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Artist's Random Studio RAW novel - Chapter (91)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여유로운 걸음으로 경복궁을 돌아다녔다.
‘실장님, 진짜 대단하네.’
정 실장님은 대체 언제 다큐 대본까지 다 외운 걸까.
유창한 영어로 맥스 감독에게 순서대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여기는 강녕전이라는 곳이에요.”
“오, 강념?”
“왕이 거처하던 곳이랍니다.”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오디오로 끼어들 껀덕지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정 실장님은 일부러 챙겨주려고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작가님?”
“네?”
“감독님이 다음 드라마는 어떤 내용이냐고 여쭤보시네요.”
“아하.”
챙겨주는 게 아니었구나.
“조선과 일본의 국운을 걸 액션 사극 비주얼 워페어!”
“???”
“임진왜란이요.”
순간, 정 실장님은 1초 정도 표정을 찌푸리고 간신히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말이 웃는 얼굴이지, 이를 악물고 하는 질문은….
“…. 제작사랑 협의는 된 거죠?”
“아, 아마도? 방금 전에?”
“….”
그러고 보니까 사극이라고만 말했었구나.
‘방송 중이 아니었으면 발차기 한 대 맞았을 듯.’
슬쩍 PD들 표정을 보니 어찌나 해맑은지.
좋은 그림이 많이도 나온 모양이다.
잠시 후.
쉬는 시간에 맥스 감독과 사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작가님, 맥스 감독님이 감탄하셨대요.”
“네?”
“사극 드라마를 쓸 때 역사적인 건축물에서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정 실장님이 통역을 해주며 말을 이었다.
“시놉시스도 안 읽어보고 바로 거절해서 미안하다고.”
“에….?”
“괜찮으시면 다시 검토해 보겠다고 하시네요.”
나는 3초간 정 실장님과 눈을 마주했다.
“시나리오…. 가져오셨어요?”
“당연하죠!”
통으로 번역된 시나리오를 보고 깜짝 놀라는 맥스 감독님.
아마, 간단하게 시놉시스만 읽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 고생한 보람이 있네.’
* * *
생각지도 못한 맥스 음악감독과의 촬영 이후.
정새롬 실장은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변 팀장님, 누구라고요?”
“밍쁨이라는 분이…. 지금 사옥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밍쁨, 밍쁨….?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 TVM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자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얼마 전 김진우 작가가 지원한 단막극 공모전의 최우수상 수상자.
‘음….’
변 팀장은 새롬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존경하는 작가의 밑에서 많이 배우고 싶으시다고….”
“김진우 작가님 밑에서요?”
“네.”
“그렇단 말이죠.”
그러고 보면 황효주 작가도 이제 단막극 촬영까지 겹쳤으니.
‘…. 혹시 사극까지 들어가면 더 바빠지겠지.’
이제 김진우 작가도 슬슬 보조 작가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자료조사도 없이 사극 대본을 혼자서 쓰는 괴물이지만.
“저기, 실장님.”
“네.”
“밍쁨이라는 분은 원래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 아닙니다.”
“네? 그럼….”
“모 사이트 베스트 도전 웹툰 작가의 필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여기 보시면, 보조 작가 겸 콘티 작가로 지원했습니다.”
“아….”
변혁주 팀장은 새롬에게 밍쁨의 포트폴리오를 전달했다.
또한, 스마트폰으로 초록색 사이트 베도 웹툰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어쩐지….’
드라마 작가치고 필명으로 자기소개하는 경우는 처음 봤다.
단순한 그림 작가는 흔하지만, 드라마 작가를 겸업하는 콘티 작가는.
“귀한 인재를 얻었네요.”
줄여서 귀인이라고 부른다.
* * *
한동안 작업실에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시스템이 추가로 사극 대본을 뿌려주지 않았음에도 꽤나 바쁜 나날들이었다.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
특히 CG 범벅의 영화 제작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효주야, 오늘은 촬영 없어?”
웬일인지 작업실에 오랜만에 얼굴을 비췄다.
본인 단막극 드라마 제작 때문에 엄청 바쁘더니만.
“네, 오빠. 오늘은 촬영 없어요.”
스윽─
슬쩍 고개를 돌려 화이트보드의 일정표를 확인했다.
「코리안 호러 스트리머」 촬영.
마법소녀 프리 프로덕션 스케줄.
사극 대본 집필 및 MBS 다큐멘터리.
효주의 단막극, 「로맨스가 너무해」 제작.
한눈에 봐도 업무량이 빼곡히 들어섰다.
하와이 갈 때까지만 해도 널널한 편이었는데.
“우리 언제 이렇게 바빠졌냐.”
“음, 그래도 실장님이 보조 작가 충원해 주신다고 했으니까요.”
“그게 오늘이랬나?”
“네!”
“…. 제발 정상인.”
“???”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에는 시스템이 눈치라는 게 생겼다는 점.
내가 영화 제작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대본을 천천히 꺼내어 준다.
‘이 친구, 이제 나랑 좀 친해진 듯.’
그 밖에 스마트폰에 적힌 다른 스케줄을 훑어봤는데.
이것도 일정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저녁 6시…. 벌써 첫 방송 나가네. 그 다큐.”
“와우, 시간 빠르네요.”
“그것도 그렇고, 편성을 빨리 잡은 것 같아.”
뭐가 그리 급한 건지.
정새롬 실장님이랑 맥스 감독님과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
폰으로 MBS 다큐팀에서 보내준 타이틀 표지를 확인했다.
우리 실장님은 카메라빨 대충 받아도 예쁘고, 맥스 감독님은 멋있게 나이 먹은 노신사인데.
‘…. 왜 나만 쭈구리야?’
여튼, 생각해 보니까 맥 감독님도 시나리오 받은 지 좀 지났는데 반응이 없고.
헤븐 뮤직에 연락해도 며칠만 더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답변이 왔으니.
“맥스 감독님, 거절하시려나?”
“음….”
거장급 감독님도 대본만 보면 무조건 오케이할 거라던 효주였으니.
“갑자기 말이 없어졌네?”
“마법소녀는 원래 좀 취향 타잖아요.”
“….”
똑, 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김 작가, 신병 받아라!”
“???”
어이없는 말과 함께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희정이.
여동생과 함께 온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는 입을 틀어막고 말했다.
“와아…. 세상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 밍쁨?”
“엥? 저를 기억하세요!?”
“네. 그야, 당연히….”
함께 공모전 상위권에 오른 작가니까.
작품명이 「멜로디를 만들어 주세요」 였던가.
“대박! 감동! 실화!?”
“….”
제발 정상인.
“김진우 작가님! 완전 팬이에요!”
“…. 보조 작가분?”
“네! 밍쁨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니까, 진짜 이름이….”
아니, 됐다.
그냥 포기할래.
“밍쁨 씨, 말 편하게 할게요.”
“네! 작가님!!!”
“팬심으로 같이 일하는 게 좋은 건 아닌데….”
“앗, 그럼 팬 아닌 척 할게요!”
“….”
제발 정상인.
효주가 예쁘장한 3, 4학년의 여대생 이미지라면.
밍쁨은 갓 대학에 입학한 귀염상의 새내기 느낌.
“존경하는 작가님이랑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말로만 듣던 성공한 덕후네요. 헤헤.”
“그 정도까진….”
“사실, 제가 원래는 웹툰 작가였는데. 작가님 대본 보고 드라마 작가의 꿈을 키운 거니까요!”
“웹툰 작가?”
“네! 초록창 베스트 도전에서 이웃집 도토리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뜻밖에도 밍쁨의 말에 반응한 건 희정이었다.
“헐!? 설마 네이바 목요일에 올라오던?”
“그, 그걸 보셨어요?”
“당연하죠! 댓글에 누가 한국대 미대 나오셨다고 하시던데!? 참트루?”
“…. 어떻게 아셨지.”
“와우, 제가 네이바 베도 작품 거의 다 봐서 알아요.”
희정아, 시간이 남아 도냐?
네이바 베도 작가면 충분히 가능성 있을 텐데 굳이 왜 드라마 보조 작가를.
아니지, 공모전 최우수상 입상한 것만으로도 나쁜 커리어가 절대 아닌데.
“김진우 작가님 밑에서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음…. 그래.”
“저는 콘티 작업 위주로 백업할 예정입니다.”
“콘티 경험은 있고?”
“네! 보조 작가 생활하면서 콘티도 그려봤습니다! 여기 포트폴리오….”
“아니, 안 보여줘도 돼.”
정 실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뽑으셨겠지.
공부, 미술, 대본 집필까지 다재다능한 만렙 재능러.
그런 사람이 열성팬이라고 하니까 살짝 부담된다.
“잘 부탁드립니다!”
재능 낭비 오지네.
* * *
한편, 미국으로 돌아간 맥스 감독.
그는 나름대로 연락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허허…. 악상이 왜 자꾸 떠오르지?”
평소와 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김진우 작가의 대본을 읽었을 뿐.
그리 오래 살아온 건 아니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냥, 대본을 읽으니까 자연스럽게 악상이 떠오른다.
“…. 머릿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인가.”
마법소녀가 운용하는 거대한 스케일의 공간 마법.
변종 티라노의 아가리에서 뿜어진 지옥불에 녹아내리는 기간트.
수백 미터 크기의 탑승 로봇이 거검을 휘둘러 공룡의 머리를 단칼에 잘라내는 장면.
이제는 그냥 순수하게 대본을 읽고 싶었지만.
서너 장쯤 읽을 때쯤 다시 웅장한 피아노 변주곡이 번뜩였다.
“아니, 또….? 하아….”
음악인으로서, 이걸 싫어할 수도 없고.
시나리오의 한 장면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떠돌아다녔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테니 어쩔 수 없이 셀프 수감생활을 할 수밖에.
똑, 똑─
음악 작업 중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 회사 직원이 노크를 두드렸다.
“저기, 선생님.”
“…. 뭐지?”
맥스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응했다.
음악 작업에 방해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잘 알 텐데.
“그, 벌써 나흘째라서요. 물만 마시고 음식은 아무것도 안 드셔서….”
“아,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군.”
“….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끼이익─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으니.
이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와 함께 극도의 허기가 밀려왔다.
“흠, 악마의 재능이로구나.”
이거, 골방에서 음악 작업하다가 굶어 죽을 뻔했네.
“허허허.”
맥스는 진우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스마트폰을 들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톡, 토톡─
[디지니 플레이 측에 연락해]
[작품 같이 하겠다고]
* * *
사전제작 단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는 콘티 작업.
특히, CG가 많은 작품일수록 콘티 작업의 중요도는 올라간다.
CG로 채워질 초록색 배경에서, 자신이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모르는 배우들의 길잡이 역할이 되어줄 테니.
‘열심히 일하네.’
내가 도착했을 때, 두 명은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출근하자마자 업무가 쏟아지는 밍쁨.
그리고, MBS 퇴사하고 이번 영화 조연출로 뽑힌 나지수.
두 명은 내게 인사를 하고 다시 작업을 진행했다.
“나지수 감독님, 그림 잘 그리시네요?”
“아하하. 네이바 베도 작가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까 민망하네요.”
“에이, 웹툰으로 성공한 것도 아닌데요.”
민망한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하는 밍쁨이.
왜 땡그랗고 커다란 안경을 써서 스스로 외모 너프를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김진우 작가님도 그림을 잘 그리시는 줄은 몰랐네요?”
“…. 그냥 평범한 정도 아닌가?”
“음, 전문가랑 비교하면 좀 그렇고…. 일반인 중에는 1티어!”
“좋은데?”
시스템이 글뿐만 아니라 그림의 표현력도 올려줬기에.
게다가, 눈으로 보고 그리는 것보다 머릿속에 ‘고정된’ 기억을 토대로 그리는 게 더 쉽다.
서로 짜온 콘티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밍쁨과 나지수.
특히, 내가 그려놓은 일러스트를 토대로 작업에 몰두했다.
특히, 오늘 처음 내 대본을 확인한 밍쁨은 칭찬이 헤픈 편이었다.
“김진우 작가님, 그림도 잘 그리고 대본도 잘 쓰고 얼굴도….”
“….?”
뭐지, 왜 말을 하다 말아.
“우리 작가님, 완전 대본도 잘 쓰시고….!”
그만해. 그거는 방금 말했어.
“…. 빨리 밑그림부터 그리자.”
“넵!”
주로 나지수 조감독이 연출적인 부분을 언급하면 밍쁨이 빠르게 데생하는 식이었다.
단순 그림 실력뿐만 아니라 순발력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웬만한 조단역 배우 캐스팅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단계.
CG 떡칠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콘티 작업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어후, 실력이 장난이 아니구나.’
확실히, 한국대 미대생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냥 연필이 지나가면 사람이 되고 배경이 되고 사물이 된다.
“…. 그림 진짜 잘 그리네.”
“헐, 저 지금 김진우 작가님께 칭찬받은 거?”
“응? 그야….”
“SNS에 자랑해야지!”
그거 아니야. 하지 마.
‘…. 벌써 올렸냐.’
팔로워는 또 무슨 몇천 명이야.
웹툰 작가, 밍쁨이라는 계정으로.
“저기, 집에서 완성하고 바로 구성락 디렉터님께 보내면 될까요?”
“그래.”
“오오! 저를 그렇게까지 믿어 주시는 거예요?”
“…. 유도질문 하지 마.”
“넵.”
그림을 보고 단순한 3D 영상으로 만드는 ‘프리 비주얼’ 작업은 구성락의 몫.
아마 한동안은 콘티와 프리 비주얼,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게 될 것 같다.
지이이잉─
그때, 정 실장님께 연락이 왔다.
“여보새롬.”
-…. 그거 하지 마요.
“시무룩.”
-…. 그냥 해요.
“굿굿.”
스마트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내가 밍쁨한테 한 소리 한 거 그대로 돌려받은 느낌인데.
“어쩐 일로 연락하셨어요?”
-오늘이잖아요. 다큐 방송.
“아하, 글 쓰러 어디까지 가봤니!?”
-네. 그거. 괜찮으시면 제 집무실에서 같이 모니터링하실래요?
“엥? 4층 플레이 그라운드 아니고?”
-…. 제가 출연하니까 도저히 직원들이랑은 같이 못 보겠네요.
“저는 좋아요.”
-그럼 이따 뵙죠.
“갈 때 팝콘 사 갈게요.”
-음…. 네. 뭐, 편하신 대로.
뚝.
“…. 이거 뭐지.”
단둘이 티비를 보는 건 처음이네?
이거 혹시 그린라이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