서열이 껑충 올랐어요. 이 기세라면 10위권까지도 몇 년 안 걸리겠어요.”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아무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호, 카이저만 믿을게요.”
***
현실로 돌아왔을 때 생소한 방의 풍경에 이신은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금방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이사 왔었지.’
현실로 따지면 어제 막 용인의 저택에 이사를 와서 하루를 보냈다.
그러고서 마계에서 오래 있다가 왔으니 당연히 새로운 방 풍경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일이 4강전이군.’
오늘은 빡세게 훈련을 해야 할 듯싶었다.
마계에 있는 동안 게임에서 손 놓고 있었던 후유증도 극복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워낙 빈번해서 금방 감각을 되찾을 자신이 있는 이신이었다.
잠깐 마당에 나오니 꽃이 가지런히 정돈된 정원에 아침햇살이 내리쬐는 예쁜 풍경이 비춰졌다.
마침 정원 한가운데에 그네가 보여서 거기에 앉았다.
흔들거리는 그네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을 쐤다.
확실히 나이가 들긴 한 것 같았다.
1분 1초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게 싫었던 이신은 이제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낼 줄 알게 되었다.
현실과 마계를 오가며 쉴 새 없이 승부를 치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친 건가?’
최환열이 은퇴를 결심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최환열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지쳤다고.
널 이길 자신이 없다고.
강한 상대를 만날수록 더욱 더 독하게 훈련했는데, 이제는 그럴 연료가 고갈된 것 같다고.
그래서 은퇴한다고…….
그 말에 덜컥 겁이 났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자신 역시 저렇게 될 거라고 말이다.
이신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직 난 지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4강전의 상대 진철환은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결승전에 차이가 올라오든 박영호가 올라오든 두렵지 않았다.
위협을 느끼긴 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언젠가는 추월당한다 해도 아직은 아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나는 텅 빈 것처럼 공허한가.
“뭐하세요?”
문득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신은 고개를 들었다.
주디는 부스스한 잠옷 차림 그대로 마당에 나와 있었다.
창밖에 보이는 이신을 발견하고는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냐.”
이신은 그네에서 일어섰다.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디가 문득 말했다.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이신은 흠칫 놀랐다.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었다.
“글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하군.”
주디는 그런 이신의 손을 잡았다.
그레모리의 공격적인 스킨십에 익숙해진 탓에 이신은 딱히 그 손길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힘내세요.”
“그래.”
이신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
무엇을 위해 힘내야 한단 말인가?
***
그날 하루는 연습실에도 가지 않고 장양과 함께 죽기 살기로 훈련했다. 장양 또한 이신의 4강전 준비를 돕기 위해 특별히 출근하지 않았다.
마계에 머물다 온 공백기가 무색하게도 이신은 첫판부터 승리를 장식했다.
이에 자극받은 장양이 발동이 걸린 듯 거세게 덤벼왔고,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진철환은 공격적인 플레이로 올해의 자기 스타일의 가닥을 잡았다.’
시즌이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면 마땅히 선수들의 스타일도 조금씩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 개성은 변함없지만, 그 틀에 맞춰서 조금씩 자신을 바꾼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들은 마땅히 그렇게 한다.
그렇다면 이신은 공격적인 괴물 스타일에 대비하여 준비해야 했다.
장양은 이에 딱 걸맞은 연습 상대였다.
격렬하게 피 흘리는 격전을 거듭하면서 이신은 완전히 공백기를 극복했다.
조금씩 발톱을 드러내면서 보다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와……! 난 정말 아직 멀었어.”
존이 멍하니 이신의 플레이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감탄하기는 차이도 마찬가지였다.
“장양이 저렇게 밀리는 모습은 보기 힘든데.”
두 사람은 하루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자마자 이신과 장양의 게임을 구경 중이었다.
“왜, 선생님한테는 자주 밀렸잖아.”
“평소에는 주로 운영이나 타이밍에서 밀린 거지. 저렇게 같이 공격적으로 나오면서 맞불을 놨는데 장양이 밀리고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플레이가 원채 공격적인 장양의 플레이는 이신을 보며 게임에 입문한 영향이 컸다.
그런 장양이 가장 좋아하는 상대는 자신과 비슷하게 공격적인 적이었다.
공격적인 만큼 싸움을 잘 받아주기 때문.
컨트롤.
순간 판단.
이 두 가지가 기계처럼 완벽한 장양은 전투에서 지는 법이 거의 없었다.
적 병력 규모를 슥 보고,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한눈에 견적 내리는 장양의 재능은 그만큼 무서웠다.
그것만큼은 이미 이신을 능가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의 이신은 달랐다.
광전사의 혼이 빙의된 것처럼 미친 듯이 싸워댔다.
싸울 듯 말 듯 약 올리며 유혹하는 특유의 움직임이 없어졌다.
그냥 적을 만나면 무조건 달려들었다.
덕분에 총성과 유혈이 끊이질 않아서, 존과 차이는 두 사람의 연습 게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게임 진짜 재미있다.”
“계속 싸워대니까 지루할 틈이 없어.”
저 장양이 밀려났다.
난폭하게 밀어붙이는 이신의 플레이에 압도되었다.
확장과 물량이 강점인 괴물이 날개를 펼칠 틈이 없었다.
이신은 계속 여기 저기 몰아붙이며 상대의 확장 기지를 부쉈다.
장양은 완전히 압도당한 채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 잠깐 쉬자.”
이신은 이어폰을 빼고 일어섰다.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요?”
“컨트롤 정말 좋았어요.”
존과 차이가 와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괜히 빈말을 하지 않는 제자들이기에 그 찬사는 진심이었다.
이신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완벽해.”
“그럼 저도 이제 슬슬 선생님을 결승전에서 만나기 위해 연습해야겠네요.”
차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 차이에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주디가 핀잔했다.
“옷이나 갈아입어. 밥 먹어야지.”
“알았어.”
“존, 너도.”
“네~!”
두 소년은 후다닥 2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주디는 문득 이신을 바라보았다.
장양이 맥을 못 출 만큼 컨디션이 완벽한 이신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주디는 이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
-2021년 전반기 개인리그 4강 1경기! 올도어SCC 인류 제국의 황제 이신과 JKT 괴물 제국의 황태자 진철환이 마침내 만났습니다!
-e스포츠를 오랫동안 군림해 온 신에게 도전하는 진철환 선수의 험난한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선 선수들의 인터뷰부터 보시죠!
경기장의 대형화면에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먼저 화면에 나타난 선수는 진철환.
경기에 앞서 미리 녹화해놓은 인터뷰 영상을 재생하는 것이었다.
-오늘 컨디션이 어떠신가요?
-나쁘지는 않은데, 사실 좀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니까요.
-이렇게 큰 무대에서 이신 선수를 만났으니까 당연히 부담이 되실 수 있을 텐데요, 이신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실상부한 역사상 최고의 프로게이머에게 감히 제가 뭐라고 평가내릴 수 있을까요? 제가 앞으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철환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질 생각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이기고 결승 갈 겁니다.
도전적인 진철환의 인터뷰가 끝나고,
“꺄아아아아아악!”
“오빠―!”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이신의 등장이었다.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조각같이 대칭이 완벽한 이목구미.
검정색의 팀 유니폼을 기가 막히게 잘 소화하는 모델 같은 아우라.
이신으로 가득 채워진 대형 화면은 그것만으로도 호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영상미가 느껴졌다.
-진철환 선수에 대해 평가를 짧게 내리자면?
-제법.
-아, 정말 짧네요.
“하하하!”
“진짜 짧다, 깔깔!”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한결같은 이신의 성격이었다.
-그럼 이번 경기는 어떤 식으로 흘러갈 것 같습니까?
이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피 튀는 혈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신의 인터뷰는 마지막 한마디로 마무리 지어졌다.
-결국 제가 이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