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52)
이틀 뒤, 관악산의 정기를 받아 정상에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 관음사에 들러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좋은 기운 받아 갑니다.”
“나무아미타불.”
오랜만에 등산을 하니까 공기도 좋고 건강해지는 기분.
“너무 오랜만이라….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
복지관 센터에 잠깐 들러 드라마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관악산의 가파른 산세를 헤치고 올라서 절까지 들렀으니까.
“5시간 정도 걸렸나.”
터벅, 터벅─
요즘 운동을 너무 안 해서 그런가, 다리가 후들거린다.
곧이어, 산기슭의 목제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미리 관악 중앙복지관에 들러서 드라마를 엿보고 왔기에.
타닥, 타닥─
「해외영업 3팀 김나연 4부」
여유롭게 쓰고, 다시 센터에 들러서 확인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아직 시간도 꽤 남았어.”
이렇게 스스로 쓰는 연습은 많이 할수록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같은 드라마를 봐도 작가에 따라, 상황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천차만별이다.
타닥, 타다다닥─
이전 화에 이어, 베트남 출장 씬으로 시작하는 4부.
현지에 파견되어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는 등장인물.
“여민서….”
어쩌다 보니 등록을 해버려서 그대로 쓸 수밖에 없지만.
등록을 하기 이전과 이후가 거의 완벽하게 흡사하다.
“일치율이 99퍼센트니까 당연하겠지.”
똑 부러지는 일 처리에, 연애고자 캐릭터.
4부에 걸쳐 유설아에게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
이 정도면 거의 현실판 여민서 복붙이지 않을까.
왜 그렇게 일치율이 높은 건지 알 것도 같은데.
“음, 그건 그렇고.”
편 수를 거듭할수록 캐릭터들 간의 케미가 점점 두터워지는 느낌이다.
유설아의 업무 실력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그에 비례해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신입사원의 과한 능력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높은 상사의 이쁨을 받을수록, 직속 사수의 견제는 날카로워진다.
“대사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일단 내 식대로 상황에 맞춰서 쓰는 걸로.
빨리 쓰고, 숙제 검사 받으러 가야겠어.
타닥, 타다닥─
센터도 다시 들러야 해서 꽤나 부지런하게 써야 할 것 같다.
* * *
대학로에 위치한 어떤 극단.
최근 몇 달 사이에 극단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선배님,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얼굴은 순하게 생겼으나, 팔뚝은 허벅지만 한 진성 헬창.
희정은 오랜만에 들어온 후임에게 썰을 풀기 시작했다.
“진호야, 진짜 네가 운이 좋은 거야. 라떼는 말이야….”
“아, 음….”
이진호는 괜히 말을 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썰을 풀면 30분도 가뿐하게 채우는 선배였으니.
“라떼는 물도 편하게 못 먹었는데 말이지.”
“아, 그럼 어떻게 지금처럼 좋아진 겁니까?”
“동기한테 못 들었어? 선배 한 명이 어떤 오디션에 한 번 갔다 오더니, 그 후로 바뀌었어.”
“와, 정말 좋은 선배시네요.”
“아니, 그분은 적응 못 하고 떠남.”
“앗, 아아….”
그때, 한 선배가 다가오며 진호를 라떼의 늪에서 구원했다.
“희정아, 오늘 청소 당번은 너야.”
“아, 네. 선배님.”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청소 당번.
이제는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번갈아 가면서 청소를 했다.
소위 ‘막내일’이라고 불리는 악습이 모조리 사라진 게 벌써 두 달째.
“선배님, 저도 오늘 당번입니다.”
“아, 그래?”
“넵.”
진호는 희정에게 은근슬쩍 질문했다.
“저기, 선배님. 얼마 전에 파일럿 프로그램 잘 봤습니다.”
“오, 그거 봤냐?”
“네.”
최근,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희정을 찾는 관객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어리고 재능 있는 배우들도 여럿 입단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의 연기력을 보유한 인재는 이진호.
처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운동광이라 꺼렸지만.
성격적으로, 알면 알수록 사람이 진국이었다.
“그러고 보면, 너도 강준이 처음 볼 때랑 비슷하네. 특히 연기 실력이.”
“그, 그런 극찬을….!”
“진짜야.”
대배우 이형곤 님의 친아들이자 연기판 금수저.
그렇다고 뻐기는 성격도 아니라서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배님, 저 강준 배우님 한 번만 뵙고 싶습니다!”
“음…. 그건 쉽지 않은데.”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너의 진심을 내가 높이 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무슨.”
희정은 장그래 극단의 에이스에게 특별히 선심을 쓰기로 했다.
뚜루루루─
-여보세요?
“깡준? 너 안 바쁘냐? 무슨 전화를 3초 만에 받아?”
-아…. 마침 핸드폰 하고 있어서.
“내일 함 보까?”
-음, 스케줄 있나 보고….
“바쁘면 담에….
-아, 아니! 마침 시간이 남네?
“오, 그래? 오케이. 그럼 낼 봐.”
-어, 그러던가, 그럼.
뚝.
희정은 위풍당당한 자태로 후배를 보며 미소지었다.
“선배님 대단하십니다.”
공중파 16부작의 원탑 남자주인공과 이런 친분을 가졌다니.
진호는 초롱초롱한 존경의 눈빛으로 희정을 바라봤다.
“야, 너는 대단한 아부지를 두고서.”
“에이, 가족이랑 다르죠.”
“가족? 음….”
생각해 보니, 대단한 가족을 두고 있는 건 이진호뿐만이 아니지 않나.
‘오빠는 무슨 아침부터….’
등산에, 봉사활동에, 하루종일 왜 그렇게 바쁜 건지 모르겠다.
* * *
“민서야, 이따 연락하면 내가….”
“됐어. 퇴근해.”
“그, 그래도….”
“괜찮아.”
“아, 그래. 그럼.”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부르르릉─
그가 모는 밴이 서서히 멀어지고, 여인은 전면에 보이는 건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평소와 달리 편한 운동화에 츄리닝을 입고 등장한 여민서.
이내, 센터의 직원이 버선발로 마중 나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민서 왔어?”
“이모님, 저번 주에는 못 왔네요. 스케줄 때문에.”
“어후, 바쁘면 당연히 못 오고 그러는 거지.”
이모라고 불린 직원이 말을 편하게 할 만큼 방문 빈도가 잦았다.
“저기…. 오늘 봉사 오신 분이 한 명 더 있어.”
“그래요?”
센터 직원은 여민서를 데리고 세탁실로 향했는데.
직원의 말마따나, 누군가 방구석에 앉아 수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수건을 제멋대로 돌돌 말아서 개는 모습.
민서는 신입 교육을 처음부터 해야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뭔가 뒤통수가 상당히 익숙한데요?”
“응? 오늘 처음 온 총각인데.”
“그래요?”
직원은 약간 미안한 어조로 여민서에게 말했다.
“그, 오늘 빨랫감이 좀 많은데….”
“아,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갈 곳 없는 아이들과 노인분들을 위한 복지관.
어제 행사까지 겹쳐서 일거리가 많은 편이었다.
“우리 여 배우님한테 너무 미안해서….”
“괜찮아요. 일하러 온 건데요.”
“모쪼록 오늘은 봉사자가 한 명 더 있으니까. 내가 총각한테 가서….”
“이모님, 일 보세요. 제가 말할게요.”
“…. 그래, 그럼. 여 배우님 얼굴 보면 저 총각 까무러치겠네.”
“에이, 연예인 관심 없는 사람도 많아요. 제가 누군지도 모를걸요?”
물론, 웬만큼 관심 없지 않고서야 여민서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저벅, 저벅─
구석자리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섰는데.
가까워질수록 점점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타닥, 타다다닥─
어느새 수건을 개다 말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남성.
복지관 세탁실에서 들려오는 타자 소리가 웬 말인가.
‘조금 이상한 사람….’
마침, 템페스트 엔터에도 비슷하게 이상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작가 한 명이.
“저기요.”
김진우 작가 다음으로 이상한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여민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쪽이 왜 여기서 나와요!?”
* * *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닐까요.
뜻밖의 인물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서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는 여민서 씨가 여기는 어쩐 일로….?”
“…. 저는 원래 자주 와요.”
여민서가 복지관을 자주 온다니.
“혹시 자숙 중?”
“…. 작가님 싸움 잘하세요?”
“아, 아뇨.”
뜬금없이 무슨 복지관이 집필 장소로 선정되었나 싶었는데.
여민서 배우가 여기를 자주 온다면 아다리가 딱 들어맞는다.
‘언제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드라마 속 배경과 관련이 있든가.
등록한 배우가 들렀던 장소든가.
“여 배우님이 이렇게 봉사 정신이 투철한 줄은 몰랐네요.”
첫 만남이 좋지 못해서 그랬나.
그동안 조금 오해한 게 있던 것 같다.
“보아하니, 여기서 대본 쓰고 계시는 것 같은데.”
“아, 네. 떠오르면 바로바로 쓰는 게 좋아서.”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는데.
곧이어, 한숨을 폭 내쉬고 입을 여는 여민서 배우.
“당장 급하게 쓸 대본 없으면 따라 오세요. 할 일 있으니까.”
“???”
그녀의 안내를 받고 어기적거리며 따라온 옆 방.
“뭐예요, 이게.”
“뭐긴 뭐예요, 빨랫감이지.”
“음…. 저는 여기 일하러 온 게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하하.”
“이불 가지고 따라오세요.”
“저기….”
휘익─
제 할 말만 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여민서.
‘내가 왜….?’
상식적으로 봐도 혼자 들고 갈 수 있는 양이 아니라.
그녀에게 같이 옮기자고 말을 하려고 하는 찰나에.
“안 오고 뭐 하세요?”
옆 방에서 본인 몸집만 한 부피의 빨랫감을 들고서 말하는 그녀.
“하, 하고 있잖아요.”
“어휴,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해요! 빨리 빨리 해야죠.”
“….”
양팔에 이불을 마구잡이로 집어들고 여민서의 뒤를 따랐다.
‘오늘 분량까지 총 4부의 대본….’
나는 손빨래를 하면서도 작가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쓰자마자 퇴고하는 거랑, 다음 날 퇴고하는 건 다르니까.
“거기 좀 잘 밟아 보세요.”
“…. 저한테 진짜 왜 그러세요.”
“그럼 제대로 하든가! 계속 폰만 보고!”
“폰만 보고는 반말이고!”
“요!”
내가 진짜 빨래 때문에….!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이후, 한동안 빨래에만 집중했는데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미쳤다. 이건 미쳤어.
뒤지게 힘든데 끝이 안나.
“아니, 여기는 세탁기도 안 써요?”
“세탁기 돌리는 건 따로 있죠. 이건 손빨래 해야 돼요.”
“….”
스윽─
고개를 슬쩍 돌려 여민서를 쳐다봤다.
마치 기계처럼 세탁물을 처리하는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뭘 봐요.”
“….”
너 님이요.
이제 보니까 아주 습관처럼 시비 거는 사람이야.
별다른 의도는 없고, 그냥 순수 악이라고나 할까.
순자 님 말씀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발이 슬슬 저려왔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
“민서 씨, 언제부터 봉사했어요?”
“반 년은 넘었어요.”
일부러 질문을 던지면서 신경을 분산시켰다.
“특별한 이유라도….?”
“자꾸 쓸데없는 말 시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제대로 안 할 거예요, 진짜?”
“….. 죄송함다.”
주부 9단처럼 월등한 실력으로 찍어 누르니까 할 말이 없다.
‘…. 왜 계속 손해 보는 기분이지?’
사과를 하면서도 왜 사과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빨랫감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어? 있었는데요. 이제 없어요.”
“뭐가요.”
“발에 감각이요.”
“….”
끝내, 빨래를 마치고 성취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으으, 허리 아파.”
“겨우 이거 했다고 아프긴요.”
이불 밟아서 빨래하는 건 처음이라고.
“기다려봐요.”
“???”
이내, 여민서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는데.
그 사이에,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마당 쪽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땅에다 분필을 긋고 노는 모습.
내 나이 정도 되면 어렸을 때 한 번쯤 해봤을 땅따먹기.
돌멩이를 던져서 그 땅을 피해서 뛰어노는 단순한 게임.
요즘도 저거 하면서 노는 애들이 있구나.
“자요.”
“아!”
언제 나타났는지, 여민서가 음료 한 캔을 건네며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리는 한동안 음료를 홀짝거리며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 아이가 실수로 돌을 윤곽선 바깥에 던져서 울상을 지었는데.
여민서는 우아하게 팔짱을 끼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서 고급진 단어를 뱉었다.
“드럽게 못하네.”
“….”
여배우란 뭘까?
“작가님.”
“네.”
“집에 안 가세요?”
“이제 곧 가려고요.”
“좋네요.”
“….?”
“혹시 같이 갈까 봐요. 먼저 가시라고.”
“….”
빨래하면서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나 혼자 착각했네.
“그래요. 그럼 다음에 또…. 앗.”
“작가님, 말실수하시네.”
“그니까요. 실수할 뻔.”
“조심조심.”
평상에서 일어나 떠나려는 순간, 문득 드라마 내용이 떠올랐다.
오늘 4부를 집필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여민서의 모습이.
“저기요. 여민서 씨.”
“왜요.”
“해외영업 3팀 김나연, 대본 읽어봤어요?”
“…. 별로던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음, 자기애가 넘치시네요.”
“안 읽었죠? 한번 읽어 보세요.”
“….”
“혹시 모르잖아요. 하고 싶은 배역이 있을지.”
여민서는 어이가 없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
그녀를 뒤로 한 채 노트북을 챙기러 세탁실로 향했다.
오늘부로 부처님께 귀의한 몸이 아닌가.
인연이 있다면 닿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흘러갈 터.
지이이잉─
그때,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
“어, 효주야.”
-오빠, 드라마 미팅 자료 준비 끝났어요.
“그래? 완벽함?”
-네. 거의 뭐 고칠 게 없어요.
“크으, 갓효주. 주님께 찬양해.”
-이 정도쯤이야.
“나한테 자료 보내봐.”
-예, 썰!
MBS 측과의 드라마 미팅까지 고작 3일 남은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