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5)
임재준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심지어, 16부작의 주인공으로 생각해주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도 고마웠다.
물론, 해당 작가도 자신 만큼이나 대책 없는 상황처럼 보였지만.
“음, 작가라기보단…. 그냥 지망생.”
피시방이나 집에서 프린트한 것 같은 A4 용지 한 뭉치.
웹드라마 단역으로 섭외될 때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잠깐 설렜던 감정이 민망할 지경이다.
“재준아, 5번 테이블 결제 좀.”
“아. 네. 아버지.”
고깃집 사장 아들도 나름 먹고살 만한 구석이 있는 자리였다.
가끔은 이렇게 잘생겼다고 팁을 챙겨주는 손님들도 있었으니까.
“넣어둬. 학생.”
“정말 이러실 필요 없는데….”
“아들 같아서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꾸벅─
재준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음료수를 가져왔다.
“서비스입니다.”
“경우가 있는 학생이네.”
여성 손님이 끈적한 눈빛을 보냈지만, 애써 무시했다.
사실, 이 정도면 흔히 있는 일이라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잠시 후,
재준은 하루 일과를 마치며 가게를 정리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마무리할게요.”
“그래. 수고 좀 해줘.”
“네. 아버지.”
조금은 굽은 듯한 아버지의 허리를 보며 뭉클한 감정이 올라왔다.
“연기는 무슨 연기냐. 나 없으면 가게도 문 닫게 생겼는데.”
문득, 오늘 받은 대본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가게 한쪽 구석에 치워놓은 2부짜리 극본.
“만약에 한다고 하면…. 첫 주연작인가.”
솔직히 제작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열정은 보통을 넘어섰다.
단역을 전전하는 배우를 찾아와서 거듭 설득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니까.
“읽어보지도 않는 건 양심에 찔리네.”
촤라락─
사실, 처음에는 그저 몇몇 장면만 대충 훑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본의 첫 장면을 읽는 순간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저 활자를 읽는 것 뿐인데, 제주도 배경이 펼쳐지며 스포츠카를 모는 모습이 떠올랐으니까.
그냥 생각 없이 읽어도 술술 넘어가는 대본.
여주와 처음 만나는 사건에 이어, 우연히 마주치는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그려졌다.
“딱 필요한 단어만 썼구나.”
절묘하게 적절한 단어를 써서 그런지.
그리 세밀한 묘사를 하지 않아도 쉽게 받아들여졌다.
“재밌네….”
재준의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열망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가 주연 자리를 준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을 텐데.
“나를 생각하고 썼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수없이 연습하고 꿈꿔왔던 「런던의 연인」 재벌 역할.
어떤 작품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어떻게 알아보신 걸까.
순식간에 읽어버린 두 편의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처음 떠오른 인물은 세미였다.
자신이 상상하는 세미 그 자체의 모습.
작가님이 그녀를 굳이 언급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대본 앞에 쓰여진 작가의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
재준은 스마트폰을 들어서 저장된 연락처를 검색했다.
이어서, 망설이지 않고 과거에 같이 작품을 함께한 인물에게 연락했다.
뚜르르르─
퍼플걸스 세미가 주연으로 출연한 웹드라마의 편집자.
당시 자신이 단역이었음에도, 세심하게 챙겨주며 번호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여보세요.
“동철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어, 니는 잘 지냈냐? 어쩐 일이야.
“다름이 아니고….”
67만 너튜버이자 웹드라마 편집자인 박동철.
세미를 캐스팅한 놀라운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도 퍼플걸스는 명실상부한 스타급 걸그룹이었음에도.
* * *
나는 밤을 새워가면서 공모전과 제작사를 찾아보았다.
매년 수백 편의 작품이 쏟아지는 메이저 방송국 공모전.
그리고, 시놉시스를 투고할 만한 유명 드라마 제작사들.
“아니, 여기도 4부씩이나 필요하네.”
메이저 방송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2부 정도만 써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중소규모라서 관심이 안 가는 공모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4부를 요구했다.
“이거 드라마 제작사에 그냥 던져도 되나 모르겠네.”
투고라는 방법도 널리 쓰이는 작가 데뷔 루트 중 하나였지만.
작가 커뮤니티에 작품 도난당한 것 같다고 제작사를 욕하는 글들을 보면 조금 두려웠다.
그렇다고 공모전은 무조건 안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니까.”
심사관의 취향이 상극이라면 완성도와 무관하게 광탈할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리 재밌는 글도 누군가에게는 쓰레기만도 못한 글일 수도 있으니.
“아니면, 6년 경력도 있겠다. 다른 대형 작가 보조 작가로 들어가는 방법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그 방법을 보류했다.
일단, 이민주 작가한테 쌍욕하고 나왔으니 소문이 퍼졌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이번 작품을 어떻게든 제작하고 싶은 욕망이 뇌를 지배했다.
내게 주어진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딸깍, 딸깍─
이미 수십번 들여다본 중소규모 공모전 목록.
그중에 내가 놓친 게 있을까 다시 한번 확인했다.
특히, 2화로 쓸 수 있는 공모전은 전부 알아봤는데.
역시 마음에 드는 수준의 공모전이 갑자기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능력이 언제 발동할지도 모르니까 3부, 4부는 내 힘으로 한 번…..”
그때였다.
띵동─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알림음.
입가의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내용 :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3부】
【장르 : 로맨스, 재벌】
【장소 :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1층 카페】
【제한 시간 : 18시간】
【※ 브론즈 승급 : 110-110101-1011(가상 계좌, W Bank)】
【※ 입금 금액 : 0원 / 1,000만 원】
“템페스트 엔터….?”
얼마 전에 카페에서 마주친 여자가 다니는 회사.
그런데 정작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니, 거기 직원만 출입할 수 있잖아. 시스템 일 한번 개같이 하네. 진짜.”
* * *
다음 날 아침.
[작가님. 임재준입니다. 저 이 작품 꼭 하고 싶어요.]
배우님의 문자를 보고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풀어졌다.
대충 10시는 넘었으니 깨어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연락을 걸었다.
“재준 씨, 잘 생각했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범생 스타일이라 속 썩일 일은 없을 것 같다.
-아 저기. 작가님.
“네. 재준 씨.”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아…. 음, 그래도 되나.
-네. 훨씬 형님이신데요.
“그럼. 그를까?”
깍듯한 성격에 모난 데도 없으니 나중에 학폭 같은 건 안 터질 것 같다.
이내, 임재준의 이어지는 말은 나에게 소중한 선물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퍼플걸스 세미는 제가 연락이라도 해보려고 수소문하고 있어요.
“정말로!?”
-네. 웹드라마 찍을 때 인사 정도만 주고받은 사이긴 한데.
“번호가 있어?”
-아뇨. 한 다리 건너면 연락은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면 너무 많이 무리하진 말고.”
존나 무리해줘. 제발.
-네. 작가님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다리는 다쳐도 입은 다치면 안 돼.”
-네?
“대사치는 건 대역을 못 쓰잖아. 입은 배우의 생명이야.”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뚝.
“주둥이는 살아있어야 세미를 설득할 거 아냐.”
임재준을 가장 먼저 찾아간 건 신의 한 수였다.
웹드라마를 같이 찍기는 했지만 단역이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라 연이 남아있던 것 같다.
우리 배우님도 내 작품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시는데.
“작가는 글을 써야 작가지.”
나는 작품을 떠올리며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는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도 조금은 익숙하다.
“10시간쯤 남았으니까 시간은 충분하네.”
일단 템페스트 엔터테인먼트 사옥 근처에 가봐야 무슨 수가 나올 것 같다.
* * *
고대시대의 성인, 피타고라스가 이런 말을 했었지.
“답이 없다.”
사옥 출입구를 지키는 떡대 형님의 살벌한 눈빛은 자체 바리케이드가 되었다.
거짓말 안 하고 나보다 덩치가 3배는 큰 사람을 상대로 무슨 말을 해야 돼.
외부인이지만 1층 카페에 들르고 싶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아 시발 눈 마주쳤다.”
나는 사옥의 주변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척 배회했다.
슬쩍 다시 떡대 형님을 쳐다봤는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모습.
한 손으로 들어서 나머지 한 손으로 모가지를 똑 부러뜨릴 것만 같아.
“아, 생각해보니까 세미가 먼저네. 내가 순서를 잘 못 알았네.”
메인 남주 득템했으면 메인 여주를 구해야지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지.
아직 9시간이나 남았으니까 잠깐 다른 엔터 들렀다가 다시 오면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 저 아저씨만 교대하면 쌉가능이지.”
원래 남자의 자신감은 떡대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아저씨는 한국에 머무를 인재가 아니야.
“이 회사는 무슨 문 앞에 조폭을 세워놔.”
“에이, 조폭은 너무 했다.”
움찔─
옆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음성에 시선을 돌렸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신인 배우.
템페스트 엔터에서 신예로 밀고 있는 배우였다.
“이름이….”
“저 몰라요? 요즘 완전 핫한데.”
“압니다. 지성호 씨.”
이 친구 정도면 나름 떠오르는 스타인데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나.
“근데 아까부터 우리 회사에 왜 이렇게 기웃거려요?”
“아까부터?”
“창문으로 봤어요. 30분 전부터 서 있던데?”
지성호는 손가락을 뻗어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 풍경이 잘 보이는 위치에 창문이 열려있었다.
“여기 회사 카페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
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까, 그저 솔직하게 대답했다.
“왜요?”
“제가 작가라서. 고증이 필요한지라.”
“오, 작가님?”
이제는 입만 열면 그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이민주 작업실에서 6년 동안 일했습니다.”
“와아, 그럼 이번에 대박 난 작품도….”
“대사 같은 건 저한테도 많이 맡기세요.”
“찐이시네.”
굳이 아픈 구석까지 밝혀가면서 관심을 유도했다.
아직 내 이름을 지우지 않은 이민주 작가 공식 홈페이지.
거기에 내 신분증까지 보여주고 있으려니 현타가 씨게 온다.
“저기, 지성호 씨. 실례가 안 된다면….”
“안 됩니다. 손님.”
“거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빡빡하게 굴지 맙시다.”
“흠….”
세상 살가운 척은 다 해놓고 칼 같이 거절하는 쉐에키.
영문 모를 배신감이 차올랐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서 할모니가 계산해줄 때만 깍듯하신 그런 느낌.
“사실, 오늘 어차피 할 것도 없긴 한데….”
“어, 그럼….!”
“작업하는 거 구경해도 돼요?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저는 조용히 혼자 작업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아하, 그럼 없던 일로….”
“에헤이, 한국말은 끝까지!”
“콜?”
“콜!”
잠시 후,
지성호의 도움으로 임시출입증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떡대 형님의 따가운 눈총을 지나쳐 사옥에 들어섰다.
“1층 카페 전 메뉴는 무료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럼요. 원래 직원들만 출입이 가능하니까.”
뭔가 엄청 착하고 붙임성도 좋은 멍멍이 같은 사람.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내 작품 서브 주연으로 딱 좋은데.
‘애초에 세미부터가 말이 안 되는 캐스팅이지.’
그런 사람이 나 같은 무명작가의 작품에 출연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연기 경력 일천한 세미조차 그럴진대, 지성호 같은 라이징 스타는 말해 무엇하랴.
특히나, 템페스트 엔터는 배우보다 회사 측 의견을 중시한다고 들었다.
그래도 작품 고르는 안목 하나는 기가 막혀서 배우들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고.
“아마 재미없을 겁니다. 그냥 혼자 글 쓰는 거라….”
“응? 아까는 사옥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면서.”
“작업하다가 필요한 부분은 찾아볼게요.”
그의 쓸데없는 호기심 덕분에 카페에 들어오긴 했지만.
지성호 앞에서 집필을 하려니까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지성호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띠링─
“아, 가야겠네. 실장님이 찾으신다고 해서.”
“실장님?”
“있어요. 엄청 깐깐한 사람.”
이름을 안 들어도 이상하게 누군지 알 것 같다.
이내, 지성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 오늘 존나 멋있었어. 칭찬해.”
대체 뭐가 멋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한 걸로 자아도취하며 사라지는 배우님.
“쟤도 정상은 아니네.”
역시 예술가라서 그런지 남달라.
곧이어, 시스템이 요구하는 카페에 입장했다.
바로 새하얀 빛이 나오는 자리를 찾아보았는데.
“아, 왜 하필이면 입구 쪽 테이블인 건데.”
직원만 출입하는 곳이라 최대한 안쪽이기를 바랐건만.
이 또한 시스템의 선택인지, 랜덤 뽑기인지는 모르겠다.
“제발 딱 다섯 시간만….”
부디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희망하며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