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6)
자리에 있던 새하얀 빛이 내 머릿속에 침투했다.
첫 장면부터 여주인공의 알바씬으로 시작하는 3부 초입.
한쪽에 껄렁한 자세의 사채업자 무리가 있는 걸 보면 뻔했다.
“역시 K드라마는 신데렐라지.”
이전 내용에서 주인공이 여주의 알바 장소를 알아보는 내용이 있었으니까.
자연스러운 흐름상 볼 것도 없이 남주가 등장해서 구해주는 전개로 갈 터.
“…. 가 아니네?”
여주가 알바하는데 찾아온 사람은 서브 남주였다.
특유의 발랄한 어투로 여주와 티키타카를 주고받았다.
상대가 재벌인 줄 모르는 여주의 핀잔이 재미 포인트였다.
서브 남주의 대사가 조금 과하게 튀는 느낌이 들었는데.
처음으로 대사를 수정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이내, 드라마를 일시정지하고 대사를 읊조렸다.
“너는…. 진짜 나 아니면 안 되겠다.”
장난스럽게 툭 던지는 서브 남주.
뒤지게 오글거리는 대사였다.
“음, 이게 먹힌다고?”
곧이어 등장하는 고구마 악역들이 여주에게 접근하려는 순간.
서브 남주는 그중 한 명의 손목을 비틀어 밖으로 끌고 나갔다.
여주가 보지 않는 장소에서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장면.
댕댕이 같은 서브놈이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분기점이었다.
“역시 투톱 맞잖아.”
벌써부터 이 정도 비중이면, 까딱하면 주인공이 묻히게 생겼다.
임재준이 연기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무조건 잡아먹힐 것이다.
“우리 동생 분발하자.”
어느새 드라마에 몰입한 시청자이자 작가로서 집필을 이어갔다.
딸랑─
그 순간, 카페 문을 열고 두 명의 남녀가 카페에 들어왔다.
“흡.”
이내, 나는 급하게 고개를 숙여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는 아름다운 한 쌍.
공교롭게도 둘 다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일전에 사기 치고 모른 척했던 여자, 정새롬 실장.
그리고 오늘 카페 출입을 도와준 배우, 지성호 씨.
그대로 입구를 지나쳐 카운터로 향하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등진 채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벗어났다.
내 짐을 전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둔 그 상태로.
“아오, 씨…. 저 여자만 피하고 싶었는데.”
신인작가가 JTBS 직원 사칭을 했으니 대충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장소 중에 템페스트 엔터가 장소로 걸려서.
“절반 정도 썼고, 남은 시간은 7시간 정도니까…. 아직 여유 있어.”
원래 글만 쓰면 건강도 헤치는 법이다.
지성호 배우가 만들어준 임시출입증 덕분에 언제라도 재출입이 가능했으니.
서너 시간쯤 자리를 비워도 집필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대학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려나.”
희정이 극단도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작가랍시고, 배우 하는 여동생 직장 구경도 못 해봤네.
이내, 여기서 대학로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했다.
“30분이면 가겠네.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
* * *
정새롬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지성호의 뒤를 따랐다.
이내, 생기발랄하게 카페에 들어서는 배우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오늘은 왜 카페에서 대본 회의를 하자는 거야.”
“음, 안 보이네. 어디 갔지?”
“누구.”
“오늘 제가 어떤 작가님이랑 친해졌거든요? 완전 찐 인맥!”
“작가님?”
카페를 스윽 둘러보던 성호는 새롬에게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무려 이민주 작가님….”
“이, 이민주 작가님!?”
요즘 가장 핫한 작가와의 친분이라면 이렇게 설레발 쳐도 인정이었다.
“…. 의 작업실에서 6년 동안 일한 보조 작가님.”
“아, 그래? 참 좋은 인맥이야.”
한참을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지성호 배우.
새롬은 피식 웃으며 성호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저게 저 배우의 매력이겠지.’
케어하는 입장에서는 저런 성격이 귀찮을 따름이지만.
저 모습 덕분에 팬이 생기고 스타성이라는 것도 있는 게 아닐까.
“이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한테 못 맡기지.”
템페스트 엔터가 워낙 조용조용한 배우들만 취급하는 회사인지라.
저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튀는 행동이었다.
기본적으로 떠오르는 신예니까 이렇게 자신이 직접 작품 컨택도 해주고 있었다.
“찾았다!”
성호는 가방과 노트북이 놓여진 자리에서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물건들이 남아있었다.
“남의 자리에서 뭐 하는 거야.”
“아니에요. 오늘 만난 친구 자리라니까요. 이 가방 아까 본 게 확실함.”
지성호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전화를 하면 되겠네.”
“번호는 없는데요. 하하.”
“그럼 친구가 아닌 거…. 아, 됐다.”
지성호는 제멋대로 노트북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탕탕 테이블을 치며 앉으라고 재촉하는 모습.
“후우….”
새롬은 자리에 앉아서 네 개의 작품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나씩 읽고 골라봐.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도 무조건 평균 이상은 될 테니까.”
“저야 뭐, 정 실장님 믿어야죠.”
“제대로 골라.”
“넵.”
이내, 그녀는 서류에 남아있는 한 부짜리 대본을 슬쩍 꺼내었다.
얼마 전에 황당한 경로로 입수한 정체불명의 1부 대본이었다.
“오, 그건 뭐예요? 제목이 순정마초가 뭐야. 키킥.”
“아, 이건…. 음, 애증의 작품? 신경 쓰지 마.”
“뭐예요. 그게.”
“빨리. 읽으라고. 냉큼.”
“넵.”
새롬은 이미 수십번도 더 읽은 작품을 다시 펼쳐보았다.
고작 1부짜리 대본에, 작가는 미상인 불가사의한 시나리오.
그사이에 하도 많이 읽어서 대사를 전부 외워버릴 지경이다.
“오, 이거 재밌네요.”
“그래? 넷 중에 어떤…. 아니, 너 진짜!”
스윽─
새롬은 고개를 슬쩍 들었는데, 지성호가 그사이를 못 참고 딴짓을 하고 있었다.
오늘 사귄 번호도 모르는 친구의 노트북을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지성호, 남의 물건에 손대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드디어 참지 못하고 화를 섞어서 말을 꺼낸 새롬.
그런데, 이어지는 지성호의 답변은 상식을 벗어났다.
“저기…. 방금 실장님이 들고 있던 게 제목이 뭐라고 하셨죠?”
“왜 남의 노트북을 봐! 빨리 자리에 앉지? 나 진짜 화날 것 같은데.”
“아니, 방금 순정마초! 이 노트북으로 쓰고 있는 거랑 제목이 똑같아요.”
“…. 뭐?”
새롬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노트북 앞에 걸어갔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파일명을 확인했다.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3부」
“…. 그 작가라는 친구분이 어떤 사람이라고?”
* * *
“오, 우리 희정이 성공했네.”
그냥 단역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역할인지는 듣지 못했는데.
홍보용 포스터 한쪽에 얼굴이 걸려있는 걸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비중은 있는 것 같다.
집에서 생얼만 보다가 풀메에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까 오빠로서 괜히 뿌듯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우리 드라마 도넛 가게 알바생으로 꼭 넣어줄 테니까.”
하꼬 배우한테 그 정도 배역이면 큰맘 먹었다 진짜.
나는 대형 포스터 아래, 테이블에 놓여있는 팜플렛을 챙겼다.
그리고 동생의 공연 티켓을 구매하고 극장으로 들어섰다.
“괜히 공연 전에 얼굴 보면 제대로 연기도 못 할 테니까….”
강해지라는 의미에서 얼굴부터 보러 가야겠다.
사실, 상황 봐서 공연 중간에 나갈 수도 있기에 뒷자리로 예매했다.
곧이어, 극장의 뒤쪽에 위치한 배우 대기실에 천천히 걸어갔다.
소규모 극단이라 그런지 제지하는 스태프도 부재했다.
그런데,
“미쳤냐? 소품에 먼지 안 보여?”
“죄송합니다.”
“시발 진짜 빠져가지고. 2년 차 되니까 연기가 만만해?”
“…. 죄송합니다.”
이후에도, 누군가 계속해서 폭언을 쏟아내며 어떤 여인을 갈궜다.
문제는, 거듭해서 사과하는 쪽의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하다는 것.
스르륵─
장막을 슬쩍 거두고 내부의 상황을 확인했는데.
“김희정! 오늘도 극단 청소 니 혼자 다 하고 가라. 알겠어?”
“…. 네. 알겠습니다.”
쌍팔년도 군대도 아니고, 이상한 군기를 잡는 배우들의 면면들.
“이런 썅, 방금 뜸 들인 거냐?”
“아, 아닙니다!”
항상 쓸데없이 밝은 얼굴만 보여줘서 이런 취급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매일 싸우는 여동생이지만, 막상 갈굼 당하는 모습을 보니까 속에서 열불이 올라온다.
“어? 거기 누구예요! 여기 들어오시면….”
그때, 누군가 나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타다다닥─
여동생의 눈에 띌까 두려워 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여동생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까.
여린 희정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길까봐.
“하아, 하아…. 개열받네.”
대학로 한복판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매일 싸우면서도 진짜 힘들 때는 진지하게 응원해 주는 희정.
이민주에게 고통받을 때도 여동생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어쨌거나, 부모님을 제외하면 한 명뿐인 가족이니까.
“얼굴 전부 기억했다. 씹새끼들.”
이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팜플랫을 꺼내어 들었다.
욕한 놈이랑 방관한 놈은 물론, 옆에서 실실 쪼개던 것들까지.
하나하나 얼굴을 대조하며, 스마트폰에 살생부를 기록했다.
비단, 희정이 혼자만 욕을 먹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동생이랑 같이 갈굼당하는 친구들 이름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두고 봐. 이번 작품만 잘 되면….”
그렇다고 여동생한테 내 소중한 작품을 줄 수는 없겠지만.
선배랍시고 개 같은 군기 잡는 선배들한테 복수 정도는 해줘야지.
아무래도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줘야 될 것 같다.
희정의 자존심에 내가 봤다는 걸 알면 참기 어려울 테니까.
“감히 내 동생한테 갑질을 해?”
내 동생은 나만 욕 할 거야.
* * *
짜증이 난 상태로 글을 쓰면 잘 써질까?
아마 모든 작가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만 빼고.
“솔직히 작가라기보단…. 글 옮긴이 정도니까.”
나는 임시출입증을 사용해 다시 템페스트 엔터에 입장했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은 고작 몇 명이 전부였다.
한적한 오후 시간대라 직원들은 근무 중인 것 같다.
지금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쓰면 너무 잘 써질 것 같아.
복수심에 불타는 씬이 꼭 나와줬으면 좋겠네.
이제 분량은 절반도 안 남았는데, 시간은 많이 남아서 여유로운 편이었다.
“흐음, 그럼 3부를 마무리해 볼까.”
제한 시간이 남았으니 당연히 빛무리도 머무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며 광택이 나오는 자리 앞에 털썩 앉았다.
화면 보호 중인 검은색 노트북 화면을 해제했는데.
내가 쓰고 있는 파트에는 처음 보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50pt의 빨갛고 커다란 글씨로 쓰여진 인사말 한 구절.
[김진우 안녕?]
오싹─
“뭐여, 시벌.”
누가 내 노트북을 건드렸다.
파일은 전부 자동으로 백업되니까 상관없긴 한데.
딸랑─
“김진우 씨, 또 보네요?”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에게로 직행했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정새롬 실장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절묘하게 나타났다.
여기 들어온 이상 어느 정도 들킬 각오를 하기는 했지만.
“그러게요. 근데 제 이름은 어떻게….”
“임시출입증 받을 때 신분증 맡기지 않았어요?”
정 실장의 뒤편, 지성호 배우는 겸연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저런 배신자 같은 놈! 임출 반납할 때까지는 한 팀이거늘….!’
노트북에 장난친 게 누군지 알 것 같다.
정 실장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화가 난 건지 기분 좋은 건지 모를 의미심장한 표정의 그녀.
“앞에 잠깐 앉아도 될까요?”
“…. 그러세요.”
“고마워요.”
나는 부드럽게 웃고 짓는 정새롬 실장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데, 사기꾼을 대하는 것 치고는 그녀의 태도가 상당히 정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