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3)
“괘씸한 놈! 이틀이 지나도 분이 안 풀리잖아.”
이민주 작가는 얼마 전 작업실을 뛰쳐나간 보조 작가를 떠올렸다.
이제는 베테랑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인재.
새끼 작가 때도 안 맞아본 대본을 면전에다 뿌린 건방진 녀석이었다.
무려 6년 동안 함께한 작가는 처음인지라,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했다.
그래서 더욱이 쌍욕을 하고 나간 그 자식에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바닥 좁은 거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안 좋은 소문 쫙 퍼트려놨으니, 다른 유명작가 보조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터.
이민주는 그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몰입감은 나쁘지 않지만, 대사 처리는 너무 튀어서 반드시 수정이 필요했다.
즉, 공모전에서 입상할 실력은 안 되고 영원히 보조 작가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
이거 뭐, 어차피 혼자 힘으로는 올라갈 능력도 안 되는 놈이라서.
뭔가 복수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보복을 할 껀덕지도 안 나왔다.
“지 복을 지가 걷어찬 거지.”
그동안의 노력을 높이 사서 다음 작품쯤에는 진짜 공동집필로 올려줄 생각까지 했었는데.
지금 자신은 최고의 폼으로 물이 올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청률 고공행진을 그리며 자타공인 탑티어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과 척을 질 이유가 없을 테니.
그놈이 이 바닥에 고개를 내미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똑, 똑─
“작가님.”
그때, 한 보조 작가가 노크를 하며 이민주 작가를 불렀다.
“들어와.”
끼이이익─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보조 작가 오현식.
김진우에 이어서 최근 가장 믿고 맡기는 친구였다.
“퍼플걸스 측에 연락했습니다. 재은 님이 카메오 출연하시겠다고….”
“그래?”
퍼플걸스의 재은 같은 경우에는 이미 이민주 작가와 작품을 같이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서브 주연으로 출연해 연기돌로 재평가받았으니.
아마 이민주 작가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현식은 아부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 오버하면서 물었다.
“차라리 퍼플걸스 멤버 전원 출연을 부탁드려보는 게 어떨까요? 작가님께 은혜 갚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호호. 그래. 그럼 한번 말이나 해봐.”
“넵! 바로 다시 전화해 보겠습니다.”
현식은 돌아서려다가, 순간 멈칫하며 말을 이었다.
“저기, 얼마 전 김진우 작가 건은…. 제가 죄송합니다.”
“네가 왜 죄송해?”
“이번 작품에서 제가 진우 이름 빼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으니까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그 친구가 그렇게….”
“아니, 덕분에 그놈 본성도 알고 잘됐지. 소름 끼치게 그런 놈이랑 계속 일할 뻔했지, 뭐야?”
“아, 음. 넵. 그럼….”
끼이이익─
돌아서는 현식의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김진우가 빠진 자리에, 작업실의 실세로 떠오른 오현식.
그는 방금 작가에게 할당받은 일을 다른 작가에게 떠넘겼다.
“막내야, 이거 퍼플걸스 전원 카메오 출연 가능한지 물어봐.”
“아, 네. 알겠습니다.”
“그거 못 따내면 너랑 나랑 같이 한강물 마시러 가는 거야. 알겠냐?”
“네. 넵!”
“농담이지. 새끼야. 키킥.”
김진우가 있을 때와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분위기.
다른 보조 작가들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 * *
【제한 시간 : 5시간 12분 22초】
대충 두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5시간.
“나라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즉당히 하고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제발.
어쩌다 보니, 스토커처럼 한 여성을 지켜봤는데.
그녀는 정말 1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업무에만 집중했다.
없는 형편에 5만 원쯤 주고 자리를 살 용의도 있었지만.
벤츠 차키에 입구컷 당하고 빨대만 잘근잘근 씹어대었다.
“그나저나…. 예쁘긴 엄청 예쁘네.”
웬만한 인지도의 연예인 이름은 다 꿰고 있는데 저런 사람은 진심 처음 본다.
수트 복장에 어울리는 단정한 갈색 머리칼.
전문가에게 꾸준히 관리를 받은 듯이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자기주장 확실한 눈코입의 조화에서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확실히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방송국 근처니까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근데 연예인치고는….”
저렇게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마침, 기지개를 켜며 몸을 푸는 그녀.
괜히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황급히 시선을 돌렸는데.
이내, 조금 민망한 마음에 슬쩍 일어나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그녀를 다시 바라보니 이미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후우….”
그때, 가게 한쪽에 걸려있는 사인 액자 모음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는 깔끔함으로 승부하는 커피숍인데.
아무래도 방송국 근처라 차별화를 둔 것 같다.
그중에서는,
[커피 맛있게 먹고 갑니다. 번창하세요! -퍼플걸스 세미-]
세미를 포함한 퍼플걸스의 멤버들 사인도 걸려있었다.
“어쩌면 장소 선택이 완전히 랜덤은 아닐지도….”
저번 장소랑 이번 장소가 가깝긴 하지만 완전히 다르니까.
예상을 해보면, 특정 배우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작중 내용이나 스토리와 연관이 깊을 수도 있다.
오늘처럼 세미가 들렀던 장소일 수도 있고, 어쩌면.
“…. 드라마 초반에 제주도에서 펼쳐지잖아. 설마 제주도에 가라고 하진 않겠지?”
막말로, 재벌물이라고 재벌집 회장님 서재에서 글을 쓰라고 하면 나가리다.
아니면, 재벌집에서 키우는 개집에서….
“에이 씨, 그럴 거면 그냥 내가 쓰고 말지.”
나는 슬쩍 뒤를 돌아서 빛이 나는 ‘그’ 자리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녀는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짐을 그대로 두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음, 일단 가보자.”
혹시 빛을 흡수하기 시작하면, 자리를 벗어나도 빛이 따라올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상대는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이런 건 당당해야 한다.
어물쩍거리는 아마추어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지.
털썩─
마치 원래부터 내 자리에 앉은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주변에 남성들의 탄식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내, 여인의 앞자리에 앉자마자 새하얀 빛이 머릿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제처럼 영사기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서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젠장.’
이미 흡수된 빛은 다시 머리를 뚫고 빠져나와 해당 자리에 머물렀다.
【제한 시간 : 4시간 47분 13초】
시간은 흘러 5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실장 정새롬]
널브러진 파일 중 일부에는 그녀에 대한 정보가 쓰여있었다.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수많은 아티스트를 탄생시킨 대기업.
주로 가수보다는 배우를 관리하는 회사였는데.
얼마 전에는 드라마 제작사로 사업을 확장했다고 들었다.
‘에이 씨, 모르겠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그냥 노트북을 꺼내었다.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번 영상이 콕 박혀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타다닥, 타다다닥─
원래 내 자리에 앉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영상을 10초 전으로 돌려본다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제한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해당 영상에 대한 기억은 절대 삭제되지 않았으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잠시동안 잔류하는 하얀색 빛.
아마, 내가 흡수하는 빛이 필름 같은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어제처럼 영상을 보는 동시에 타이핑을 쳐도 전혀 전개 속도가 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의 여인.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타다다닥─
나는 손으로 타이핑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새롬 실장님.”
“…. 네? 저를 아세요?”
“그럼요. 그러니까 여기에 앉아있죠.”
머릿속에서 ‘기억’나는 드라마는 여전히 재밌었는데.
입으로 말하는 대화 내용과 혼동되면서 집필 난이도는 극한으로 치솟았다.
“누구신지….”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전략기획실. 아닙니까?”
슬쩍 서류 파일에 써진 이름을 가리는 그녀를 보며 도박수를 던졌다.
이미 쓰여있는 내용만 말해서는 속이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았기에.
속으로 제발제발을 외치며 정답이기를 바랐는데.
“아, 네. 맞아요. 맞긴 한데….”
‘맞다고?!’
이제 뭐라고 말해야 하나 타이핑마저 멈추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알아서 대응하며 내 고민을 덜어주었다.
“혹시 JTBS 방송국에서 나오신….”
“아, 네! 뭐, 거의 비슷하다고 봐야죠.”
“음, 비슷…. 근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5시간이나 일찍 오셨는지 모르겠네요.”
5시간이 지나면 제한 시간이 끝나버릴 텐데, 심지어 그때 약속까지 있었다니.
그녀의 말을 듣고, 오히려 막무가내로 자리에 앉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 얘기 하시죠.”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사기꾼은 긴장한 티를 내는 순간 삼류로 전락한다.
타다다닥─
손으로는 쉬지 않고 타이핑을 치면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능력 덕분인지, 시스템 덕분인지, 글은 꼬이지 않고 잘 써졌다.
거의 손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안드로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대체 노트북으로는 뭘 자꾸….”
그녀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노트북을 보려고 하였다.
가까워지는 미모의 여성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스으윽─
“정말 죄송한데. 대외비라서 보여드릴 수는…. 죄송합니다.”
“아, 네.”
여자는 삐친 사람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을 이었다.
냉철한 커리어우먼의 외모에 대비되는 귀여운 모습.
예쁜 사람은 토라져도 예쁘다는 게 이런 걸 의미했다.
‘와…. 이 사람은 왜 본인이 배우 안 하고 직원으로 일하지?’
나름 이 바닥에서 예쁜 여자에 면역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다채로운 표정에 잠시 넋을 잃고 멍하게 쳐다보았다.
“뭐, 그럼 대본부터 보여주시죠.”
“대, 대본이요?”
“…. 정말 JTBS 방송국에서 나오신 거 맞아요?”
“그럼요. 잠시만….”
나는 미친척하고 내 작품의 1부를 내놓았다.
‘종이로도 읽어보려고 가방에 넣은 게 이렇게 쓰이네.’
다행스럽게도, 어제 희정이가 프린터로 뽑아놓은 대본 덕분에 겨우 살았다.
일평생 쓸모없던 여동생이 24년 살면서 처음으로 본인의 가치를 증명했다.
“와, 이거 뭐 순백이네요. 대본 맨 앞에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 건 처음 봐요. 작가님이 누구시죠?”
“있어요. 그런 사람.”
“…. 아는 사람도 없게 생겼는데.”
“네?”
“아, 아니에요.”
타다닥, 타다닥─
나는 여전히 노트북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상대는 내가 건넨 대본을 챙기며 차키를 집어 들었다.
“저희 측에서 준비하기로 한 대본은 직원이 가져오기로 해서요.”
“아, 그럼….”
“시간도 남았는데 제가 천천히 가져오죠. 그동안 자리 좀 맡아주시겠어요?”
“…. 정말 감사합니다.”
“???”
정새롬 실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상대가 돌아오기 전에 마무리해야만 하는 히든 미션.
나는 오타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글을 휘갈겼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을 토대로 대본이 작성되었다.
타다다닥, 타닥─
대놓고 20대, 30대 여자 시청자층을 겨냥하는 전형적인 로맨스 재벌물.
사실상 투톱 남주가 한 명의 여주를 두고 경쟁하는 드라마였는데.
지금 쓰고 있는 2부에서는 특히나 서브 남주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러면 서브 남자 캐스팅도 신경 쓰긴 해야 할 텐데.’
영사기 속에서 등장하는 서브 남주의 외모는 평범했다.
아니, 사실 남주와 여주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특색 없이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캐릭터의 매력을 외모가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
분명히 잘생기긴 했는데, 시술을 받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의도적으로 평범하게 생긴 남자와 여자들을 가져다 놓은 듯한 캐스팅이었으니.
이런 초월적인 시스템에 그런 오점이 있다고 하면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고.
‘아무나 데려다 놓아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타다닥, 탁─!
마침내, 대본 집필을 마치고 2부를 마무리 지었다.
혹시라도 자리 주인이 돌아올까, 급히 노트북을 챙겼다.
“사기 쳐서 미안해요. 정새롬 씨.”
그냥 일어서기는 조금 미안해서 메모라도 한 줄 남겨놓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
그리고 가방 한쪽에서 포스트잇과 연필을 슬쩍 꺼내어 슥슥 끄적였다.
[잘 앉았다 갑니다. 복 받으세요!]
나는 메모를 남기고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자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