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8)
“드디어 다 썼다.”
아직 3부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오늘이 가장 여유롭게 쓴 것 같다.
그때, 내가 작업을 마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김 작가님, 새로운 계약서를 들고 왔습니다.”
“누구….”
“정 실장님의 지시로 대신 계약서를 들고 왔습니다.”
주연 캐스팅에 최대한 배려해 준다는 조항과 PPL로 대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조항.
“1차 계약금으로는 2회 분량인 천만 원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아마, 영업일 이틀 이내에 받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직원이 내민 수정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계좌번호를 전달했다.
덕분에, 이제는 정말로 내 작품이 드라마가 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직 캐스팅 과정과 편성 테이블에서의 경쟁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제작까지 흘러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상, 신인작가로서 내가 따낼 수 있는 최선의 계약이었다.
“성공해야겠네요.”
“네?”
“이번 작품 성공하자고요.”
“아, 네! 물론입니다. 작가님.”
곧이어, 3부 대본을 직원의 메일로 발송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만간 감독님과 미팅 잡겠습니다.”
“네. 수고해 주세요.”
나는 템페스트 엔터 사옥을 벗어나기 전에 임시출입증을 반납했다.
대신, 당당하게 영구출입증을 발급받았다.
심지어, 나오는 길에 떡대 형님에게 반갑게 인사까지 했으니.
들어올 때와 나올 때의 입장이 극과 극이었다.
“계약이 잘 돼서 다행이야.”
이 기쁜 소식을 네 명뿐인 가족의 단톡방에 공유했다.
쓸모없는 여동생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께.
[김진우 : 저 16부작 계약했어요. 아마 조만간 드라마 찍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깔끔하게 읽씹 하셨지만, 어머니는 바로 답장을 해 주셨다.
띠링─
[엄마 : 우리 아들 화이팅! 엄만 우리 아들 믿어 ^^]
“…. 안 믿으시는구나.”
사실을 말해도 반응이 시원치 않을 걸 보면.
나는 그동안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지른 건가.
띠링─
곧바로, 동생의 톡이 이어졌다.
[희정 : 도랐네 ㅡㅡ 니가 사기당할 나이야?]
“아오, 이런 걸 동생이라고….!”
여윽시 친남매 간에 위로는 낭비요, 동정은 사치로다.
극단에서 욕먹는 거 보고 오늘만은 잘해주려고 했건만.
[김진우 : ㅗㅗㅗ]
[김진우 : 아 실수 ㅎㅎ]
[희정 :ㅂㅅㅅㄲ]
작은 실수도 사과하는 모습과, 이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배려심.
따뜻한 집에서 가정교육을 워낙에 엄격히 받았기에 우애가 남다르다.
같은 날 저녁, 희정은 계약서를 보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
“거짓말!!!!”
“그래.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야.”
희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혼잣말을 지껄였다.
“우리…. 우리 성호 오빠가 하필이면 니 새끼 작품을…..!”
“그 새끼가 니 오빠야. 지성호는 남의 새끼고.”
“우리 오빠한테 새끼라고 하지 마!”
“우리 오빠? 니가 말하는 우리 오빠가 니 친오빠냐, 아니면 성호 오빠냐?”
“당연히 성호 오빠지, 이 새끼야!”
역시, 우리 희정이가 버르장머리는 없어도 사람은 착하다.
남의 집 자식을 친오빠보다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씨라니.
“됐고. 나는 그만 대본 수정하러….”
“자, 잠깐만! 지성호 사인 좀! 그럼 믿어줄게.”
마음은 따뜻하지만 양심은 없네.
“흠, 오케이! 오빠가 돼서 그 정도는…. 5만 원.”
“응?”
극단에서 일도 있고 해서 웬만하면 편의를 봐줄 생각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피치 못할 고육지책이었다.
“사인은 5만 원. 김희정 힘내라고 영상 편지 녹화해주면 10만 원.”
“아오, 이런 걸 오빠라고….!”
“니 오빠는 지성호고.”
“…. 10만 원짜리로 부탁할게.”
“예. 호갱-, 아니, 고갱님.”
성공적인 딜교. 이게 창조경제지.
임재준 번호를 5만 원에 샀는데 나는 지성호를 10만 원에 팔았으니까 개이득.
우리 희정이, 극단에서 욕먹고 기분 나쁜 거 있었으면 유료 서비스로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띠링─
그때,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내용을 보아하니 보이스 피싱보다 악질이었다.
[ 퍼플걸스 세미예요.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장난 문자도 정도가 있지.”
감히 내 첫사랑을 모욕하다니.
차라리 방송국 직원이라고 구라쳤으면 손모가지 하나로 용서해 줬을 텐데.
이내, 걸그룹 사칭범에게 법의 지엄함을 알려줄 요량으로 통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세미면 아이 엠 샘이다.”
-…. 작가님 맞으시죠?
좆됐다. 목소리가 익숙하다.
나의 세미와 매우 흡사하다.
“…. 라는 대사를 넣고 싶은데. 심의에 통과하기는 어렵겠죠?”
-방금 세미라고….
“그래요. 주인공 이름을 세미로 바꿀까 고민 중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이걸 믿어?
-작가님, 혹시 뵐 수 있을까요?
“진짜 그 퍼플걸스의 세미 님….?”
-네. 맞아요. 헤헤.
작가하기를 참 잘했다.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시간은 언제쯤….”
-저는 내일 점심쯤 시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디서 뵐까요?”
-제가 찾아갈게요. 작가님.
“어휴, 제가 가야죠. 배우님.”
이분이 정녕 내가 아는 세미라면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띵동─
머리에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다음 집필 장소가 결정되었다.
【내용 : 재벌 상속자는 순정마초 4부】
【장르 : 로맨스, 재벌】
【장소 : 레인보우 엔터테인먼트 사옥 1층 로비】
【제한 시간 : 24시간】
【※ 브론즈 승급 : 110-110101-1011(가상 계좌, W Bank)】
【※ 입금 금액 : 0원 / 1,000만 원】
“레인보우 엔터면…. 퍼플걸스 소속사잖아.”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여유롭게 시간이 책정되었다.
의문이 들긴 했지만, 시간이 많아서 나쁠 건 하나도 없었으니.
곧이어, 나는 세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미 씨, 제가 내일 점심쯤에 레인보우 사옥으로 가겠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이 능력이 발현된 것도 세미를 보고 나서부터였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와 레인보우 엔터에서 만날 운명이었을지도.
“역시, 장소는 랜덤이 절대 아니야.”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퍼플걸스 매니저의 배려로 손쉽게 엔터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세미 님이 미리미리 언질을 해 둔 모양이었다.
“우리 세미 씨는 마음씨도 착하네.”
나는 4부 집필을 위해 일부러 두 시간 정도 일찍 왔는데.
어차피 세미도 약속 시간 보다 2시간 정도 먼저 선약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빛무리를 발견하고 보니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 참, 이건 진짜 선 넘었네.”
그동안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변수였다.
하늘에 둥둥 떠서 머리에 닿을락 말락 하는 빛무리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과 비교하면 그동안 시스템은 참 작가 편의적인 능력이었던 것 같다.
“일어서서 쓰라는 건데…. 이래서 시간을 많이 줬구나?”
당연히 노트북을 이용할 수 없는 높이였으니.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대본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남의 회사 로비에 2m 높이 의자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핸드폰으로 대본 집필을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는 건 자명한 일.
“오히려 시간이 빠듯하잖아.”
나는 서둘러 대본 폰 대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둥둥 떠 있는 빛이 서서히 머리에 스며들면서 천천히 기억을 주입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시스템이 참 도움을 안 준다.
“고작 4화만에 헬기씬이라….”
메인 남주가 위험에 처한 여주 앞에 멋있게 등장하는 장면.
상황상 헬기씬이 어색하거나 돈지랄 느낌은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이걸 그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이민주 작가가 언제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작가와 감독이 제작비까지 신경 쓰면서 드라마를 찍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물론, 신인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일단 그대로 옮기고 나중에 수정하던가 해야지.”
멜로 드라마에서 헬기를 띄운다고 하면, 방송국이나 제작사 측에서 좋아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조차도 확신이 없어서 조금 불안했다.
아직까진 시스템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할까.
6년차 보조 작가로서, 객관적으로 상당히 좋은 대본임에는 확실하지만.
아무리 완성도가 뛰어나도 제작 편성을 못 받는 대본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공모전에 쏟아지는 수백 개의 작품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때였다.
“진우 오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응? 니가 여기서 왜 나와.”
“오빠, 잘 지냈어? 고작 며칠이긴 하지만….”
“황효주. 너야말로 잘 지냈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다.
이민주 작가의 작업실에서 고된 노동을 공유한 전우.
한 달도 못 버티고 도망가는 나약한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반년 동안 버틴 것만으로도 그녀의 근성을 인정하기에는 충분했다.
안경만 벗으면 충분히 예쁜 외모였는데.
안 본 며칠 사이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주먹만 한 다크서클이 양쪽에 자리 잡았다.
“효주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그게…. 사실은 퍼플걸스 카메오 출연 건으로 들렀는데.”
“아, 메인댄서분 맞지? 재은씨.”
“아니. 멤버 전원.”
“…. 뭐?”
머리에 둔기를 크게 맞은 기분이었다.
멤버 전원이라는 건 당연히 세미를 포함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오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나도 오늘 알았어. 이번 작품에서 오빠 공동 집필에서 뺀 사람.”
“….”
“이민주 작가님을 부추긴 사람이 따로 있다고! 바로, 오현식….”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어이, 김진우─! 여기서 다 보네?”
저 멀리, 레인보우 엔터 사옥 입구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오현식.
“…. 말해줘서 고맙다. 효주야.”
“고맙긴.”
“대신 나중에 성공하면 보조 작가로 써 줄게. 연봉 두 배 쳐서.”
“에휴,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옛 후배를 삐딱한 눈으로 응시했다.
‘오현식, 저 새끼….’
그동안 조금 쎄한 느낌은 있었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만 치부했다.
나이도 동갑이겠다, 그냥 연차가 쌓여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줬을 뿐인데.
효주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오현식의 말과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다 같이 붙어서 글을 썼는데도 그동안 뒤로는 구린 짓을 하고 다녔구나.
천천히 다가오는 오현식의 뒤편으로, 요정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함께 다가왔다.
세미를 포함한, 퍼플걸스 멤버 다섯 명이 전부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간 채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다가오는 오현식.
‘그럼, 세미가 내 앞에 스케줄이 있다고 말했던 게….’
오늘은 안 그래도 시스템이 말썽을 많이 부려서 피곤했는데.
어제와는 달리, 참 안 좋은 쪽으로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터벅, 터벅─
“진우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쩐 일이고.”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친근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썩 가식적이었다.
묘하게 거슬렸던 어색함을 마침내 발견한 기분이랄까.
“볼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어, 그래에? 나는 보다시피 조금 바쁘네. 나중에 술 한잔 사 줘.”
“이런 씨….”
“응?”
“아니다. 그래, 다음에 꼭 보자.”
퍼플걸스 멤버들은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누군지 파악하려는 표정이었다.
그중, 세미와 눈을 마주치고 내가 누군지 말을 해야 하나 골똘히 고민했다.
어차피 잠시 후에 다시 보게 될 텐데, 굳이 지금 말을 해서 곤란하게 해야 할까.
이어지는 오현식의 행동은 내 고민을 덜어주었다.
“멤버분들, 이쪽은 저희 작업실에서 함께 일했던….”
“김진우라고 합니다. 세미 씨.”
나는 굳이 한 사람을 호명하며 이름을 밝혔다.
깜짝 놀란 표정의 퍼플걸스 멤버들, 그리고 오현식.
이내, 세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반갑게 인사했다.
“꼭 뵙고 싶었어요. 작가님. 빨리 오셨네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음, 그럼….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헤헤.”
세미의 말에 오현식은 화들짝 놀란 채 입을 열었다.
“저, 저희 지금 바로 컨셉 회의….”
“저는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니, 무슨….”
곧이어, 세미는 내 옷깃을 붙잡고 사옥 내에 있는 어느 빈 휴게실로 향했다.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오현식의 표정은 오래된 달걀처럼 썩어있었다.
“세미 씨, 이래도 돼요?”
“그럼요. 매니저 오빠도 허락했는걸요.”
원래도 아름다운 세미인데, 현실에서는 그야말로 여신처럼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