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4)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천성 그룹에서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설립한 탄탄한 배경의 기업.
수년 전에 사업을 크게 확장하여, 제작사를 겸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그중, 주요 엔터 사업과 제작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가 전략기획실이었는데.
정새롬 실장은 삼촌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핵심 인사로 자리 잡는 중이었다.
허나, 종종 대표가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본 직원들은 그녀를 낙하산이라고 수군대기도 하였으니.
미국에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전문가로서 당당하게 입사했건만.
심지어 삼촌에게도 숨겼기에, 면접 때 처음으로 대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욱더 실력으로 증명하고 싶은 바램이 간절했다.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끌리는 거지?”
새롬은 고작 1시간 20분짜리 대본을 다섯 번째 정독하고 있었다.
JTBS 방송국의 드라마국 PD를 기다리는 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분명히 클리셰로 점철된 드라마지만 무언가 달랐다.
작품의 분위기는 서정적이었고, 대사 처리는 일품이었다.
막말로, 당장이라도 PD가 되어 드라마 연출을 맡아보고 싶을 정도.
“대사는 살아있고…. 클리셰를 살짝만 비틀어서 대중성에 맞췄어.”
흔히 연극은 배우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연극보다 영화가, 영화보다 드라마가 더 시나리오의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고작 1화 만에 이런 몰입력이라니….”
흔한 소재를 흔하지 않게 쓰는 법.
말이 쉽지 실제로 보여주는 작가는 많지 않았다.
“서브 남주가 메인급이네.”
남주와 여주의 매력도 돋보이지만, 캐릭터 폭이 너무 좁아서 캐스팅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서부 남주 캐릭터는 정말 누가 캐스팅되어도 단번에 스타가 될 것 같은 자리.
그냥 적당히 잘생긴 남자가 적당한 연기력만 보여줘도 대중의 인기를 사로잡을 것만 같은 배역이다.
잠시 후, 정새롬 실장은 약속 시간에 맞춰 다시 카페를 찾았다.
그런데,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더니 PD는 이미 홀라당 사라져 버렸다.
“음, 화장실 갔나?”
살랑─
이내, 새롬은 테이블에 놓여진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누가 장난처럼 써 놓은 듯한 메모를 보고 바로 꾸겨버렸는데.
그때,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미인이십니다. 하하.”
“누구시죠?”
낯선 남성이 인사를 건네며 천천히 다가왔는데.
그는 자신을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JTBS의 드라마팀 PD라고 소개했다.
“저기, 템페스트 엔터 전략실 정새롬 실장님…. 아니신가요?”
“….”
새롬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확실해요?”
등장한 사내는 계속되는 신분 확인에 사원증까지 보여주며 증명했다.
“그럼 아까 그 남자는 누구죠?”
“네? 누구요?”
“체크 남방에 청바지. 눈이 처지고 머리는 반곱슬을 하신 분.”
“….?”
구체적인 외향 묘사에도 의문을 표하는 상대.
이건 아무리 봐도 이전에 앉아있던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밖에는.
‘아씨, 당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라서 의심할 생각조차도 못 했다.
“미인은 원래 의심이 많은 편이죠. 하하하.”
“비즈니스 하러 와서 자꾸만 외모 언급을 하는 건 불쾌한데요.”
“아, 하하. 그, 그래요?”
새롬은 모르는 사람에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에 이빨을 악물고 말을 이었다.
“대본부터 보여주시죠.”
“아, 아. 네. 이 중에 세 작품은 이번에 JTBS 교육원에서 전문가 과정을 수료한….”
“네. 제가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날이 선 반응을 보였는데.
정확히 30분 만에 여섯 편의 작품을 손에서 놓으며 말했다.
“오늘 작품 중에는 성호가 출연할만한 작품이 없군요.”
“아, 그래요? 정 실장님이 가져온 작품들 다 좋은데요?”
“아니요. 제 눈에는 많이 아쉬워요.”
‘어떤’ 작품을 본 새롬의 눈은 이미 너무 높아져 버렸다.
“다음에 다시 약속을 잡으시죠. 그때까지 개인적으로 작품을 알아보겠습니다.”
“다, 당연히 우리측에서 방송 찍는 건 유효하겠죠?”
“물론이죠. 계약이니까요.”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원래 배우를 미리 정해놓고 작품을 고르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최근 JTBS에 작가 품귀 현상이 발생해서 더더욱 작품 선정 작업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PD는 헛기침을 하면서 사라지고, 곧이어 새롬도 카페를 벗어났다.
“하아, 고작 1부만 보고…. 자존심 상해.”
하다못해 2부까지만 봤어도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 그 작품을 보지 않았다면 그냥 대충 골랐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작품을 본다고 한들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 사람 대체 누구야!”
남자가 남겨놓은 흔적은 포스트잇 하나뿐이었다.
[잘 앉았다 갑니다. 복 받으세요!]
“뭐지? 아무리 봐도 작가 본인은 아닌 거 같은데….”
사칭도 엄연한 범죄다.
근데 그 사람이 사칭을 한 목적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기를 치려고? 근데 왜 말도 없이 떠나는가.
관심을 끌기 위해? 그랬으면 번호라도 물어보던가.
“아오, 잡히기만 해봐라. 아니, 제발 잡혀줘. 그냥 그 대본 쓴 작가가 누군지만 말하면 다 용서해 줄 테니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그 사람이 작가 본인은 아니기를 바랐다.
자신이 그런 이상한 사람의 작품을 보고 1화 만에 꽂혀버리지는 않았기를.
* * *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2부를 수차례 정독했다.
카페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대본을 정확히 점검하지 못했다.
“음, 오타만 빼면 완벽하잖아.”
급하게 휘갈겨 썼기에 당연히 타이핑 실수는 있었지만.
표현적으로 어색한 내용이나 비문 따위는 전혀 없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내 실력이 그 정도는 절대 아니었으니.
“시스템이 혜자네.”
6년 동안 고생한 내 실력으로 쓴 작품과 크게 비교되는 두 편의 대본.
원래 작품들과의 수준 차이가 피부로 느껴지면서 묘한 자괴감이 찾아왔다.
역시 이럴 때는 정신승리가 필요하다.
“운이 좋쿤.”
이제 2부까지는 써놨으니까 중소 공모전에 제출할 정도는 만족했다.
솔직히 당장의 베스트는 방송사와 컨택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맥으로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차라리 당장 내게 필요한 작업부터 시작해보자면.
그 무엇보다도 작품의 핵심은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는지가 아닐까.
“퍼플걸스 세미는…. 섭외는커녕 만나기도 어렵겠지?”
차라리 듣보잡 걸그룹이나 여배우였으면 오히려 편했을 것 같다.
나 같은 무명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그냥 내가 감독에 촬영까지 해서 너튜브에 웹드라마라도 찍어보는 건.
“망하겠지? 요즘 웹드 수준도 장난 아니니까.”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서브 남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솔직히 하꼬 작가가 쓴 작품에 급이 높은 배우를 찾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좋은 감독 만나서 적당히 괜찮은 배우를 꽂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임재준이랬나…. 그 남주부터 살살 꼬드겨볼까.”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의 메인 남자 주인공.
현실적으로 내가 접근해 볼 만한 구석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퍼플걸스 세미가 출연한 웹드라마에서 스토킹하다가 오지게 욕먹은 그 친구.
묘한 경로로 작품을 쓰다 보니까 다른 캐스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마 서브 남주나 조연급도 익숙한 배우라거나 내가 아는 얼굴이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실에 없는 드라마를 영상으로 찍어서 머릿속에 심어주는 초월적인 힘.
시스템이 추천하는 캐스팅 보드는 그대로 채우고 싶은 게 당연했다.
“임재준한테 대본을 보여주면 뭔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잖아.”
하필이면 그 친구랑 세미가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처럼 대본에서 찬란한 빛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데스티니를 느끼고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호형호제를 논하자고 할지도.
곧이어, 임재준을 검색해서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소속사는 없고 데뷔 1년 차 햇병아리에, 소소한 경력만 몇 줄 쓰여있는 이력.
“소속사도 없으면 어떻게 연락하냐.”
순간, 임재준의 프로필에 적혀있는 학위에 눈이 갔다.
동곡 대학교 연극영화과 18학번, 김희정이랑 똑같은 학교 출신.
나는 곧바로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같은 학교 출신이면 건너건너 알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 한 다리만 걸치면 바로임 ㅋㅋㅋㅋ 근데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역시, 가족끼리도 계산이 철저해. 김씨 가문의 후예답다.”
여동생은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단순 번호 제공은 5만 원에, 추천 한마디까지 곁들이면 10만 원.
이런 쌩양아치를 동생이랍시고 24살이 되도록 업어 키운 내 죄가 크다.
[번호만 가시죠 사장님]
고작 연락처 소개비로 5만 원을 요구하는 여동생도 문제지만.
그걸 또 에누리 없이 받아주는 나도 너무 착해서 탈이다.
“어휴, 용돈 준다고 생각해야지.”
피 같은 5만 원을 투자했는데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뚜루루루─
긴장되는 신호음 끝에 한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음. 임재준 씨?”
-네. 그런데요.
“드라마 섭외 차 연락드렸습니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저 연기 접었습니다.
“에이, 무슨 농담을 진담처럼….”
뚝.
“아 쫌. 내꺼 찍고 접으라고!”
지금 내 코가 석 잔데 누가 누구한테 따뜻한 위로를 해주랴.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당장 임재준이라는 배우가 필요했다.
뚜루루루─
거금 5만 원을 이렇게 날릴 수는 없지.
이미 2부 집필할 때 사기 치려고 대본까지 팔아먹은 몸.
이민주 작가 작업실 뛰쳐나오고 나서는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
-네. 여보세요.
“저는 임재준 씨를 꼭 캐스팅해야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처음부터 임재준 씨 주연으로 생각하고 쓰여진 작품이에요.”
-주연…. 이요? 혹시 웹드라마 맞나요?
“아니요. 16부작으로 편성될 예정입니다.”
재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감독님이세요?
“작갑니다.”
-…. 제가 알바중이라, 시간을 많이 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주소 찍어주세요. 만나서 얘기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뚝.
대게 신인들이 그러하듯이 성격은 유한 편이었다.
탑스타 되고 어떻게 변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탑스타 때 어떻든 내 알 바 아니지. 어차피 이번 작품만 같이 하면 그만이니까.”
띠링─
마침 재준이 톡으로 주소를 보내주었다.
“고기집 알바?”
안 그래도 고기 먹고 싶었는데 잘됐네.
통장 잔고는 마르기 시작했지만 먹는데 돈 아끼는 건 아니라고 배웠다.
* * *
“아, 안녕하세요.”
만나기로 약속한 삼겹살 무한리필집 앞.
주소에 적힌 장소에 도착해서 연락을 했더니.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남성이 걸어 나왔다.
‘이 외모에 고기집 알바? 보통은 카페 알바하면 시급 더 쳐줄 텐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임재준이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하시는 가게입니다.”
“아…. 그래요?”
웹드라마에서 봤던 못난 스토커 역할의 임재준.
현실의 생얼이 오히려 훨씬 수수하고 잘생겼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빨리 들어가 봐야 해서….”
“임재준 씨, 배우는 계속 하실 생각이죠?”
“….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현실이 먼저니까요.”
머뭇거리는 텀에서 깊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번 작품까지만 해보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대체 누구신데 저한테 이렇게까지….”
“말했잖아요. 드라마 작가.”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한마디 덧붙였다.
“여주인공은 퍼플걸스 세미….”
움찔─
그녀와 함께 작품을 했던 재준이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 말은 그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 였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어떻게 섭외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 음….”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은, 일단 제가 쓴 2부짜리 대본 한 번만 읽어달라는 거예요.”
나는 가방에서 꺼낸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읽다가 지루하면 덮어도 됩니다. 딱 한 씬만 읽고 재밌으면 다음 장면도 봐주세요.”
스윽─
재준은 손을 들어 내가 건넨 대본을 받았다.
“제가 생각하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재준은 다시 고기 냄새를 풍기는 가게로 들어갔다.
“우리 배우님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으시네.”
그래도 좋은 말로 할 때 받아줘서 참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대본 받아줄 때까지 고기 무한리필시킬 뻔했자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