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2)
마법처럼 새하얀 광채가 휘몰아치는 테이블.
그 앞에 앉는 순간, 빛이 아주 천천히 내 머릿속에 침투했다.
“흡.”
깜짝 놀라는 소리를 듣고,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시각이나 청각을 이용하지 않고 ‘기억’을 건드리는 방식.
귀신에 홀린 건지, 외계에서 온 기술력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사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짧은 드라마가 펼쳐졌다.
‘실사 드라마잖아….!’
제주도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시작하는 흔한 재벌물의 도입부.
모르는 얼굴의 남자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호텔 로비에서 마주치는 여자 주인공.
그녀의 얼굴은 정확히 퍼플걸스의 세미와 일치했다.
이어지는 대사들은 배우들의 연기와 맞물려 돌아가며 시너지를 발휘했다.
명확하게 꽂히는 발성과 매끄러운 표정 연기.
진부한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는 참신한 연출.
“아…. 재밌다.”
대략 20분가량의 도입부를 끝으로 드라마가 일시정지되었다.
재생이 자동으로 멈춘 건 아니고, 내 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지되었다.
마치, 대본을 쓰는 동안 기다리는 시스템의 어떤 기능이 작동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재고 따질 것도 없이 노트북을 꺼내었다.
타닥타다닥─
단순히 영감을 얻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냥 정답을 알고 푸는 시험지 같은 느낌이었으니.
한번 들은 대사가 줄줄 암기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환경과 주요 소품에 작품의 분위기까지.
모든 요소가 생생하게 떠오르며 내가 작성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표현력도 갑자기 늘어난 기분이야.”
진짜 정답지라도 펼친 것처럼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단어가 ‘기억’났다.
이후, 다음 장면부터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집필을 이어갔다.
재밌는 드라마를 즐기지도 못하고 바쁘게 손을 움직여야만 했다.
“와아, 하얗게 불태웠어….”
결국 미지의 능력 덕분에, 1부 분량의 드라마 집필을 손쉽게 마무리했다.
【제한 시간 : 13분 27초】
고작 너덧 시간 만에 완성한 1부 대본.
창작의 고통 따위는 일절 없이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갔으니.
“이거 혹시 원래 존재하는 작품은 아닐까?”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해지는 정도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라리 그게 그나마 조금은 더 자연스럽잖아.
“퍼플걸스 세미.”
남자 주인공은 모르지만 여자 주인공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1군 걸그룹이라고 하기엔 음방에서 1등을 한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2군으로 치기엔 남덕들의 지지기반이 탄탄한 그룹.
일단, 검색창에 퍼플걸스 세미를 검색해서 작품 활동을 뒤져봤다.
“웹드라마? 이거 하나가 끝이야?”
그녀가 출연한 경력은 고작 회당 10분짜리 4부작 웹드라마가 전부였다.
심지어, 조회수가 퍼플걸스 팬클럽 회원수보다 적었으니 쫄딱 망한 드라마.
그녀의 연기 실력에 호기심이 생겨 웹드라마를 시청했다.
뻔한 학원물 클리셰로 덧칠한 내용.
연출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스토리에서 배우의 매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진짜 세미 맞아? 방금 내가 본 드라마에서는….”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아픔을 삼키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는 여주인공.
흔하면서도 모순적인 캐릭터를 자신만의 색깔로 녹여내지 않았던가.
분명히 같은 사람이건만, 웹드에서는 그런 세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재미없는 드라마였음에도 꾸역꾸역 3회를 지나쳐 4회를 틀었다.
“!”
그런데, 4화에는 내가 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이 떡 하니 등장했다.
그것도 소모성 악역으로 등장해서 말도 안 되는 억지 고구마를 먹이는 발암 캐릭터.
“이런 시발. 뜬금없이 스토커라니. 이게 말이 되냐?”
복선도 없이 갑자기 삼류 악당이 등장하는 건 백번 양보할 수 있었다.
근데 경찰도 없는 세기말 무법지대로 아니고, 장난감 식칼 들고 와서 뭐 하자는 건지.
“이 대사로는 이병현 형님이 와도 못 살려.”
당연히 댓글창에는 퍼플걸스 세미를 스토킹하는 악역 남캐에 대한 욕으로 도배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작품에 몰입했다는 증거지만.
댓글을 다는 사람의 99%는 퍼플걸스의 찐팬이니까.
“어휴, 미치겠네.”
이내, 나는 다시 드라마를 떠올리려고 했는데 뭔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제한 시간이 남아 있을 때는 분명히 머릿속에 콕 박혀있던 기억.
대사 한 줄, 손짓 하나, 미묘한 표정과 말투까지 생생하게 떠올랐었는데.
이제는 방금 시청하고 돌아선 드라마처럼 가물가물한 형상만이 남아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 * *
대략 다섯 시간 동안 나에게 발생한 기이한 현상.
내가 쓴 작품을 수십 번씩 보고 또 보면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고민했다.
혹시나 싶어서 카페 직원에게 새하얀 빛에 대해 물어봤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초능력?”
흔한 판타지 영화의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SF 영화의 미래 기술을 훔쳐다 썼다고 봐야 할지.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능력이다 보니 나도 썩 당황스럽다.
“그나저나…. 글은 진짜 엄청 재밌네.”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뻔한 재벌 로맨스지만, 여주의 매력과 남주의 순정으로 부족함을 커버했다.
보통의 드라마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장 2부를 내놓으라고 말할 만큼 재밌는 내용.
특히, 고작 시나리오만 봐도 주인공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에서 쉽게 상상되었다.
카페에서 느꼈던 영사기와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좋은 대본이었다.
나는 방을 나와서 희정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야야, 일어나 봐.”
“아, 왜!”
여동생은 짜증을 내며 문을 벌컥 열었다.
“방금 톡으로 대본 보냈으니까 한번 읽어봐.”
“아씨, 내가 언제 오빠 대본 읽은 적 있어? 쓰레기 활자 조합물이잖아.”
“응. 니 연기.”
“….?”
나는 다시 방에 돌아와서 인터넷에 접속했다.
“공모전에 던져봐야 하나.”
내가 썼지만, 내가 썼다고 하기엔 조금 민망한 대본.
솔직히, 당선된다는 보장은 없어도 경쟁력은 충분히 있는 작품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재밌으니까.
“공모전이라….”
보통, 방송사의 공모전은 대부분 시놉시스와 4화 분량의 대본을 요구했다.
그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공모전에서는 준비 분량이 소소한 편이었으니.
“일단 두 번째 회차까지만 내 힘으로 쓰면 어떻게든….”
띵동─
그때, 일전에 경험한 알림음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용 :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2부】
【장르 : 로맨스, 재벌】
【장소 : 오목교역 1번 출구 근처, 스타앤벅스】
【제한 시간 : 17시간】
【※ 브론즈 승급 : 110-110101-1011(가상 계좌, W Bank)】
【※ 입금 금액 : 0원 / 1,000만 원】
“좋았어!”
장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다른 카페였다.
곧바로 어플을 켜서 스타앤벅스 해당 지점의 오픈 시간을 확인했다.
“일찍 여네. 어제보다 시간은 타이트하긴 한데.”
집필하는데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6시간이면 충분하니까.
대충 오전 11시쯤 가서 쓰기 시작해면 여유롭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한 시간만 더 쳐서 아침 10시쯤 가볼까.”
어제처럼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지만 않는다면.
아마 큰 무리 없이 2부 집필까지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아직도 어떤 원리로 능력이 생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데 있을 때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오빠아~”
“미친.”
여동생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소름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머리털 나고 들어본 기억이 없었으니.
벌컥─
“노크하고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 같은데?”
“에이, 무슨 소리야. 매번 하는데.”
“아니야. 확실해. 너는 노크가 뭔지 모르는 인간이야.”
“이 쉑. 아, 아니. 우리 오빠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네여.”
“…. 왜 그러는 거야 진짜.”
슈욱─
“?”
그녀는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A4 용지를 불쑥 내밀었다.
안 읽겠다더니, 그사이에 프린트까지 해서 읽은 모양이다.
“이거 대본 진짜 오빠가 쓴 거야?”
“응. 내 손가락으로 쓰긴 했지.”
“우리 작가님, 저는 믿었습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인재가 태어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미친년.”
“이런 씹. 아니, 김 작가님. 당신이 김씨 가문의 기둥이 되어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드디어….!”
여동생 쉐에키는 언제나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재꼈다.
게다가, 내 앞에서 이렇게 코맹맹이 음성을 뱉는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그냥 빨리 말해. 하고 싶은 말 있잖아.”
“그, 서브 남주 매력 장난 아닌데?”
“뭐, 나쁘지 않지.”
두 명의 남주와 한 명의 여주.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구성.
그중, 서브 남주는 캐스팅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적당히 잘생기고, 조금만 연기를 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잘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저기….”
보아하니 희정이도 작품이 꽤나 괜찮았던 모양이다.
자기도 나름 배우라고 작품에 욕심을 내는 것 같은데.
“이 작품 혹시 나한테….”
“안 돼. 돌아가.”
“아직 말 안 했는데?”
“응. 꺼져.”
“…. 죽고 싶냐?”
마녀 같은 여동생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얇디얇은 가면을 벗고 살쾡이처럼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 뭐 어쩌라고.”
“하아…. 오케이. 쿨 거래합시다. 뭐를 원해?”
“희정아. 이 작품이 극단 사이즈로 보여?”
“에이, 그래도 어떻게 잘 살려보면….”
“퍼플걸스 세미.”
“응….? 갑분덕밍아웃?”
희정은 뜬금없는 걸그룹 멤버의 호명에 의문을 품었다.
내가 봐도 조금 뜬금없이 꺼낸 이름이기는 하지만.
“그 친구가 주인공이야.”
“…. 미친놈.”
찰지게 욕을 하는 여동생의 심정은 십분 이해가 되었다.
퍼플걸스 세미의 연기 경력이 풍부하거나, 연기력으로 검증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녀의 인기와 명성, 인지도만 봐도 나 같은 찌랭이와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이 바닥에서도 치열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걸그룹 시장.
지옥의 경쟁을 뚫고 ‘인기’ 걸그룹 대열에 속하는 이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혹시 이민주 작가님한테 부탁이라도 해보게?”
“아니, 거기는 어제부로 때려쳤어.”
“뭐!?”
“지금 미니 들어간 거 있잖아. 그거 작가가 홀라당 다 먹어버리니까 열 받더라고.”
“그래도 그동안 버틴 게 있는데….”
“다시 시작해봐야지.”
꽤 아픈 이야기를 덤덤하게 얘기해서 그런지, 희정은 뭔가 묘하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동료 보조 작가들이 딱 저렇게 나를 바라봤던 것 같다.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지 못하고 내쫓긴 사람을 볼 때의 얼굴.
“불쌍하게 보지 마라. 죽는다.”
“누가 불쌍하대?”
“재기할 수 있어. 두고 봐.”
“솔직히 방금 나한테 보낸 대로만 계속 쓰면….”
“계속 쓰면?”
희정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극단 각본가로 딱인 것 같아.”
“거기 망했잖아.”
“망하긴 누가 망해!!!!!”
희정은 소리를 빽 지르고 사라졌다.
피식─
아주 사소한 칭찬이라도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던 희정.
난생 처음 보는 여동생의 반응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섰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능력은 진짜라는 것을.
부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시스템이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전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여유롭게 스타앤벅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좆됐다.”
늦잠을 잔 것도 아니고, 커피숍이 문을 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 시간쯤 여유롭게 도착해서 빛이 나는 자리를 찾아내었다.
다만, 당연히 있을법한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으니.
하얀빛이 번쩍거리는 자리는 공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가장 인기가 많은 창가 자리 중 하나였기에.
“말 걸면 누가 봐도 헌팅이라고 생각할 거 아냐.”
눈 부신 햇살 만큼 아름다운 여인.
온갖 명품을 두르고, 벤츠 클래스 자동차 키를 당당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모습.
노트북이나 펼쳐진 자료들을 보면, 금방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만으로도 광채가 나는 미모의 여성.
이미 그녀는 주변 남성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제한 시간 : 7시간 6분 16초】
“설마 7시간 동안 저러고 있지는 않겠지?”
설마라는 단어는 쓰면 안 되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