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27)
자본주의의 총체.
인간을 등급으로 나열하고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장.
적어도 오늘만큼은 내가 이 바닥의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 신인작가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서도.
케이블 방송국에서 5%의 시청률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니까.
잠시 후,
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드라마국에 입장했다.
금의환향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써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이전의 고집불통 신인작가 이미지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지나가는 길에 PD들이 한마디씩 축하의 말을 던져주었으니.
“작가님 축하해요! 언제 술 한잔하시죠.”
“혹시 차기작 쓰고 계신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저기, 혹시 괜찮으시면 전화번호 좀….”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PD와 조연출들이 인사를 건넸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까지 안 하지.’
보조 작가 때 생각하니까 뭔가 씁쓸하네.
언젠가 조연출이 연락을 안 받아서 방송국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너도 나도 명함을 건네주면서 친분을 쌓기를 희망한다.
특히, 그중 한 명의 PD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성 감독만큼은 아니지만, 데뷔한 건 거의 비슷한 이찬영 감독.
“작가님, 이번에 배우들이 정말 잘 뽑혔거든요.”
“아, 그러세요?”
“네네. 한번 프로필만 확인해 보시면 안 될까요?”
“음…. 저 이제 겨우 방송 두 편 나갔는데.”
“에이, 요즘 새 작품 쓰고 있는 거 소문 다 났어요.”
거참, 비밀이 없는 동네야.
터벅, 터벅─
어차피 성 감독도 여기 오고 있다고 하니까.
아주 잠깐은 상관없겠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어…. 이 사람.”
“네? 아아…. 바름 엔터. 이렇게 막무가내로 돌리지 말라니까.”
막무가내로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았다!’
내 차기작 주인공….!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파일들 사이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진 한 장.
이내, 파일을 치워버리려고 손을 뻗는 이 PD를 막아서며 말했다.
“PD님, 이 남자 누구예요?”
“네? 아하하. 그냥 망한 회사예요.”
“…. 바름 엔터요?”
“네. 언제적 바름입니까.”
테이블에 놓여진 수많은 배우들의 프로필 포트폴리오.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분명히 내 차기작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거 프로필 파일 필요 없으면 저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아, 뭐 그럼요.”
“다음에 꼭 사례하겠습니다.”
“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제가 지금 컨택하고 있는 배우가….”
스윽─
이 감독을 무시하고 프로필 속 배우의 이력을 천천히 훑어봤다.
‘강준.’
5년 사이에 얼굴이 많이 변해서 이제 기억났다.
한때, 연기 천재라고 소문났던 아역 출신 배우.
아직 연기를 하긴 하나 보네?
5년 전에 고등학생 때 데뷔했지만, 서너 작품쯤 출연하고 강제 휴식기를 가진 배우.
그나마 남아있던 팬들도 지금쯤엔 다 떠나가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그 대부업 사무실에 들른 건가.’
꽤나 잘나갔던 바름 엔터가 한순간에 망했다는 소식은 이 바닥에서 제법 유명한 일화였다.
아무리 그래도 배우한테 돈 빌려오라고 할 정도면.
막장 수준이 아니라 밑바닥까지 간 것 같은데.
바름 엔터와 강준 배우에 대해 머릿속에 입력했다.
“작가님, 이 배우는 말이죠….”
옆에서 떠들어대는 이 감독을 어떻게 떨쳐내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언제 다가왔는지, 성기훈 감독이 그에게 한마디 하면서 바로 해결했다.
“이 PD, 국장님이 지금 작가님이랑 할 말이 있으시다는데.”
“아, 그, 그래요?”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이 감독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작가님, 국장님이 부르십니다. 같이 가시죠.”
“아, 그러시죠.”
* * *
드라마의 성공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
부와 명성을 모두 얻는 작가?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배우들?
돈 놓고 돈 먹는 투자사와 제작사?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는 이번 드라마에서 그 세 가지 요소를 전부 거머쥐었다.
김진우 작가와 계약했으며, 두 남자 주인공의 소속사임과 동시에 제작사를 겸했으니.
“이 정도로 성공할 줄이야.”
한 치 앞도 모르는 드라마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소위 ‘대박작’이 터지는 경우는 하늘이 점지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시청률 5%를 끊은 드라마.
MBS의 기대작을 두려워하기에는 이미 훌쩍 커버렸다.
이제는 그들이 순정마초의 존재감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블록버스터에 수많은 탑스타들을 데리고 쫄딱 망해버리면.
“내가 그 사람들 입장이라고 상상하니까 눈앞이 깜깜하네.”
사실, 아직 승부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먼저 시청자들을 선점한 이쪽이 유리한 건 분명하다.
그때, 누군가 실장실에 노크를 했다.
똑, 똑─
“들어와요.”
“실장님, 결재받으러 왔습니다.”
“아, 변 팀장님.”
이내, 부하 직원의 서류를 본 새롬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재준이랑 성호 스케줄이 몇 개예요?”
“이틀 만에 예능 다섯 건, 라디오 7건 들어왔어요. 광고도 벌써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
변혁주 팀장은 들뜬 마음으로 CF를 추려내었다.
“일단 광고 중에는 이미지 손상되는 것만 빼면 대충 서너개 정도….”
“스케줄 전부 취소하세요.”
“네에!? 지,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새롬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촬영 끝날 때까지 추가 스케줄은 없습니다.”
“실장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죠! 그 사이에 시청률이 떨어지면….!”
“드라마 중간에 연기력 논란 나오면 책임지실 수 있으세요?”
“아, 아니. 그건….”
평소에 직원들에게 따뜻한 그녀였으나, 한 번 의견이 틀어지면 누구보다 차가웠다.
아니, 애초에 일당백 직원들과 의견이 크게 차이 나는 경우 자체가 몇 번 없었다.
“무조건 이번 작품이 먼저예요. 적어도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아…. 예. 알겠습니다.”
이번 작품의 마지막 촬영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한 달 정도.
임재준도, 지성호도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에 불과하다.
고작 드라마 두 편을 방영했는데, 들어오는 광고 다 주워 먹고 스타병이라도 걸리면.
그럴 배우들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있을 위험을 대비하는 게 소속사의 역할이니까.
“저기, 여민서 배우 건은….”
“아, 김 작가님 차기작이요?”
“네!”
새롬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술을 떼었다.
“오늘 작가님 뵙기로 했으니까 말씀드려볼게요.”
“예. 알겠습니다.”
* * *
김진우의 데뷔작이 망하기를 가장 바란 사람이 있다면.
그 첫 번째는 이민주 작가일 것이며, 두 번째는….
“이게 나라냐?”
어떤 여배우는 나직하게 불평을 터트렸다.
그동안 그녀가 알고 있던 상식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결과였다.
무슨 신인배우 두 명을 주연으로 꼽고 시작했는데 5%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여민서는 수차례 본 시청률 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김진우 작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의 대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미 지나간 순정마초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
여민서는 그 작품에 꽂혀서 요근래 계속해서 대본을 읽고 있었다.
마지막 씬에서 교통사고에 당하는 여주인공은 당연히 아니었고.
“자산관리사 역할.”
이미 남자 주인공과 깊은 인연을 맺고 시작하는 배역.
회귀하면 존재가 삭제되는 남자 주인공의 자산을 관리해주는 서브 여주인공.
그녀 역시 남자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남자를 잊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을 잊을 수는 없으니까.
익명의 천재 투자자를 동경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비련의 여자.
그동안 재벌이나 연예인 역할만 해왔는데, 새로운 연기 변신을 할 때도 된 것 같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건.
“왜 하필 이 역할이 서브 여주인공이야? 자존심 상하게.”
작가가 굳이 교통사고에 당하는 한 씬 짜리 배역을 메인 여주라고 못 박아놓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자산관리사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뭐, 됐어. 전지연이나 송혜윤급이 메인 여주인공 하면 되니까.”
그 정도 세팅이면 자존심 상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겠는가.
“순정마초 시청률은 계속 오르려나.”
작가의 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배우가 기를 펴기 힘들다.
이대로 가면 차기작 때 의견 한마디 낼 때마다 절하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MBS ‘태양을 쏘다’와 붙을 테니까.
“음…. 그냥 적당히만 망해라.”
딱 다음 작품이 무난하게 제작될 수 있는 수준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며 정새롬 실장이 호출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잠시 후,
김진우는 여민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 * *
“싫은데요.”
김현지 배우님 보러 왔는데 왜 저 사람이 있는 거야.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정새롬 실장의 사무실.
내가 오기도 전에 이미 낯익은 배우가 앉아있었다.
“여민서 씨.”
“작가님, 호칭은 붙여주시죠?”
“….”
뭐라고 더 붙여줘야 하나.
호칭이 아니라 그냥 이름을 안 부르고 싶은데.
그나저나, 차기작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여민서가 앉아 있다는 건.
“이번 작품 주인공을 생각하고 계신 거겠죠. 죄송하지만….”
“아니요.”
“네? 그럼….?”
의외로 메인 주인공이 아니라 서브 여주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녀.
솔직히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지만, 그래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음, 서브 주인공 자리를 원하신다고요.”
“…. 네.”
“그것도 안 돼요.”
“….”
여민서는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나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앉아 있는 걸 보면 배역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솔직히 여민서가 서브 주연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내 쪽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해 줘야겠지.
만약 김현지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과연 같은 소속사의 까마득한 후배가 메인 주인공이라도 같은 생각일까?
차라리 성격 좋고 고분고분한 신인배우를 데려다 쓰는 게 마음 편하다.
뭐, 배부른 투정인 건 맞지.
어쩌면 자만일지도 모르겠다.
신인배우들을 데리고 대박을 터트린 시스템에 대한 확신.
보통 1화 시청자를 끌어당기는 건 배우의 인지도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는 보기 좋게 그런 낡은 공식을 깨트려 버렸다.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던 기자들도 이제는 전부 호평 일색이었으니.
“후우….”
그때, 정새롬 실장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두 분, 지금 제 앞에서 싸우시는 거 아니죠?”
“아, 저는 싸움 같은 거 안 합니다. 여 배우님은 모르겠지만.”
“이런….”
새롬은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물었다.
“작가님, 사적인 감정으로 민서를 미워하시는 건가요?”
“네? 설마요. 제가 여 배우님을 왜 미워합니까?”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네요. 민서 정도면 주연을 맡아도 부족하지 않을 텐데요.”
“그야….”
아마 정 실장이 아니었다면 순정마초는 제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JTBS 방송국은커녕, 너튜브에서 웹드라마로 제작되면 다행이겠지.
어쩌면, 비인기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의 취향이 아니라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여민서만 없었으면 편하게 말했을 텐데….’
정새롬 실장은 일말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럼 두 분을 절대 같은 작품으로 안 묶을 테니까.”
고저 없는 음성에 긍정으로 답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냥…. 그냥 정 실장을 실망시키는 건 싫었으니까.
이내, 그녀의 말마따나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번 작품의 메인 여주인공은 정해져 있습니다.”
사실, 정 실장에게 털어놓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나를 믿고 신인배우를 주연으로 인정해 준 그녀가 아니던가.
“…. 세미 씨나 재준이처럼요?”
“네.”
“그게 누구죠?”
정새롬과 여민서는 침묵을 지킨 채 내 입을 쳐다봤다.
두 여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김현지.”
“미친.”
급기야 여민서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참나, 김칫국을 얼마나 들이키는 거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