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31)
송권수는 진우의 작품을 읽는 내내 감탄을 거듭했다.
‘이런 게 진짜 천재구나.’
문장에서 영상을 읽는 즐거움.
휘몰아치는 몰입감을 통한 상상력.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세한 영상미.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어.’
대본에서 이미 영상을 전부 구현하는 경지의 작가가 이런 걸까.
적어도 실력으로 남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심지어, 같은 감독이 아니라 작가에게서 이런 재능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SBC를 나오고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런 멋진 작품을 연출할 자격조차 박탈되었으니까.
“그, 회귀하는 장면에서 연출적인 요소를 엄청나게 집어넣으셨네요. 마치 영화처럼.”
“아, 그래요?”
“응? 의도하신 게 아닙니까!?”
“네. 뭐 어쩌다가 써진 거라서….”
의도하지 않아도 영상을 그리는 재능이라.
그야말로 미친 재능이 이런 게 아닐까.
“음…. CG를 염두에 두신 것 같긴 한데….”
“….?”
“딱 헬리캠 한 대랑 드론 세 대면 충분하겠어요.”
“아…. 그래요?”
“네. 작가님, 혹시 연출 공부하신 적 있어요?”
“아, 아뇨. 없습니다.”
“재능이 상당하시네.”
“감사합니다. 하하.”
머릿속에서 장면 장면들이 그려졌다.
아니, 그려졌다는 표현은 틀렸다. 그냥 드라마가 온전하게 펼쳐졌으니까.
“이 장면…. 찍을 수 있겠어요?”
“네?”
“웬만한 감독의 실력으로는 쉽지는 않겠네요. 잘 뽑으셔야 할 겁니다.”
송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고 싶다는 말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저기, 사실은 내일 당장 이 작품으로 감독 미팅이 있긴 해요.”
“아, 그러십니까?”
피식─
이미 임자가 있는 작품이었구나.
뭐, 될 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마 SBC의 차 감독님일 겁니다.”
“누, 누구요?”
“차충헌 감독님.”
“아….”
퇴사하기 직전까지도 지독하게 괴롭히던 거지 같은 기수.
사내 왕따를 주도하는 더럽고 치사한 인간들이었다.
그중에서 차 감독은 주동자는 아니지만 최소 방관자-, 어쩌면 그 이상의 악질이었다.
“예. 작품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드르륵─
송 감독은 벌떡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 * *
‘음…. 역시 천재의 눈에는 많이 부족한가.’
시스템도 만능은 아니었구나.
연신 작품의 부족한 점을 꼬집더니 냉큼 사라져 버리는 송 감독님.
그래도 전화번호 정도는 물어볼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희도 그만 일어날까요?”
옆에서 구경하던 미령이 슬쩍 말했다.
“저기, 송 감독님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아까 못 여쭤봐서.”
“아, 네. 그럼요.”
“…. 주시는 김에 미령 씨 번호도 알려주실래요?”
“네?”
번호도 1+1으로 달라는 건 오바였나.
“제 번호는 왜….”
옆에 있던 매니저도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번호를 따는데, 작가라서 막을 수도 없고.
“제 드라마 출연하시잖아요. 순정마초에 단역으로.”
“아! 그쵸. 드려야죠.”
나는 번호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이거 제 번호니까 저장….”
-여보세요.
“….”
뚝.
어떤 아저씨가 전화를 받아서 급한 마음에 끊어버렸다.
“아, 시, 실수! 진짜 실수!”
“네.”
세미는 엄청 똑 부러지고 완벽한 리더라고 하던데.
당황한 모습을 보니까 진짜 실수가 맞는 거 같잖아.
옆에서 쓴웃음을 짓는 매니저의 표정을 보니까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싶다.
‘은근히 덜렁대는 스타일인가.’
이내, 미령은 민망한지 말을 돌렸다.
“저기, 작가님. 요즘 세미가 가끔 작가님을 찾아요.”
“네?”
“한 번쯤 촬영장에 나타나실 줄 알았나 봐요.”
“아….”
사실 그동안 너무 무심하긴 했다.
작가가 되어 촬영장에 거의 얼굴도 안 비췄으니.
“한번 꼭 들를게요.”
“넵. 감사합니다.”
미령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고맙죠. 좋은 배우가 많네요. 레인보우 엔터에는.”
아이돌을 키우는 회사에 좋은 배우가 많다.
특히 퍼플걸스 내에서 인재가 많은 거지만.
곧이어,
그들이 사라지고나서 다시 한번 내가 앉았던 자리에 돌아갔다.
그대로 빛무리가 머릿속으로 들어와서 확인해 봤는데.
“미령 씨, 연기 잘하네.”
미령은 유능한 자산관리사의 역할과 찰떡궁합이었다.
낮은 일치율을 뒤집을 만큼 대폭 바뀌어버린 대사와 행동들.
“…. 다시 써야겠어.”
역시, 시스템이 배신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음날, 오전.
아침부터 인터넷에서는 어떤 주제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MBS ‘태양을 쏘다’와 자웅을 겨루는 당일.
《언더독의 반란? 과연 순정마초는 태양을 꺾을 수 있을 것인가!》
기자들은 최대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뽑으려고 서로 경쟁하기 바빴다.
시청자 반응은 안 봐도 어떨지 뻔히 그려졌다.
대충 팬들끼리 갈라치기 해서 엄청 싸우겠지.
“일단 나가자.”
차 감독과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어제 만났던 송 감독님이 아른거렸다.
차 감독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기분이 꿀꿀했으니.
* * *
SBC 드라마제작국.
국장과 차충헌 감독은 템페스트와의 미팅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감독, 김진우 작가는 언제쯤 오나?”
“지금 약속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았네요. 라때는 1시간씩 일찍 왔는데. 작가 마인드는 다른가 봅니다.”
“아하하. 차 감독도 꼰대 다 됐네. 대본은 읽어봤지?”
“그래봤자 1부짜리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음, 그런가….?”
차충헌 감독은 작품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꼬집었다.
“솔직히 작가님이 연출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그래?”
“회귀하는 장면을 타이트하게 묘사해 놓은 건 좋은데. 무슨 여기가 할리우드예요? CG 범벅이라도 하려는 건지.”
“아…. 지금 보니까 조금 그러네.”
“네. 제작비로 회당 2억쯤 쓰실 건 아니죠?”
“크흠, 그건 말도 안 되지.”
그의 말대로, 신인작가에게 큰 투자를 하기엔 아직 무리가 있었다.
지금 순정마초가 순항 중이라고는 하지만, 딱 그 정도가 한계다.
사실상, 공중파 방송국에서 시청률 5%로 출발한 드라마는 매년 쏟아지는 수준이니까.
막말로 당장 오늘 MBS와 정면으로 붙어서 처참하게 무너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흠….”
국장은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차 감독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제가 이상한 버릇 다 고쳐줄 겁니다. 고작 신인작가 아닙니까?”
“차 감독, 그래도 순정마초 요즘 핫하잖아. 살살해.”
“에휴, 국장님. 신인작가 다루는 건 제가 전문입니다. 맡겨만 주세요”
“흐음….”
곧이어, 약속 시간에 맞춰 정새롬 실장과 김진우 작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 부분은 수정하셔야겠습니다.”
와, 이분은 앉자마자 고치라는 말로 시작하네.
“그리고 이 부분은 주인공이 너무 멍청했어요.”
“예?”
“여주인공 뺑소니 당하고 제멋대로 회귀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가족들이 기억을 잃게 되죠.”
“…. 그래서요?”
“1부 마지막 부분 수정하시죠.”
“….”
아예 주인공을 바꾸라고 하지 그래?
“그냥 자산관리사. 차라리 이 캐릭터를 메인 여주로 잡으면 훨씬 재밌게 영상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실화냐.
“말씀이 없으시네. 과묵한 편이신가? 허허.”
허허. 이 지랄.
결국, 옆에서 내 표정을 살피던 새롬이 개입했다.
“감독님, 아무리 그래도 2부도 안 보고 여주인공을 바꾸라는 건 성급하세요.”
“하아…. 제작사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네?”
“언제부터 작가랑 감독이 대화하는데 제작사가 끼어들었나?”
“…. 죄송합니다.”
새롬은 사과를 하면서도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내 마음을 확실하게 굳혔다.
“그리고 작가님. 회귀 부분이요.”
“음, 또 있어요?”
“예. 이거 현실적으로 못 찍어요.”
“그럼…. 드론을 쓰면 되지 않을까요? 누구는 그렇다던데.”
“아, 그럼 어찌어찌해볼 수도 있겠네.”
“….”
“근데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대본 한 줄만 수정하면 그만인데.”
자연스럽게 반말하는 거 같은데.
“그쵸. 범죄 스릴러 드라마에서 악역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요.”
“하아…. 작가님, 비꼬지 마시고. 나 이 바닥에서 20년 구른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아! 그리고 순정마초에선 신인배우 엄청 쓰셨잖아요?”
세상에나. 전작까지 건드린다고?
“설마 이 작품에서도 신인 데려다 쓰실 건 아니죠? 그냥 노파심에…. 허허.”
“저기요.”
“….?”
“차 감독님.”
싸늘한 음성을 듣자마자 차 감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국장실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허 참,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차 감독님이야 말로 뭐 하자는 겁니까? 대화를 하러 왔으면 대화를 하셔야죠! 대화를 할 마음이 있기는 하세요!?”
“이런…. 이게 미쳤나. 신인 주제에….!”
결국 속된 말까지 뱉어내는 차충헌 감독.
이 아저씨는 겨우 이 정도에 급발진을 하네.
그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작가의 밑에서 쌍욕 먹어가면서 굴렀던 6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정 실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차 감독이랑 일 못 하겠습니다.”
“네. 그만 일어나시죠.”
드르륵─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차충헌 감독.
사납게 째려보는 드라마국장.
그들을 뒤로한 채 SBC 방송국을 벗어났다.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새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실장님, 화 많이 나셨죠? 죄송합….”
“아니요. 저도 대본 수정은 반대였어요.”
새롬은 길 한복판에 서서 나를 돌아봤다.
“작가님, 고마워요. 나 때문에 화내준 거 맞죠?”
“네? 아….”
“누가 나를 대신해서 싸워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야….”
아닌데. 내 작품 욕해서 싸운 건데.
음, 그냥 그런 걸로 해야겠다.
“거의 그렇다고 봐야죠.”
“좋은 사람 같아요. 진우 씨는.”
작가가 아니라 진우 씨라고 부른 건 처음이다.
조금은 민망한 마음에 급히 말을 돌렸다.
“저기, 그래도 제가 죄송합니다. 상대는 SBC 드라마국인데….”
“에이, 우리 회사 사장님이 누구예요?”
“네? 아….”
천성 그룹 부회장의 친동생.
방송국에서 갑질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벽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그건 대표니까 그렇고…. 정 실장은 사장님한테 엄청 깨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직도 입가에 미소를 띄운 것을 보니 의아했다.
누가 보면 본인이 재벌가 딸래미인 줄 알겠네.
“실장님, 오히려 잘됐는지도 몰라요.”
“네?”
내 말을 듣고 새롬이 되물었다.
“사실, 저 이 작품으로 함께하고 싶은 감독님이 있었거든요.”
“그래요? 누군데요?”
곧이어, 조금 뜸을 들이고서 말을 이었다.
“우리 송 감독님이랑 하시죠. 송권수 감독님.”
“누, 누구요?”
“SBC 뛰쳐나온 그분. 별을 그리다를 연출하신 송권수 감독님.”
“….”
이내, 어제 송권수 감독과 만난 사실을 자세하게 풀어내었다.
“그냥 드라마만 성공시키면 됩니다. 그러면 방송사에서는 서로 모셔가려고 할 거예요. 아시잖아요.”
드라마 대박치면 방송국놈들이 자존심 굽혀야지 어쩔 거야.
지금 퍼플걸스 코인 늦게 탑승한 방송사들 다 후회하고 있다고.
‘내가 저 사람들 무릎 꿇는 거 보기 위해서라도 차기작 성공시킨다.’
송 감독에게 빚을 지워두는 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외주 PD 중에 그런 실력자는 없으니까.
“솔직히…. 이미 SBC랑은 틀어졌으니까.”
“일단 한 번만 만나보시죠. 송권수 감독님.”
“네. 저한테 연락처 주세요. 개런티 협상할 테니까.”
외주 PD는 방송국 PD와 다르게 회당 출연료를 받는다.
스타감독이 프리 선언하면 대부분 몸값이 굉장히 비싸지만.
아마 송 감독은 특수한 케이스라 싼값에 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회당 천만 원대에서 끊을 수 있으려나.’
그의 능력과 커리어에 비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방송국과 척을 졌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빼면, 가성비 끝판왕이다.
“일단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송 감독님.”
“네. 고마워요.”
이내, 새롬은 다시 평소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본인의 차에 타기 직전에, 뒤를 돌아서 나에게 물었다.
“작가님, 오늘 재준이랑 성호랑 같이 드라마 본방으로 볼 건데. 같이 보실래요?”
“아…. 오늘이죠? 3화 방영일.”
“네. MBS와 붙는 날이죠.”
“…. 어디서 본다고요?”
* * *
한편, 세미는 재준에게 전화를 받고 충격에 빠졌다.
“누, 누구랑 본다고?”
-작가님이랑.
세미는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폭발했다.
주연배우 세 명 중에 두 명이 나머지 하나를 왕따시키는 격이다.
그것도 제작사와 작가까지 전부 합심해서!
“왜 나만 빼고!?”
-너 빼고 다 같은 회사잖아. 작가님도 일단 계약하셨고….
“그럼 나도 회사 옮길래.”
-장난이지?
“장난 아닌데?”
운전 중이던 매니저는 진땀을 흘렸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내, 세미는 전화를 끊자마자 매니저에게 말했다.
“오빠, 지금 바로 템페스트로 가자.”
“어차피 지금 가봤자 드라마 거의 끝날 때쯤에나 도착할 텐데?”
“그럼 더 빨리 가야지!”
“으응. 근데 아까 말한 회사를 옮긴다는 건….”
“그건 나중에!”
“아, 알았어.”
MBS와 JTBS의 간판 드라마들이 격돌하기까지 한 시간이 남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