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55)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
입국심사대를 통과하고 캐리어를 챙겼다.
아직 5월이지만, 한여름처럼 끔찍한 더위가 나를 반겨주었다.
“가이드 분 성함이…. 응우옌?”
공항 앞에서 각종 언어로 쓰여진 피켓을 들고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말로 ‘김진우 환영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남자.
“안녕하세요. 김진우 님?”
“응우옌 씨?”
“네.”
발음은 어색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 실력.
“피켓에 왜 퍼플걸스 사진이….?”
“그야, 제가 팬이라서! 하핫.”
“그니까 왜 저를 찾는 피켓에 걸그룹 사진을….”
“제가 너무 팬이라서! 하하.”
가이드 뽑기 실패.
잘못 걸렸다.
‘지금이라도 바꾸는 거 가능?’
그래도 생각보다 응우옌의 운전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교통 법규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시원하게 달리는 차량.
도로 위에는 온통 칼치기 오토바이들 천지였으니.
베트남 도로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회피 운전은 기본이다.
“어후, 교통이….”
오토바이 옆에 또 오토바이.
부딪힐 듯 부딪히지 않는 게 킬포인트였다.
“엥? 저기 역주행하는….?”
베트남의 교통 법규는 그만 알아보자.
지이이이─
창문 열고 달리니까 더위가 그나마 조금은 가신다.
덕분에 조금은 살 만 해져서 가이드에게 질문도 던졌다.
“요즘 베트남에 퍼플걸스 인기가 많아요?”
“네! 당연하죠.”
갑자기 국뽕이 차오른다.
더군다나 반쯤은…. 아니, 반의 반쯤은 순정마초 덕분이니까.
“응우옌 씨, 제가 할 일만 다 마치면 전화 한 번 정도는 하게 해줄게요.”
“네?”
“퍼플걸스랑.”
“아하하하하. 예, 그러세요.”
“…. 진짠데.”
“예예.”
“오케이! 지금 당장 전화함.”
“예~ 예~”
이 사람, 무슨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가.
어떻게 말투가 이렇게 얄미울 수가 있지.
‘내가 영상통화로 혼내준다.’
가이드의 반응을 보고 호기롭게 스마트폰을 들어 미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루─
억겁의 시간이 흐르고,
“…. 아시다시피, 요즘 퍼플걸스가 바쁘잖아요.”
바로 세미에게 연락했다.
뚜루루루루─
“…. 진짜 많이 바쁜가 보네.”
“그러시겠죠. 하핫.”
슬쩍 고개를 끄덕거리는 응우옌 씨.
피식하고 비웃는 모습이 세상 얄미웠다.
“아…. 개억울하네.”
왜 하루 만에 두 번쯤 차인 기분이 들지?
아니, 하루가 아니라 고작 3분 만에.
* * *
MBS 드라마제작국장실.
정새롬 실장은 김 국장과 제작비 편성을 담판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회당 2억은 좀…. 무슨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그 블록버스터보다 순정마초가 시청률 더 나왔죠?”
“…. 그렇긴 한데.”
아무리 사람 좋은 김 국장이지만, 돈 앞에서는 한낱 직장인에 불과했다.
“국장님. 주연급 배우들 개런티도 그렇고, 해외 로케도 생각하셔야죠.”
“….”
이미 확정된 세 명만 해도 회당 1억까지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김진우 작가의 스타일상 언제나 현지에 먼저 가보고 글을 쓰니까.
‘베트남 하나로 끝나면 다행이지.’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제작비를 끌어모아서 드라마를 성공시키는 수밖에 없다.
“지금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 시청률이 얼마인 줄은 아시죠?”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다른 공중파 방송국에서 한창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였으니.
“그래요. 일단 본부장님께 말씀드려 보죠.”
“감사합니다. 국장님.”
새롬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또각, 또각─
“이번 작품은 원고료 최대한으로 잡아드려야겠네.”
처음에는 회당 2천만 원으로 생각했는데.
김진우 작가 덕분에 쉽게 받아낸 제작비를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더 줘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문득, 김진우 작가가 베트남에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카드를 떠올렸다.
여타 주연급들이랑은 비교가 불가능한 완전 신인배우.
“이름이…. 이진호라 했나?”
사실, 처음에는 변 팀장에게 건네받은 프로필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대단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없는 신인이었으니까.
“장그래 극단이라….”
김 작가의 여동생이 소속된 극단.
새롬은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이렇게 작가의 가족과 연락을 했던 경우가 있었던가.
언제나 공과 사에 철저하게 선을 그어놓고 살았는데.
심지어 회사에서는 삼촌과도 아는 척 하지 않을 정도니까.
“하아…. 나도 잘 모르겠다.”
뚜루루루─
전화를 받기까지 정확히 1초.
‘우리 동생…. 혹시 직업이 스마트폰인가?’
희정은 언제나처럼 호들갑을 떨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쁜 언니!
“…. 네. 희정 씨.”
-안 그래도 말씀드릴 거 있었는데!
전화는 이쪽에서 했는데, 누가 보면 상대가 용건이 있었던 줄 알겠다.
“뭔데요?”
-저 이번에 연극 첫 주연 맡았어요! 우리 오빠랑 같이 오시면 되겠다.
“아, 아니, 제가 왜 작가님이랑 같이 가요!?”
-아니면 혼자 오셔도….
클럽에서의 추억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음, 혹시 거기 이진호 배우님? 그 분도 이번 연극 같이 하시나요?”
-이진호? 그 친구를 실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 어쩌다 보니.”
-그 친구도 단역으로 출연해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꼭 들르셔요!
“네. 또 연락하겠습니다.”
-넹.
뚝.
“귀엽네.”
그나저나, 이런 중요한 시기에 베트남 여행이라.
이번에는 언제쯤 오시려나 모르겠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오빠, 엄마가 안부 전해달래.
“그래. 고맙다.”
-근데, 나 극단에서 주연 맡았어! 얼마 후에 연극 있는데.
“응. 끊어.”
갑자기 본인 이야기를 하니까 국제전화비가 아까워졌다.
얘랑 전화 안 했으면 쌀국수 한 뚝배기 했겠네예.
-아니 들어봐! 이번 연극에 정새….
뚝.
“그나저나…. 여기는 뭐가 이렇게 넓어.”
이제는 공원에 들어가는 게 무슨 던전 들어가는 기분이다.
진짜 이러다 제한 시간 지나가 버리는 건 아니겠지?
벌써 사흘째 돌아다녔으니, 황효주 여권 나올 때까지 기다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
바비 국립공원…. 다른 말로, 바비산 국립공원.
등산을 연상케 하는 계단의 향연.
“관악산 등산으로 다져진 건강이라고.”
터벅, 터벅─
앞장서서 걸어가는 내 뒤로 응우옌이 따라붙었다.
“허억, 김진우 씨…. 진짜 관광하러 온 거 맞아요?”
“그럼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하아, 하아.”
응우옌 형님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저도 힘들어요.”
지난 며칠간 진짜 뭐 빠지게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몇몇 장소는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고.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 같기도 한데.”
조금 서둘러서 전부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도 며칠 안 남았으니까.
“저기 사찰은 아직 안 가봤네요.”
“네? 거긴 관광지도 아니고….”
“부처님 앞에서 인간사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잠시 후, 바비산 정상에 올라 산기슭을 내려다보았다.
같은 눈높이에 뭉게뭉게 깨끗한 구름이 펼쳐졌으니.
해발 1,227미터.
부처님의 상 앞에서, 처음으로 해외 시스템 빛무리와 조우했다.
“…. 진짜 시스템이 여기까지 뿌리내렸네.”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털썩─
근처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응우옌 형님,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네….?”
“어디 가서 5시간만 쉬다 오세요.”
“아, 네. 뭐….”
몇 날 며칠 한 곳만 집요하게 돌아다녔으니, 가이드가 지칠 법도 했다.
멀어지는 응우옌 씨를 슬쩍 쳐다보고는 곧바로 대본에 집중했다.
타닥, 타다닥─
「해외영업 3팀 김나연 5부」
이번 화에서는 김나연의 상사 캐릭터가 부각되었다.
“부장 캐릭터라….”
옆 동네 「인턴」에서도 이쯤 해서 상사 캐릭터들이 떡상했다.
타닥, 타다닥─
문제는, 부장급 캐릭터는 시스템상에서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점.
현재 등급에서는 연기 경력 10년 정도가 한계였으니까.
“뭐, 등급 하나 더 올려도 끽해야 15년쯤 되려나.”
저런 정도 나이대의 캐릭터는 등록 못 한다고 봐야지.
아주 늦은 나이에 데뷔한 특수한 케이스의 배우들을 제외하면.
그런데, 이번 화에서는 처음으로 개그를 가미한 장면이 등장했다.
알래스카에서 에어컨을 팔고, 아프리카에서 온풍기를 파는 씬.
“…. 이런 장난 하지 마. 진짜.”
심장 아프다고.
반쯤은 농담에 반쯤은 진담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래도 살짝 불안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대본을 쓰고 있었는데.
지이이잉─
마침내, 기다리던 인물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세, 세미!”
고개를 돌려서 응우옌 형님을 찾았다.
저 멀리서 음료 두 잔을 들고 다가오는 모습.
“빨리, 빨리!”
“네?”
“빨리 와보세요!”
“???”
“지금 음료수가 중요한 게 아니야!”
느릿느릿 걸어오는 가이드를 재촉했다.
그러면서 곧바로 세미의 전화를 받으려고 했는데.
뚝.
“앗, 끊어졌다.”
곧바로 세미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지만.
그녀가 내게 톡을 보내는 게 먼저였다.
띠링─
[작가님, 전화 이제 봤어요! ㅠㅠ 저 다시 스케줄이요 ㅎㅎ]
“으악, 안 돼!”
천천히 다가오는 가이드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방금 퍼플걸스 세미한테 문자 받음. 인정?”
“에이, 이제 그만 좀 해요. 진짜.”
이런 신발.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노이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 * *
KBC 방송국,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 세트장.
송권수 감독의 지시 아래 빠르게 굴러가는 촬영 현장.
강준은 촬영장을 보며 문득 감상에 젖었다.
“벌써 촬영도 중반에 접어들었구나.”
그때, 옆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준 선배님, 여기 음료수요.”
“고마워.”
촬영장 스탭부터 배우들까지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김현지.
“고맙긴요.”
여배우답지 않게 털털한 성격의 그녀.
아직도 신인처럼 모든 스탭들에게 깍듯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현지야, 그거 들었어?”
“네?”
“김진우 작가님, 베트남 가셨다던데.”
“음? 갑자기요?”
“원래 글 쓰러 자주 돌아다니셔.”
“아….”
현지는 조심스럽게 김진우의 미담을 늘어놓았다.
한때, MBN에서 어떤 감독에게 별 이유 없이 혼났을 때의 이야기.
“그런 일이 있었어?”
“얼마 전에 메시지로 사과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예능 나가면 콱 말해버려.”
“그건 안 돼요! 괜히 김진우 작가님께 피해가 가면 어떡해요.”
“응?”
“작가님도 남의 촬영장에서 소리치신 건 맞으니까.”
괜히 불씨를 키워서 좋을 게 없는 바닥이다.
지저분한 폭로전 끝에는 양쪽 다 파멸만이 있을 뿐.
“그리고 어차피….”
“응?”
“그 드라마 쫄딱 망했어요. 시청률 0.7프로. 헤헷.”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김현지.
강준은 따라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인터넷 빠른 거 보니까 한국 맞구먼.”
제대로 여행도 못 하고 바비산 공원만 돌아다니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이제 막 인천공항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스템이 장난을 칠지 모르겠으니.
“내 진짜 실력도 키워야지.”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되, 스스로의 실력 역시 키워야 하는 건 분명하다.
베트남의 추억은 가슴에 묻고, 스마트폰의 비행기모드를 풀었다.
비행기 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연락이 와 있었겠어.
이게 바로 셀럽의 삶.
“…. 연락이 안 왔어!?”
이럴 리가 없는데.
스마트폰 고장 났나.
이거 비행기 모드가 안 풀려요.
“아, 맞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번호 바꾼 지 얼마 안 됐지.
회귀자 대박 나고 또 바꿨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자.”
오랜만에 회귀자 관련 소식이 궁금했다.
《4화 만에 시청률 25%를 달성한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 성장세는 어디까지?》
뉴스 헤드라인이야, 원래 이런 식이니까 제쳐두고.
순정마초 때부터 이어져 온 남모를 취미생활.
기억을 지우는 회귀자의 커뮤니티에 냉큼 접속했다.
이제 슬슬 김진우를 언급하는 시청자도 생기지 않았을까.
-수목극 1위 ㅋㅋㅋㅋ
-강준 오빠 다니는 학원 이름 좀 알려죠
-미령아 사랑해 ㅠㅠ
-회귀자는 백상예술대상 참가 못함?
ㄴ아직 4화뿐이라 수상권 제외임 ;;;;
ㄴ까비
ㄴ2주만 먼저 했으면….
다시 생각해 보니까, 작가 이름은 보통 관심 없는 게 일반적이지.
“백술예술대상…. 이제 진짜 코앞까지 다가왔구나.”
내가 참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큰 행사였다.
순정마초의 성공도 온전히 내 힘으로 쌓은 게 아니니까.
몇 시간 뒤.
삐, 삐삐삐─
커뮤니티를 구경하며 집에 도착했는데.
집에 들자마자 희정이가 나를 반겨주었다.
“오빠 왔어?”
“어. 힘들었다.”
“나 극단에서 주연 맡았는데.”
“그래? 축하해.”
“심심하면 보러 오든가.”
“응. 안 가.”
“치. 나도 됐거든?”
괜히 혼자 삐쳐서 제 방에 휙- 들어가 버리는 여동생.
“뭐지, 못 보던 패턴인데?”
우리 집 보스몹 패턴이 추가됐다.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 놔야겠다.
끼이익─
오랫동안 안 들어왔지만 먼지 하나 없는 내 방.
어머니께 감사함과 죄송함을 동시에 느끼며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책상 위에 웬 대본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다.
MBS에서 어떤 여성 조연출 한 분이 주셨던 내 대본.
자신만의 해석을 달아놨으니 읽어달라고 말했던가.
스르륵─
대본을 천천히 펼쳐서 읽어봤는데.
“그림을…. 그렸네?”
각 페이지에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한 장씩 그림이 꽂혀있었다.
마치, 사진처럼 내가 봤던 드라마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지?”
전문가 뺨치는 그림 실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눈에 그림 실력 따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
배경의 구도와 인물의 배치까지 그대로 재현해 내는 실력.
대본을 읽고 머릿속에서 이런 내용을 그렸다고 가정한다면.
“송권수 감독에 필적하는 천재일지도….”
그녀의 나이까지 고려하면, 그 이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