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28)
정새롬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시선을 고정했다.
“김현지 배우라…. 어떤 의미인 줄 아시고 있으시죠?”
“예. 이유를 물으시면 순정마초 때와 같아요.”
“이번에도 오디션을 보자는 건가요.”
“아, 그건….”
당연히 힘들 것이다.
임재준 때는 소속사가 없는 배우였지만, 지금 김현지는 엄연히 템페스트 엔터 소속.
김현지를 주연배우로 꽂아버리면 그 책임은 온전히 템페스트가 감당해야만 한다.
배경 믿고 회사빨로 주연을 꿰찼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
“저는 김진우 작가님 믿어요.”
“실장님!!!”
여민서가 소리쳤지만, 새롬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내게 말했다.
“단순히 성적으로 증명했기에 믿는다는 말입니다.”
“감사합니….”
“하지만.”
새롬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내 말을 끊어버렸다.
“아직 차기작에서 현지를 주인공으로 확정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네….?”
“작가님이 다음 작품을 저희와 함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
“저는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라서요. 제가 있는 자리가.”
“음…. 방법이 없을까요?”
정새롬 실장의 허락이 없으면 김현지를 주연으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김 배우는 어디까지나 템페스트 소속이며,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니까.
“대본이 좀 더 쌓이면, 그때 다시 말씀 나누시죠.”
“아…. 차라리 그게 좋겠네요.”
“딱 4부까지만 가져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새 작품의 1부 마지막 장면에 여주가 교통사고 당하는 파트.
그 씬 하나로 김현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이내, 새롬은 내가 듣는 앞에서 여민서에게 말했다.
“민서야, 이번 작품은 그냥 포기하고….”
“아니요. 상관없어요.”
“뭐?”
“할 거예요. 서브 여주. 김현지든 뭐든 내가 연기로 누르면 되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더 무섭다.
곧이어,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질문을 던지는 여민서.
“당연히 거절하지는 않겠죠?”
“그야, 뭐….”
“역시….”
“당연히 거절이죠.”
“뭐요?”
배우 하나 때문에 작품 망칠 일 있나.
“밸런스가 무너지잖아요. 기본 아닙니까?”
“….”
여민서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 같은 신인작가한테 까였으니까 억울하긴 하겠지.
“당신, 오늘 일 후회할 거야!”
“글쎄요.”
후회는 본인이 하는 것 같은데?
이내, 여민서는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벗어났다.
남아있는 정 실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꼭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에이, 미련이 남으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 정말 그 이유가 맞는 거죠?”
“아마도?”
이제 그만 나도 일어나봐야 할 것 같다.
“어디 가시게요?”
“진짜 제 배우님 찾으러요.”
“???”
드디어, 여태까지 미뤄둔 숙제를 처리할 시간이다.
* * *
집이 다닥다닥 붙은 한 주택지.
수도권이지만 고지대라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바름 엔터…. 그냥 막장 수준이 아니잖아?”
다 떨어져 가는 가옥.
거미줄이 쳐진 담장.
기름칠도 안 되어있는 대문.
끼이익─
심지어, 잠금장치도 없어서 누구나 출입이 가능했으니.
“진짜 여기 맞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긴 했는데 제대로 왔는지는 모르겠다.
내부의 마당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술병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선입견 없이 보려고 해도 이건 심하잖아.
이런 엔터에 있는 배우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터벅, 터벅─
“계십니까?”
한때는 멋들어진 한옥식 가옥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얼핏 봐도 허름한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 반응했다.
“당신 뭐야?”
언제 빨았는지 모르는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는 사내.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퀭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 여기가 바름 엔터 맞나요?”
“그런데?”
왜 반말이야.
“강철중 대표님과 대화를 하고 싶은데요.”
“그게 난데?”
아오, 진짜.
“반말하지 마시고. 대화를 좀….”
“그쪽이 먼저 남의 집에 무단침입했잖아.”
“…. 그르네.”
내가 잘못했네.
부르르릉─
그때, 바깥에서 이륜차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강준….’
한눈에 알아볼 만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그 배우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삼촌? 저분은….”
거지 대표님을 삼촌이라고 부르는 강준.
성 씨까지 같은 걸 보면 진짜 친삼촌인 것 같다.
“저…. 혹시 수금하러 오신 겁니까?”
배달 알바를 마치고 왔는지 로고가 붙은 헬멧을 벗으며 걸어오는데.
그의 눈빛과 말투에 묘한 적의가 느껴졌다.
“지금 그 말…. 사채업자한테 하는 말이죠?”
“그, 그럼 그쪽은 누구….”
지랄났네.
“순정마초 작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내, 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특히, 강 대표는 얼마나 놀랐는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어, 어….? 지, 진짜 순정마초 작가님!?”
“참 다행이에요. 바깥세상에 귀는 열고 있으셔서.“
“저기, 작가님. 일단 안쪽으로….”
안쪽에도 앉을 데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잠시 후,
그래도 종이컵에 믹스 커피 정도는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용인지, 서너 개쯤 고이 보관하고 있긴 했지만.
“시민센터에 가면 챙길 수 있습니다. 하핫.”
“제발…. 그냥 그런 말은 좀 안 하면 안 될까요?”
“아, 음. 작가님께서 누추하신 곳에는 어인 일로….”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강철중 대표.
그의 눈빛을 보니까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 정도면 마법이야.
그의 눈을 보자마자 강준 캐스팅하겠다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쏙 들어간다.
끼이이익─
그런데, 다시 한번 대문이 열리며 예기치 않은 손님이 입장했다.
여기는 무슨 만남의 광장이냐. 대문 오픈 뭔데.
“후우, 형님. 여기가 거기 맞습니까?”
“아, 여기는 올 때마다 뒤지게 힘드네.”
강준을 손절할지 심히 고민하던 찰나에 찐채업자가 나타났다.
“야야, 바름. 니들 저 고물 오토바이는 언제 처분할 거야?”
“그러게 말이야. 저거만 팔아도 한 달 치 이자는 갚겠네.”
험상궂은 얼굴에 짝귀를 가진 사내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왔다.
그 뒤에 어깨를 활짝 펴고 따라오는 떡대 형님의 얼굴이 익숙했다.
‘저분 내근직인 줄 알았는데 현장도 뛰시는구나.’
처음 들어온 짝귀가 사나운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이거는 뭐여? 새 배우 같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뒤에 따라온 떡대는 얼굴을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잠깐만. 저번에 봤던 얼굴인데?”
“음…. 또 뵙네요. 하하.”
“너 뭐 하는 놈이야?”
말씀이 지나치시네여 형님.
“지금 나갈 놈입니다. 하하!”
“뭐라고?”
“안녕히 계세요!”
거지 대표랑 강준이가 벙찐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사이에 친해졌다고 착각하는지, 눈가에는 그렁그렁하게 습기가 가득했다.
곧이어, 그들을 시선을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나와버렸다.
담배 마렵다. 군대에서 끊었는데.
“이거 좀 억울하네.”
존나 예쁘고 착한 여배우님이었으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줬을 텐데.
이렇게 삼촌이랑 조카랑 같이 궁상떠니까 손절각이 제대로 서잖아.
“후우….”
그래도 깡준이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니까.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에서 가족에게 잊혀진 채 슬픔을 삼키고 살아가는 주인공.
이렇게 현실이 팍팍하니까 드라마에서도 불쌍한 갬성 연기를 못할 수가 없겠어.
“아주 그냥 메소드겠어.”
차기작만 제대로 터지면 빚도 갚고 이 허름한 가옥도 갈아엎을 테지.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 도와줄까.”
내 돈 말고 다른 사람 돈으로.
* * *
“돈을…. 빌려달라고요?”
“아니요. 정확히 말씀하셔야죠.
“그러니까, 제가 저짝에 돈을 빌려주라고요?”
“그게 정답이죠.”
“…. 제가 왜요.”
새롬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데.’
내 뒤로는 촌놈 두 명이 주변을 연신 두리번대고 있었다.
떡대 형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겨우 데려온 강 씨 일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사무실 여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두 명을 세트로 묶어서 한강물에 빠트려버리고 싶다.
“굳이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강준이 차기작 남주라서?”
순간, 새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준 배우를 쳐다봤다.
그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네?”
이내, 새롬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강준 배우에 대해 저희 측에서 자체적으로 평가한 후에 도와드리겠어요.”
“오…. 그러면 빚을 다 갚아주시는 건가요?”
“네. 그리고 바름 엔터를 인수할 생각이에요.”
“인수요?”
강 대표와 강준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내가 낸 소린가?
“네. 바름을 인수하겠어요. 강 대표님도 그걸 원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
뭐, 다 쓰러져가는 엔터 붙잡고 있느니 그게 훨씬 낫긴 하다.
“네, 저야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 대표가 우렁차게 외치며 고개를 숙였고, 새롬이 천천히 입을 뗐다.
“다만….”
배우라고는 고작 조카 한 명에, 빚은 산더미인 소속사.
템페스트의 체급을 고려하면 인수가 아니고 흡수다.
또각, 또각─
곧이어, 한 캐비넷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는 새롬.
그녀는 내 앞에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면서 말했다.
“보증금으로 작가님 본인을 거세요.”
“아, 그럼 이거 노예계약서?”
“흐음, 연봉 1억 5천 받는 노예는 없을걸요?”
“…. 돈 많으시네요.”
준스타작가급 대우의 5년 전속계약.
연봉은 기본에, 작품 건당 받는 금액은 따로였다.
거기에 인센티브나 보조 작가 지원까지 포함하면.
“뭐에 대한 보증이죠?”
“당연히 차기작 성공에 대한 보증이죠.”
“또 시청률?”
“물론입니다.”
“…. 차기작 망하면 전속계약서에 사인하라고요?”
“네.”
망한 작가한테 연봉 1억 5천을 주겠다니.
이분 땅 파서 장사하시는 분인가요.
“제 말에 동의하시면, 강준 배우님은 이제부터 템페스트 소속이지만….”
“네. 그런데요….?”
“강준 배우님에 대한 권한은 김진우 작가님께 있어요.”
“수익까지도?”
“예. 회사에서 투자하는 비용을 제외하고. 추가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으로 지급하죠.”
“…. 괜찮겠어요?”
“그럼요.”
이건 뭐 거의 주식이잖아?
그것도 상한가가 확실한 종목.
망한 엔터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기업 인수가 이렇게 쉬운 거였나.
‘무엇보다….’
정새롬 실장이 이런 결정을 혼자 할 수 있는 위치였어?
표면적으로는 합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바름 엔터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 투자하겠다는 내용.
대표님 의견도 안 들어보고 독단으로 결정하다니.
이 정도면 회사의 실세 수준이 아니라 그냥 오너잖아.
사실, 내 입장에서는 손해볼 게 하나도 없었다.
만약에 내 차기작이 성공한다고 가정한다면.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강준이 크면 클수록 템페스트 안에서 내 영향력은 상승한다.
어쩌면 이곳에서 대주주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템페스트에서는 차기작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나를 묶어둘 수 있겠지.
성공하면 강준을 이용해서, 실패하면 전속계약을 통해서.
이렇게까지 나를 붙잡으려 할 줄은 몰랐는데.
“음….”
정새롬 실장은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왜요? 조건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새롬이 슬쩍 미소를 지으니까 두 남정네들은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아, 현타 온다.’
내가 저것들 때문에 희생을 해야 할까.
아니, 희생이라기보다는 작품만 생각해야지.
강준을 손절하면 내가 짊어져야 할 과제는 무엇이 남을까?
일단, 차기작에 걸맞는 남자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이제 1부 기한이 사흘 정도 남았으니까 모레까지.
‘불가능해.’
그리고 배우 변경권을 이런 식으로 강준한테 소진해 버리면.
나중에 논란이 터지는 배우가 있어도 임의로 삭제할 수 없겠지.
“바로 계약하시죠.”
“좋아요.”
활짝 웃고 있는 정 실장의 제안은 독이 든 성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