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16)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오빠, 왔어?”
“어.”
내가 참 여동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뒀어.
보름 만에 처음 봤는데 어제 본 것처럼 인사하잖아.
“그게 다야?”
“뭐가.”
“너희 극단…. 아니다.”
“응?”
오늘 오디션 참가자 이름을 부르려다가 포기했다.
그렇게 좋은 꼴을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 오빠 없는 동안 사람들이 우리 집 찾아왔었어.”
“어디서?”
“템페스트 엔터랑 레인보우 엔터랑….”
레인보우 엔터면.
“세미 씨? 아니면 장 대표?”
제주도에서 급히 오느라 이제서야 떠올랐다.
그쪽은 나중에 연락하려고 미뤄두고 있었는데.
띠링─
그때, 성기훈 감독이 나에게 톡을 보냈다.
[JTBS에 잠깐 들르시죠 회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보나 마나 제작비 관련된 내용이겠지.
투자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투자를 하는 게 방송국이고.
거의 절반 이상에 가까운 제작비를 방송국에서 충당해야만 하니까.
국장이 보기에는 못마땅할지도 모르겠네.
그때, 옆에서 희정이 말을 걸었다.
“오빠 드라마 편성 확정이라며. 지금 뉴스에 순정마초 기사 떴어.”
“뭐?”
《JTBS의 새 드라마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용기인가? 만용인가?》
기사 제목 미쳤냐.
그냥 싫으면 싫다고 해.
“오빠, 진짜 세미랑 드라마 찍더라?”
“어. 그렇게 됐어.”
“근데 남주 신인배우는 너무 도박 아니야?”
“응. 아니야.”
“드라마 보는 시청자 거의 다 여자야. 남주가 제일 중요하다고.”
“…. 지성호 나옴.”
“나는 봄.”
솔직히 희정이 말처럼 남들 눈에는 도박으로 보일 뿐이었다.
신인작가와 신인배우, 대작과의 경쟁까지 겹친 비운의 드라마.
제정신이 박혀있으면 그런 드라마에 비싼 돈 주고 광고를 던질 이유가 없었다.
뉴스 기사에서는 예상 시청률을 0.5%, 많으면 1%로 못 박았다.
아무리 그래도 종편에서 JTBS 영향력도 있는데.
거기다 공중파에서 성 감독이 히트시킨 드라마가 얼만데.
그리고 나는 또 어떻고.
‘아, 나는 존망인데.’
아니지. 나는 킹갓시스템이 있잖아.
“오빠는 진짜 재수도 없네. 하필이면 태양을 쏘다랑 붙냐.”
“그러게…. 처음에는 그냥 편성만 받자는 마인드였는데.”
“너무 낙담하지 마. 성기훈 감독이면 유명하잖아.”
성 감독 실력이면 내가 시스템으로 본 드라마를 거의 그대로 찍어줄 수 있겠지.
“힘내. 아마 웰메이드 드라마 소리는 무조건 들을 거야.”
“그건 당연하고, 대박 나야지.”
“원래 케이블 드라마는 다들 다운받아보거나 재방으로 보잖아.”
“그렇긴 한데….”
“너튜브 짤로 돌아다니는 것도 화제성 올리는데 도움이 될 거고.”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연신 위로를 해주는 희정.
그녀가 보기에도 승산이 없는 듯 하다.
“그래도 자본금이 많이 필요한 건 아니라서.”
“그렇겠지. 신인배우만 두 명이니까.”
“그니까 적당한 기업 하나만 물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순정마초의 경우에는 출연료가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다.
주연급 배우들 회당 개런티를 다 합쳐도 4천을 넘지 않는 최저가 구성.
허나, 지금은 그게 장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신인배우와 걸그룹 멤버가 주연인 드라마에는 아무도 투자를 하지 않을 테니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투자와 협찬.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석 달간 지지고 볶을 돈이 필요했다.
“희정아, 잠깐 나갔다 올게.”
“어. 오늘은 집에서 자는 거지?”
“아마도.”
나는 곧바로 JTBS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성 감독에게 톡을 보냈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 * *
천성 그룹 부회장의 저택.
대략 스무 명의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식탁 앞에 앉은 부회장 직계와 손주들, 동생 내외에 자식들까지.
서빙하고 요리하는 고용인의 수까지 더하면 상당한 규모였다.
“새롬아, 자주 얼굴 좀 비추지 그러냐?”
“그러게. 막내 얼굴 보는 게 하늘의 별 따기야.”
아버지 앞에서 친한 척 위선 떠는 오빠와 언니.
새롬은 배다른 남매들의 가식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 연락처는 아세요?”
“….”
그때, 부회장의 ‘현 부인’이 새롬에게 한 마디 던졌다.
“못 배워 먹은 티를 내는구나.”
정태철 부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히려, 그들의 대화에 안절부절못하는 건 삼촌 내외였다.
“새롬이는 제가 잘 챙기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템페스트 엔터 말이야.”
부회장은 동생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딴따라 키워서 번 돈으로 입에 풀칠은 하느냐?”
오랜만에 보는 딸에게 하는 말치고는 제법 공격적이었다.
그런데, 새롬은 아버지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으며 응답했다.
“아버지도 국민들 등골 뽑아서 장사하시잖아요. 먹고살 만하세요?”
“저, 저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새롬은 주변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식품, 가전, 모바일, 석유화학, 자동차까지.
천성 그룹 특성상 소비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 주류였는데.
최근에 중공업 사업에서 철수한 아버지를 비꼬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회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막내딸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엔터 일은 정리해라.”
“무슨 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내가 네 아비다. 그걸로 부족하냐?”
평소였다면 칼같이 끊었을 새롬.
그런데, 그녀는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 투자 한 번 하시죠.”
“뭐? 이미 템페스트 엔터는 투자금 없이도 잘 굴러가는 거로 아는데.”
“아니요. 드라마에 투자하세요. 아버지.”
“허허….”
부회장은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실소를 터트렸다.
“일을 정리하라고 했더니 오히려 투자를 제안하는구나.”
“지금 추진하고 있는 드라마에 투자금이 잘 안 모여서요. 투자 한번 하시죠.”
원래는 아버지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새롬이었는데.
평소와 다른 반응에, 부회장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진심이냐?”
“장난 같으세요?”
천성 그룹 부회장에게 드라마를 투자하라고 말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 터였다.
“내 투자금 회수 못 하면 어쩔 건데?”
“다음에 갚을게요.”
“아니. 갚지 말고 퇴사해. 전자 쪽에 상무 자리 하나 비워놓으마.”
새롬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드라마 종영 후 반년. 그 안에 못 갚으면 그렇게 하시죠.”
“아니, 딱 한 달. 그리고 다른 작품으로 번 돈은 무효다.”
“…. 그러시죠.”
정새롬은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듯 보였다.
템페스트의 정기태 대표는 입을 떡 벌리고 조카를 쳐다봤다.
‘아니, 쟤가 오늘따라 왜 저러는 거야.’
정 실장을 잃는 건 회사에서도 큰 손해였다.
차라리 드라마 하나쯤 포기하면 그만인 것을.
허나, 정 대표는 속으로만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 * *
JTBS 방송국.
성기훈 감독을 2시간째 기다리게 만든 방 국장.
그는 뒤늦게 나타났지만 되려 큰소리를 쳤다.
“성 감독, 임원 회의 중에 대체 전화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국장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자네 편성이 내 잘못이라고?”
“그럼 제 잘못입니까?”
방 국장은 이글거리는 성 감독의 눈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앞에 편성됐던 드라마는 지금 초상집이야. 낙마해서 큰 수술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 그 책임을 왜 우리가 져야 합니까?”
“어허, 성 감독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사람이 다쳤는데.”
그는 국장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드라마를 무슨 두 달 만에 찍어요!”
“옛날에는 다들 쪽대본으로 찍고 그랬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방 국장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김진우입니다.”
“아, 그쪽이 작가분…. 방형태 국장이요.”
“네. 멀리서 뵌 적 있습니다. 이민주 작가님 보조 작가로 일 할 때요.”
“아…. 그랬었나. 허허.”
김진우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국장님, 솔직히 저는 두 달 후에 촬영 들어가도 별로 상관 없습니다.”
“김 작가님!”
성 감독이 큰 소리로 불렀지만 진우는 국장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16화 대본을 완결까지 다 쓰고 시작하면 촬영 동선 낭비할 일도 없겠죠.”
“뭐, 뭐라고?”
“제 대본은 수정이 필요 없어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2부까지 쓴지 고작 한 달도 안 되었을 텐데. 지금 무슨 소리를….”
“앞으로 한 달 안에 완결 낼게요.”
“허, 참. 그게 가능한 건가?”
“그럼요. 대신 문제는 따로 있죠.”
방 국장과 성 감독은 침을 꿀꺽 삼키고 진우의 말을 경청했다.
“듣자 하니 6화까지 보고 제작비 지원하신다면서요.”
“그건 정 실장이랑 이미 이야기를 다 끝낸….”
“땡겨주시죠. 회당 1억.”
주연급으로 나가는 돈이 고작 4천인 걸 뻔히 아는데, 진우는 당당하게 1억을 요구했다.
“허 참, 자네는 내가 바본 줄 아는 것 같은데?”
“다른 드라마에서도 그 정도 제작비 지원은 하시지 않습니까?”
“매일 랍스타라도 먹을 셈인가?”
“그런 건 아니고…. 조연급 캐스팅을 호화롭게 해야죠.”
“주연배우는 신인으로 쓰고, 무슨!”
진우의 당당한 요구에 방 국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 국장님도 촬영 펑크나는 건 싫으시잖아요.”
“…. 8천에 가지.”
“9천, 콜?”
“아니, 여기가 무슨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저도 메인작가 체면에 제작사 대신해서 흥정하는 거 쉬운 일 아닙니다.”
“자네…. 그러다 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우는 수차례 성공한 작가쯤은 되어야 보여주는 태도를 고수했다.
한 번쯤 성공한다고 해도 인기작가 타이틀을 달기 어려운데.
말 그대로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국장을 쪼아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당당한 신인의 패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시발. 개쫄리네.’
이러다 방 국장한테 찍히면 JTBS 드라마는 영원히 안녕 하는 거잖아.
SBC는 이민주 작가 본진이니까 제끼면 남은 방송국이 몇 군데지.
“회당 9천에 가지. 이번 드라마 꼭 성공했으면 좋겠군. 진심으로.”
결국, 방 국장은 허탈한 목소리로 성공을 기원했다.
흡사 저주처럼 들리는 자본주의 축복이었다.
드르륵─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하는 방 국장.
얼핏 봐도 불편한 기색을 한껏 드러낸 모습이었다.
“김 작가님, 괜찮으시겠어요?”
성 감독은 진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감독이라고 작가를 챙겨주는 건지.
“네. 어떻게든 성공해야죠.”
“음?”
“방 국장님도 드라마 성공하면 화가 풀리시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네?”
“한 달 만에 대본 다 쓸 수 있는지 물어본 건데.”
소시오패스냐?
* * *
그날 저녁,
성 감독은 급하게 주연배우 미팅을 잡았다.
단 하루라도 시간을 아끼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오디션 끝나고 바로 합격 통보를 받은 임재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초상집에 온 재준을 반겨주었다.
“재준아, 템페스트 엔터랑 계약하기로 한 거야?”
“네. 오디션도 거기서 봤고….”
얘는 뭐 그딴 이유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냐.
“김 작가님도 템페스트 소속이시잖아요. 하하.”
“음, 나 전속계약 아닌데?”
“엥? 아니, 그런….”
은근히 맹한 구석이 있네.
“그래도 잘했어. 템페스트는 신인 대접도 나쁘지 않으니까.”
“아, 넵.”
나도 한동안 템페스트하고만 일할 것 같기도 하고.
잠시 후,
시간에 맞춰 다른 사람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눈으로 인사하는 세미에게 미소로 화답해 주었는데.
정새롬 실장은 나와 세미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김 작가님, 진짜로 직접 제작비 컨펌을 받은 거예요?”
“네. 뭐, 구두 계약이긴 하지만.”
새롬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국장님이 정말 제작비를 편성해 주셨다고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잘됐네요. 투자사도 해결했고, 제작비도 충당했으니.”
“네? 투자사요? 어디를 말씀하시는….?”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네.”
이유는 모르겠지민, 냉랭한 모습의 정새롬 실장.
평소에도 따뜻한 성격은 아니지만, 오늘은 특히 차가웠다.
곧이어, 전부 모인 것을 확인하고 성기훈 감독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앞으로 두 달 후에 첫 방송이 나갈 겁니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인 채 그의 입을 쳐다봤다.
“지금부터 한 달 안에 조연 캐스팅, 연출진 세팅까지 마치고 바로 촬영 들어갈 겁니다.”
그중에는 첫 촬영 이전에 반드시 포함되는 스케줄들도 포함될 것이다.
숨 막히게 바쁜 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바로.
“김진우 작가님, 앞으로 한 달 이내에 완결할 수 있겠습니까?”
성기훈 감독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질문했다.
“흠, 글쎄요….?”
“아니, 아까는 분명히….”
“3주면 됩니다.”
의문이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상식을 벗어나는 집필 속도에 놀랄 만도 했다.
“이왕 모인 김에 곧바로 조연 캐스팅부터 조질까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말한 건데 괜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