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77)
소금 엑터스의 한 회의실.
근엄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에게 사나운 악역 연기를 시켜보는 작가의 제안.
김진우가 던진 발언에 사람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정 배우를 바라봤다.
“저는 괜찮긴 한데….”
정형구는 슬쩍 조셉 리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촬영장에서 감독과 동고동락을 해야 하기에.
배우 입장에서는 작가보다 감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조셉은 턱을 매만지며 말을 흐렸다.
“곽무당 역은 벌써 다음 미팅을 잡고, 다른 배우를 고려하고 있긴 한데….”
이에, 정새롬 실장은 김진우의 편을 들며 말했다.
“감독님, 연기 한번은 볼 수 있잖아요. 보고 나서 생각하시는 건 어떨까요?”
“흠,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갑을 관계를 떠나서 계약 중인 배우에게 연기를 시켜볼 수는 있으니까.
‘후우….’
새롬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 배우가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지, 사람에 따라 불같이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
‘작가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정형구 배우가 가진 고유 이미지가 있을 텐데.
15년 동안 악역 연기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배우에게.
잠시 후,
대본을 충분히 숙지한 정형구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는 그 순간.
사람들의 걱정과 의문은 단 한마디 대사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 작두 한 번 타야 쓰겄네.”
순간, 조셉 감독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원한다면 죽여드려야지. 칼 가져와라.”
새롬은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며 그의 연기를 감상했다.
무척이나 기가 센 무속인 캐릭터.
뱀처럼 간사하고 사자처럼 흉포한 악당.
작중 가장 친한 지인에게도 사나운 성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악귀를 잘 이용해야 돈을 버는 거야. 알겄냐?”
“아, 네.”
“그럼 고년 모가지 비틀어서 데리고 와라. 살을 날리기도 전에 내가 죽여버릴라니까.”
“네, 네!”
대사를 받아주는 매니저조차 당황할 만큼 연기는 완벽했다.
강렬하게 쏟아내는 눈빛에 여실히 드러나는 악의.
평범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폭력적이고 거칠었다.
“….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
“아….”
오히려 배우보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쉽게 몰입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짝짝, 짝짝짝짝─!
그냥 가볍게 연기를 보여준 회의실에서 나온 기립박수.
조셉 리 감독이 먼저 일어나서 정형구에게 손뼉을 쳤다.
“하하하. 이런 인재를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하네요. 오늘 제가 운이 좋군요.”
“네? 아니, 그런 건….”
“죄송하지만 계약서를 다시 쓰죠. 곽무당 캐릭터로.”
“음….”
매니저는 정형구 배우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무당 캐릭터.
단순한 악역이 아닌,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조커.
“하태성 역은 다시 뽑아야겠군요.”
그 역시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적어도 정형구 배우와 맞는 배역은 아닌 듯 싶다.
다른 어떤 배우를 데려와도 이만큼 잘하긴 어려울 테니까.
‘대체 작가님은 어떻게 아시고….’
정새롬은 새삼 김진우 작가에게서 더 놀랄 점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빌런 역할을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는 멀끔한 이미지.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뜻 제안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어떻게 알고서….’
하필이면 계약 직전에 무례함을 감수해서라도 요구했다는 건.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대체 어떤 근거로….?’
계약 직전에 배경을 바꿀 만큼 확신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이 정도면 그냥 단순히 캐스팅을 잘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 * *
템페스트 엔터 내 작업실.
타닥, 타다닥─
작업실에는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7부 대본은 이 정도면 된 것 같네.”
곧이어, PC 톡으로 효주에게 전송하고 의자를 젖혀 몸을 뉘었다.
빨리 드라마를 끝내고 나서 단편 드라마 대본을 쓸 생각이었으니.
“이제 남은 건….”
마지막회, 8부뿐이구나.
【장소 : 월곡산, 모란꽃 공동묘지 랜덤 지정】
한밤중에 공동묘지 체험이라.
이거 언제 나오나 많이 기대했지.
“월곡산이면 엄청 멀잖아.”
대충 150km는 가야 될 것 같은데.
스마트폰으로 해당 장소를 검색했다.
늦은 밤에 인적이 있을 리는 없고.
“이번에는 누구를 데려가나.”
드르륵─
그때 효주가 들어오며 기분 좋게 인사했다.
“오빠! 캐스팅 잘했다고 난리던데요?”
“뭐리고? 같이 공동묘지 가자고?”
“…. 여보세요?”
갑자기 U턴하려는 효주를 붙잡았다.
“야야, 같이 가자고 안 할게. 돌아와.”
“…. 진짜요?”
“응.”
나도 쫄보랑 가는 거 싫어.
그거 그냥 같이 죽는 길이더라.
“오빠, 정형구 배우님 캐스팅 현장에서 뒤집어 놓으셨다면서요!”
“뭐래.”
“변 팀장님이 그랬어요! 완전 캐스팅의 신이래요!”
“음….”
내가 봐도 정 배우님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이 바닥에서 15년 구른 배우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캐스팅도 마무리 단계고….’
이번 작품의 마지막화 8부 대본은.
“월곡산 공동묘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공동묘지는 오바인 것 같다.
이렇게 고인 모독을 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지.
“그냥 안 가야겠다.”
내가 써야지.
띠링─
그때, 어머니께서 문자를 몇 통 보내셨다.
[아들~ 이번 달에도 이렇게 용돈을 많이 주니까 든든하네~]
[화이팅~ 엄마는 우리 아들 믿어~]
[(이모티콘)]
[(이모티콘)]
[(이모티콘)]
어머니.
이모티콘 쓴다고 젊어 보이는 건 아니에요.
“…. 돈 벌어야지.”
솔직히 나 혼자는 도저히 못 가겠다.
이번에도 채담 찬스를 쓸 수밖에 없는 건가.
스마트폰을 들어 그녀에게 톡을 보낼까 했는데.
“잠깐만.”
또 같이 가면 심장에 무리가 올 것 같아.
족같은 음악 나오는 오르골 또 들고 오면 집어던질 듯.
“차라리 오늘은…. 음.”
그래, 오랜만에 남매간의 우애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원래 그런 건 극한의 상황에서 탄탄해지는 법이거든.
뚜루루루─
곧바로, 쏘블리를 건너뛰고 희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여동생한테 전화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웬일이야? 오빠가 전화를 다 하고.
“희정아, 오디션 붙은 거 축하해.”
-뭔 소리야, 갑자기? 집에서도 충분히 축하해줬잖아.
“그치. 근데 내가 축하 선물을 안 해준 것 같아서.”
-…. 선물?
“응.”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그 누구도 이런 귀한 선물은 못 해줄걸?
* * *
강남의 한 연기학원.
어떤 여인은 오디션을 축하하는 학생들에 둘러싸인 채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네가 잘될 줄 알았다니까!?”
“희정아, 우리 번호가 있던가?”
“우리 오늘 한잔하자.”
평소에 대화 한번 안 해본 아이들이 너도나도 달라붙었으나.
희정은 전혀 싫은 기색 없이 그들의 축하에 감사 인사를 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사라졌을 때쯤.
이진호가 다가와서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했다.
“선배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네가 더 대단하지.”
“에이, 저는 사실상 김 작가님 낙하산이라….”
“이제 촬영도 거의 끝나가는데 아직도 그런 말 하냐. 너는 자심감이 없는 게 탈이야.”
“사실이니까요.”
피식─
희정은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니가 잘 한 거야.”
“음…. 선배 드라마 스케줄은 언제부터 있으세요?”
“한 달 정도 후에.”
“그럼 그동안에는….”
“대본 봐야지.”
“아.”
대본을 보는 내내 희정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작가님도 많이 축하해주셨죠?”
“당연하지. 오늘 오빠가 마싯다 돈까스도 사준다고 했거든. 헤헤.”
“네? 돈까스요?”
“아니, 그냥 돈까스가 아니라 마싯다 돈까스!”
“…. 무슨 차이지.”
“어휴, 라떼는 그거 먹으려고 100미터 줄도 서서 먹었다고.”
희정의 숨겨왔던 꼰대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 초등학생 때 우리 집 근처 맛집이었는데. 그거 이제 먹고 싶어도 못 먹어. 이사가서.”
“아아…. 추억의 음식?”
“응. 어렸을 때 딱 한 번 먹어봤는데, 그 후로 처음이야. 오빠가 어디로 이사갔는지 알아냈대!”
“좋은 오빠네요.”
“맞아. 추억보정 때문인가. 내 기억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
“아하하. 저도 먹고 싶은데요?”
“오늘 먹어보고 그게 얼마나 맛있는지 내가 으른의 시선으로 다시 확인하겠어.”
대략 15년 전, 오빠가 치과에 데려가기 직전에 들렀던 돈까스집.
치과에서의 기억은 두려웠지만, 그날 먹은 돈까스는 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오빠밖에 없네요.”
“뭐, 오늘은 인정.”
* * *
주상 미디어.
새롬은 주상철 대표가 건넨 계약서를 보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이렇게 큰돈을 투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김나연 때 돈맛을 보니까 끊을 수가 없네요.”
“…. 그런가요.”
“음, 너무 저급한 표현이었군요. 사과드리죠.”
“아뇨. 돈 벌려고 일하는 게 맞죠. 제작사든, 투자사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템페스트 엔터는 제작사.
주상 미디어는 투자사.
굳이 말을 꺼내서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 지으려는.
“대표님, 김나연 때 이경윤 배우님 캐스팅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이번에도 작은 도움을 드릴까 하는데….”
“네?”
“아직 남은 캐스팅 자리가 하나 있다고 하던데요.”
“아, 네.”
여주인공 소채담의 아버지 역할.
정형구 배우가 곽무당 역할로 캐스팅되면서 붕 떠버린 배역이었다.
“진국환 배우님 어떠세요?”
“…. 싫을 수가 있나요?”
깐깐한 이미지의 재벌 회장님 전문 배우.
마침 소채담의 아버지와 딱 들어맞는 역할이었다.
‘매번 도움을 받는 건 좋은데….’
분명히 김진우 작가의 다음 작품을 노리고 있을 테니.
주 대표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새롬을 보고 나직하게 불렀다.
“정 실장님.”
“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
“원래 그런 바닥 아닙니까.”
이내, 새롬은 표정을 풀고 마주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죠. 감사합니다.”
“그래요. 다음에 뵙죠.”
“네. 주 대표님.”
오히려 감성에 움직인 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제작사로서 실력을 온전히 증명하는 것.
김진우 작가가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제작자가 해야 할 일이지.’
이상하게 김진우와 관련되면 평소와 달라지는 기분이다.
걱정을 해도 최선을 다 하고 나서 하는 게 맞지 않는가.
김 작가를 만나기 전에는 항상 그렇게 배웠고 살아왔다.
‘한 수 배웠네요. 주 대표님.’
뚜루루루─
새롬은 건물을 나서며 누군가에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새롬 언니?
김진우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언니! 저 희정이요!
“아, 같이 있나 보네?”
-네!
함께 클럽에 간 이후로 종종 연락하는 사이.
얼마 전부터는 말도 편하게 하는 동생이었다.
-언니, 오빠가 맛집 데려가고 있어요!
“그래? 좋은 오빠네.”
-네, 오늘은요! 헤헤.
“그럼 오빠분이랑은 내일 이야기하는 걸로.”
-언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음, 그럼 나는 다음에 같이 갈게.”
-약속했어요!
“그럼.”
뚝.
“…. 가정이 화목하네.”
어떤 집안이랑 다르게.
남과 비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오늘은 그냥 괜히 센치해지는 날이었다.
새롬은 씁쓸한 웃음을 지은 채 템페스트 엔터로 향했다.
* * *
그로부터 약 20분 전.
부르릉─
나는 쑈카에서 렌트한 차를 끌고 희정이를 픽업했다.
약속한 장소에서 희정이를 태우고 가는 길.
여동생은 표정에서부터 들뜬 마음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오빠, 진짜 나 오디션 붙었다고 사주는 거야?”
“그러엄.”
“오빠 다시 봤어.”
“평소에 어땠길래.”
“어떻긴! 쓰레…. 좋은 오빠지!”
“….”
“어쨌든! 마싯다 돈까스를 내 인생에서 다시 먹는 날이 올 줄이야.”
“음, 그래. 내가 잘 알지. 니가 엄청 기대했잖아.”
“응!”
여동생은 슬쩍 네비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돈까스 사준다며.”
“응. 좀만 더 가면 돼.”
“월곡산은 모야?”
“돈까스 맛집 근처야. 멀리도 이사갔더라. 왜…. 귀찮아?”
“아, 아니이…. 누가 귀찮대?”
“우리 어렸을 때 거기 줄 너무 길어서 한 번밖에 못 먹었잖아, 그치?”
“응응! 8살 때 먹었던 게 아직도 기억나.”
“맞아. 거기 엄청 맛있었는데.”
맛이 기억나는 게 아닐걸.
추억이 기억나는 거지.
“빨리 돈까스 먹으러 가자.”
“응. 좋아!”
-목적지까지 150km 남았습니다.
그때, 스마트폰의 네비게이션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앞으로 쭉 고속도로만 타면 되니까 냉큼 네비를 꺼버렸다.
“150킬로미터…. 조, 조금 멀긴 하네.”
“…. 달콤한 과실은 빨리 먹으면 체하는 법이야.”
“그런가?”
“응. 너는 진짜 행복한 거야. 이런 오빠 없다.”
“오케이, 린정! 헤헤.”
내가 오늘 참교육…. 아니, 참으로 좋은 교육 시켜준다.
세상에 이런 오빠가 어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