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47)
MBS 방송국 1층 카페, 홀리스.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기 전에 빠르게 쓰고 나가야겠다.
타닥, 타다닥─
「해외영업 3팀 김나연 1부」
내 귀에 듣기 좋은 타자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대본 집필을 시작했다.
“신입사원 입사 씬.”
대기업 입사 장면인 만큼,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신입사원 입사식 대표, 유설아.
그녀의 입사 선사와 함께, 자연스레 포커싱이 조연들로 이동했다.
-와, 저 사람이야? 필기 만점?
-5개 국어라더라. 이게 한국에서 가능한 스펙이냐?
-연지대 성적 장학생이니까 말 다 했지.
-미친….! 그럼 금융권이나 노리지, 여길 왜 왔대?
-누가 농담 식으로 회장님 딸이라던데.
다음 내용은 신입사원들이 각자 해외영업팀에 배정되는 장면.
그중, 해외영업 3팀에 배정된 김나연에게 시작부터 미션이 주어진다.
-김나연 씨? 빠, 빨리 이거 두바이 쪽에 연락해서 캔슬해!
-네? 아, 네!
-…. 무슨 뜻인 줄 알고 대답한 거야?
-네. 해보겠습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엘리트라지만 출근 첫날부터 능숙할 수는 없는 법인데.
“음, 오피스 먼치킨물이구나.”
주인공에게 주어진 고난은 업무가 아니라 주변 관계에서 생긴다.
첫날부터 상사의 실수를 만회한 신입사원에게 쏟아지는 시기와 질투.
신입사원 동기이자 주연급 조연 3명을 제외하면.
전부 현실적인…. 어쩌면, 이기적인 캐릭터들뿐이니까.
그나마 3팀의 직속 상사들은 입체적인 캐릭터라 중립을 지키지만, 타 부서 상사들은 얄짤없다.
“어휴, 어지럽네.”
시작부터 고구마라고 욕 많이 먹을지도.
1부는 전체적으로 주연 캐릭터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는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유설아는 힘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산처럼 높은 고지대 달동네를 걷다가 굽이 나가버려서 맨발로 이동한다.
“뭔가 현실적이면서도….”
잔잔한 음악이 깔리면 깊은 여운이 남을 것 같은 결말.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밌긴 하네.”
아마 무명작가였다면 이 작품으로 드라마를 찍기 어려웠을 것 같다.
자극적인 장면이나 막장 요소가 거의 없었으니까.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고구마를 먹였기에.
“일단은…. 이번 화만 마무리하고.”
유설아 배우님과 미팅 전까지 편집 마무리해야지.
타닥, 타다닥─
세밀한 감정묘사가 중요한 작품인지라, 대본에 따로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많네.
이번 작품은 한 편마다 최소 5시간씩은 잡고 써야겠어.
* * *
한편, 같은 시각.
MBS 방송국 1층 카페에는 방송국 직원 두 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중, 김진우 작가와 묘한 인연의 인물도 있었으니.
“감독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 말이 제일 아픈데?”
“솔직히 순정마초가 좀 재밌긴 했죠.”
“인정.”
「태양을 쏘다」의 주역, 고현래 감독은 조연출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전, 순정마초 막방 이후에 그다음 주 방송.
태양을 쏘다는 13% 대의 시청률을 사수하며 종영했다.
“근데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아니에요.”
“그렇게 좋은 성적도 아니지.”
“음….”
블록버스터에 탑스타로 판 깔아놓은 것 치고는 아쉬운 시청률.
“저, 저기 감독님.”
“왜.”
조연출은 갑자기 표정을 대변하고 한 쪽방향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순정마초 김진우 작가님….!”
“나도 알아. 그거 재밌었다니까.”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왜? 그 작가 차기작 들어간 거? 그것도 알아. 임마. 그만 말해.”
“아니요. 감독님, 저기….”
조연출은 손을 뻗고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고현래 감독은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천천히 돌렸는데.
한 남성이 노트북을 두드리며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뭐가? 저 사람이 누군데?”
“제, 제가 얼마 전에 KBC 들렀을 때 얼굴 뵈었거든요.”
“응?”
“저분이 순정마초의 김진우 작가님이에요!”
“…. 근데 왜 여기 있지?”
수많은 카페를 두고 하필이면 MBS를 방문하다니.
이 정도면 멕이려는 거 아닌가.
“일부러 여기 온 이유가 있을까?”
“글쎄요.”
이걸 아는 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할지.
“인사는 해야겠지?”
“일단 같은 업계 사람이니까요.”
“뭐, 이제 경쟁자도 아니고…. 드라마도 다 끝났는데.”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고 감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세상에서 가장 민망한 관계가 아닐까.
서로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지만, 한때는 경쟁자였던 그런 사이.
“고현래 감독님?”
“예. 반가워요. 김진우 작가님.”
태양을 쏘다의 책임 프로듀서.
이분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차기작 촬영 들어갔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어요.”
“아…. 네.”
“송권수 감독님이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탄생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문으로는 쿨하고 유쾌한 성격으로 알고 있었는데.
현실에서 만나보니까 확실히 좋은 사람인 것 같네.
“혹시 여기서 대본 집필을 하고 계시는….?”
“….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요.”
“흠, 제가 감히 작은 조언을 드리자면….”
“네?”
“대본을 빨리 쓰시면 빨리 쓸수록 퀄리티가 좋아질 겁니다. 송 감독님의 성향이 워낙 완벽주의에 가까워서.”
“아, 음, 저기, 그게….”
“???”
“벌써 완결까지 다 썼습니다.”
“….?”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했지만, 말을 꺼내는 게 맞지 싶었다.
“…. 벌써 다 쓰셨다고요?”
“네.”
“그럼 지금 쓰고 계신 건….”
“그다음 차기작입니다.”
“와하하. 농담은 아니시고?”
“네. 그럼요.”
“아아, 죄송해요. 너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집필 속도가 정말 상식을 벗어나시네요.”
“….”
고현래 감독은 순수하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작품성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감사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같은 업계 사람끼리 나중에 소주 한잔하시죠.”
“네. 감독님,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멀어지는 고현래 감독.
“이거 어쩌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꽤 좋은 인맥을 잡은 것 같아.
자극적이지 않은 감성 오피스물.
장르 특성상, 디지니 플레이에 독점을 걸기에는 조금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다음 작품도 공중파각!?”
데뷔하고, 세 작품 중에 두 작품이나 공중파에 내걸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에, 전부 히트쳐서 내 이름값을 드높일 수만 있다면.
“이거 이러다가 정말….”
고작 1년 만에 스타작가 타이틀을 달아버리는 거 아냐?
* * *
이튿날, 템페스트 엔터 내 작업실.
“오빠, 주말에 절대 지각하면 안 돼요.”
“뭐가.”
“그날 제작발표회잖아요. 혹시 모르시는 건….”
“너는 내가 바본 줄 아니?”
“아하.”
“….”
까먹고 안 갈 뻔했다.
보조 작가 잘 뒀네.
그런데, 효주는 쓸데없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변 팀장님이 절대 지각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셔서요. 헤햇.”
이거 스파이 아냐?
“…. 너 누구 편이야.”
“변 팀장님 편.”
“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라 하나도 안 아프다.
‘아니지, 생각해보니까….’
내 보조 작가이기 이전에 템페스트 직원이잖아!?
타닥, 타다닥─
나는 효주와 대화하는 중에도, 대본 수정 작업에 몰두했다.
‘이제 거의 완성.’
모든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회차가 있다면 1부가 아니겠는가.
어제부터 MBS에 종종 들러서 수차례 검수하고 수정했다.
“오빠, 요즘에 뭘 그렇게 열심히 쓰세요?”
“새 작품.”
“….?”
“오피스물 장르야.”
“네에? 벌써 신작이요? 근데 왜 저한테 말씀을 안 하시고….”
“지금 막 보내려고 했어.”
타다닥, 탁─
나는 대본 수정을 마치자마자 효주에게 1부 대본을 전송했다.
“읽어보고 수정할 거 있으면 보고해.”
“넵.”
대본은 고치면 고칠수록 퀄리티가 좋아지니까.
띠링─
그때, 정 실장에게서 톡이 왔다.
[유설아 배우님,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예정된 내용일 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미 배우 변경권을 써 버려서 괜히 더 긴장된다.
베네핏 포인트를 쓰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딱히 변하는 건 없을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유설아 배우님이 빠지면 대체자를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
“효주야, 일단 대본 한 부 뽑아봐.”
“네? 아, 네!”
“리본도 달아.”
“네?”
“대본 끝에다. 빨간색으로.”
“???”
* * *
템페스트 엔터와 로템 엔터의 중간 어디쯤.
비밀 유지 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지는 레스토랑.
방송 관계자들이 자주 찾는 이곳에 검정색 밴 한 대가 나타났다.
드르르륵─
밴의 자동문이 천천히 열리며, 한 여인이 차에서 살포시 내렸다.
“여기구나?”
“설아야, 같이 가.”
“왜?”
“…. 그쪽 아니고 반대쪽.”
“아하!”
유설아는 매니저의 뒤를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내가 말했나?”
“뭐를?”
“이제 슬슬 드라마 하고 싶다고.”
“그런 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냥 그렇다고.”
두 남녀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예약된 장소의 앞에 섰다.
식당 직원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는데.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템페스트 측에서 나온 정장 차림의 아름다운 여성.
그 반대편에 앉아있는, 로템 엔터테인먼트의 실무 담당자.
마지막으로, 또 한 사람.
“어? 그때 뵈었던….”
KBC 음악방송 작가가 있을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3초 정도 뇌정지가 찾아오며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스윽─
이내, 김진우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만남은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만남에서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진우 작갑니다. 유설아 배우님.”
“아….”
그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김진우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하, 하긴, 저분이 직접 음방 작가라고 하진 않았지….’
유설아는 이마를 콩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동안, 양 측 사이에서 진중한 토론이 이어졌다.
로템 측과 템페스트 측 담당자, 각각 한 명씩.
대화는 주로 두 명이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정새롬 실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여인.
그녀는 함께 드라마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대화 중간에, 유설아는 슬쩍 입을 열었다.
“오피스 드라마, 저는 좋은데요?”
“유, 유설아 님….”
로템 측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말렸지만.
유설아는 내친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저는 처음부터 작품만 좋으면 할 생각도 있었어요.”
“그게…. 저희 대표님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작품이 좋아야만 할 거니까.”
“아, 네!”
설아는 새롬의 얼굴을 바라보고 물었다.
“오피스 드라마에, 여자주인공 원탑이라고 하셨죠?”
“네. 잠시만요.”
정 실장의 눈빛을 받은 김진우는 가방에서 대본을 꺼냈다.
“크으, 이게 말이죠. 얼마 전에 쓴 친구라 팔딱팔딱 뛰거든요. 하핫.”
찌릿─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떨이처분 하듯이 말하는 진우.
이에, 정새롬은 살기를 담은 채 그를 째려보며 복화술로 말했다.
‘제발 닥쳐.’
진우가 꺼낸 대본의 전면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유설아 님 ㅎ」
“아, 이건 이따 사인받으려고 가져온 거고, 다시….”
“….”
곧이어, 진우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다시 무언가를 꺼냈으니.
빨간색 리본을 예쁘게 달아놓은 한 부의 대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외영업 3팀 김나연 1부」
“유설아 배우님.”
“네?”
“이번 작품, 뼈를 갈아서 쓸게요.”
4시간 쓸 거, 5시간 쓸게요.
“한 번만 읽어주시고, 다시 미팅 잡아도 좋습니다.”
“으음….”
“저, 저기…. 작가님, 이런 식으로 급하게 진행하시면….”
너무 직접적인 구애에, 로템의 담당자가 난색을 보이며 제지하려고 했으나.
“좋아요. 작가님.”
유설아는 오히려 방긋 웃으면서 진우를 응시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의 천사가 지상에 강림한 듯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