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hitter hides fastball RAW novel - Chapter (193)
천재 타자가 강속구를 숨김-195화(195/385)
잔말 말고 타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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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용 선배가 내게 말했다.
“건우야. 누가 나보고 대충 빨리 던지고 끝내란다. 내일 너 던지는 거 보고 싶다고.”
대충 던지란 말 만큼 모욕적인 말이 선발 투수에게 어딨겠는가. 그것도, 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거기에다가 선발 투수들은 불펜 투수로 자리를 옮겨야 할 때, 쫓겨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도 조금 그랬다.
6년간 86승을 거둔 선발 투수였는데.
부상 때문이긴 했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그해, 나는 평균자책점 4.09에 9승으로 커리어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타율도 2할 중반에 머무르고 홈런은 13개였던가.
마무리 투수로 투타 겸업을 하면서 재기하긴 했지만. 2시즌 뒤 투수를 그만두고 타자에만 전념했었다.
아무튼.
나는 순간 욱하는 감정을 짓누르고 물었다.
“예? 누가요?”
베테랑답게, 여유롭게.
오랜만의 선발 등판인데도 꽤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와이프가.”
조금 진지하게 대답했다면,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해요?’라고 말할 뻔했다.
김정용 선배가 싱글벙글 웃으며 덧붙였다.
“그만큼 기대가 많다는 뜻이지. 건우야. 난 개인적으로 너한테 정말 고맙다.”
“저한테요? 왜요?”
“전에도 비슷한 말 한 거 같은데…야구하는거 재밌게 만들어줘서 고맙다. 좀 오글거리네. 난 이제 준비하러 가 봐야겠다.”
김정용 선배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이 따지면 회귀한 내 생을 합치면 지금의 김정용 선배보다 경험도 많고 오래 살았는데, 내가 저 나이일 때 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 같다.
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항상 그런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준비하고 있지만 불펜과 선발은 다르다. 불펜 투수로 활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선발로 뛸 때 무조건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로 생각하기는 힘들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메이저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할 때 힘으로 짓누르기만 하는 타입이었다.
따지고 보면 한국 나이로 28살 때까지만 투수를 했었다. 좀 더 농익은 플레이를 하기엔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발로 계속 뛰었다면 조금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 가며 능숙한 피칭을 했을지도 모른다. 투수를 그만두고 타자에만 집중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전에서 어떻게 던지는지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지만,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던지면 더 좋을지에 대한 데이터는 충분하다. 9이닝 동안 힘을 분배하며 던지는 방법도.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는 이렇게 던졌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하곤 했으니.
그래. 살다 보니 유리 덕분에 이런 경험을 또 하네.
어쨌거나.
김정용 선배는 완벽하게 좋을 때의 모습은 아니었다.
불펜에서 오래 던진 건 아니지만 리듬을 되찾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1회에 2점을 내줬고, 조준이 형은 적시타를 치고 1루에서 포효했다.
매 이닝 선두 타자를 내보냈다. 하지만 병살을 네 번이나 유도하며 실점을 최소화했다. 100% 좋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별명 값을 하려는지 6이닝을 가득 채우며 3실점.
퀄리티 스타트.
6회를 끝냈을 때 김정용 선배는 투구 수가 백 개를 넘겼고 꽤 힘들어 보였지만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마지막 등판 때 표정은 어땠더라.
선발 투수로 끝났을 때, 저런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재밌는 일이다. 내심, KBO가 MLB에 비하면 확연히 수준이 떨어지니 뭘 어떻게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근데, 여기서도 배울 것은 있다.
아니, 많다.
그리고 꽤 즐겁기도 하고.
어떤가. 정제되고 연마된 높은 수준의 야구도 매력이 있지만, 여기서 하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엉망진창인 야구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열린 시야는 필요하지만.
-정조준 : 마 강건우 봤나
-정조준 : 쫄리면 그냥 내일 못 하겠다고 해라
조준이 형은 우리 불펜의 신인 투수 이병준에게 3점 홈런을 때려내며 이 경기를 파이러츠의 승리로 이끌었다.
사실, 저렇게 자신감 있는 게 야구 선수로는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못 믿으면 성과를 내기 힘들다. 자기를 못 믿으니까 계속 접근법을 바꾸고 그러다가 메커니즘이 와르르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거나 돌아오기 힘들어진다.
변화를 주려면 저렇게 자신 있게 해야 한다. 조준이 형은 레그 킥 동작을 크게 하고 테이크 백 거리를 늘린 데다가 스윙 시작 시점을 앞당겼다.
강하고 빠른 타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변화다. 히팅 포인트도 예년보다 앞에서 형성된다.
아마, 내가 작년에 홈런 52개를 때려내며 자신이 묻혔다고 생각해서 홈런을 끌어올리려고 한 것 같긴 하다.
이틀간 국민성에게 제구의 중요성을, 김정용 선배에게 즐기는 방법을, 조준이 형에게 나 자신을 믿는 법을 배웠다면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나 : ㅇㅋ
-나 : 비밀인데
-나 : 내일 걍 유격수로 나갈 거 같음
-정조준 : ?
-정조준 : 이새끼 진짜 쫄았네ㅎ
뭐, 그렇게 생각하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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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스 강건우, 선발 투수로 첫 경기 나서다.] [휴 브레드먼 오션스 감독, ‘야구장이 체스판이라면 갱(강건우)은 퀸.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뭐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감독에게 꿈과 같은 선수다.’] [파이러츠 서창원 감독, ‘재밌는 경기가 될 것 같다. 우리 선수들이 어제의 기세를 이어나가 주기를 기대한다.’] [정유리 오션스 인턴 스포츠 과학자, ‘준비는 다 됐습니다. (강)건우는 잘할 거예요. 이 등판을 위해 엄청 준비 많이 했거든요.’]└유리 누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ㅋㅋㅋ출장 정지 먹을때 마다 강건우 개조함 ㅋㅋㅋㅋ
└매드 사이언티스트 ㅋㅋㅋㅋㅋㅋ
└전에 출장정지 먹고 갑자기 마무리로 등판시키더니 이제 ㅋㅋㅋㅋㅋ
└한 번 더 출장 정지 먹으면 이제 뭐 함?
└유리 누나 경기만 보러 와도 홈런 치고 난린데 이번엔 뭔 짓을 했을까?
└야 가서 완봉하고와 하면 걍 완봉할듯
└사실 강건우는 별 거 아니고 유리 누나가 본체 아닐까?
└ㄹㅇㅋㅋ
[강건우, ‘우승하면 유리 누나랑 결혼하기로 했거든요. 유리 누나가 결혼하고 싶으면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요.’]└이건 못참지
└결혼 버프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게…준비?
└그럼 열심히 해야지
└하지마라…
└뭘 하지마 십새끼야
[파이러츠 외야수 정조준, ‘강건우가 위장 선발일 수도 있다.’]└뭐래는거야 이새끼는 또
└좆준아…
└인터뷰 보니 강건우 선발 등판 안 할거라 생각하는거 같은데 ㅋㅋㅋ
└강건우 만나서 개털릴까봐 정신승리중?
└조하다 추준아…
[오션스, 일요일 경기 맞아 ‘팬 페스티벌’ 개최. 입장 관중에게 강건우 응원 타올 증정.] [강건우 유니폼 입고 경기장 찾는 관중에게 강건우 버블 헤드 무료 증정.] [사직 야구장은 지금. ‘암표 구하기 전쟁’] [(이용길의 야구 회로) 선발 투수 강건우, 2029 코리안 시리즈의 최대 변수.]└아직 5월인데 왜 코시 이야기해요 아저씨…
└꼴용길 설레발 수준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틀린말은 아님
└ㄹㅇ임 호세 킹 이훈 불펜으로 돌리고 민승기 강건우 앤디 우주민성? 오우쉣;;;;
└마무리는 누가 하냐
└마무리가 왜 필요함 넷이서 4경기 연속 완봉 하고 우승 확정인데
└와 야잘알;;;
└시발ㅋㅋㅋㅋㅋㅋㅋ꼴빠새끼들 제대로 맛갔네
└호세 킹이 마무리 해도 괜찮지 않냐? 160 던지는 강속구 좌완 ㄷㄷㄷㄷㄷㄷㄷㄷ
└그새끼는 제구부터 어케 좀…
└제구고 지랄이고 암튼 너넨 뒤졌다
└누구 뒤짐?
└몰라 암튼 다 뒤짐 아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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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우의 첫 선발 등판일.
야구장 밖에서는 어떻게든 티켓을 구하려는 팬들로 난리가 났다.
암표를 막기 위한 경찰들이 대거 투입되었지만 어떻게든 거래는 이루어진다. 포스트시즌을 방불케 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티켓 실명제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직 야구장의 정원은 24,500명.
부산 오션스 구단 측에서는 티켓 매진을 발표했고, 몇 명이나 경기장에 들어왔는지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기를 꼭 봐야겠다고 재입장 창구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마치 지정 좌석제가 시행되지 않을 때의 그 혼란스러운 모습이 재현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무튼, 흥행 하나는 대박이었다.
꺼져가던 KBO의 인기를 되살린 일등 공신이 강건우다. 신인 유격수가 타격과 수비 등의 퍼포먼스에서 미친 활약을 보여준 것도 모자라 160km/h가 넘는 강속구를 펑펑 뿌려댔고,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이끌었다.
다른 선수들도 활약했지만, 강건우만큼의 활약을 보여준 이는 절대 없었다.
야구 팬이 아닌 사람들도 강건우 때문에 KBO를 보기 시작한 경우가 많다. 지역 연고제 스포츠인 야구에서 연고지와 아무 관계 없이 팬층을 끌어올 수 있는 선수다. 오션스 팬들뿐만 아니라 다른 팀 팬들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물론, 오늘 선발 투수 강건우를 내세운 오션스와 상대해야 하는 파이러츠 팬들은 불만이 있었다.
[시발 왜 하필 우리임]└진심 오션스 개새끼들 왜 하필 우리냐고
└왜긴 왜야 출장정지 딱 풀리는 날이 이 날이니까 ㅋㅋㅋㅋ
└내가 보기엔 백퍼 오션스 시발롬들이 우리 저격한거임
└공개처형 좆같네
└강건우 개바를수도 있는데 왜 다들 선지랄임?
└못 바르면 어쩔거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난 강건우가 못 하는 모습이 상상도 안 가는데 나만 그럼???
└그래서 더 족같다…
오션스 팬들은 상대가 파이러츠라서 더 기대하고 있었다. 강건우 등장 이전에는 압도적으로 밀렸지만, 이제는 그때의 오션스가 아니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팀인 데다가 기존 오션스 팬들이 파이러츠 창단 시 많이 넘어갔었기에 일종의 라이벌 감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강-건-우우우우! 강-건-우! 강건우! 오션스 강건우!”
“갱! 건! 우!”
“건우야! 유리 누나 엄마가 완봉 안 하면 유리 누나 못 준단다!”
“강건우! 강건우! 강건우!”
“건우야! 결혼해야 안 되긋나! 알제!”
“강건우 승리하리라!”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야구와 아무 관계 없고 관심 없는 사람이 봤다면 광기 어린 사이비 종교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강건우를 찾았다. 그리고 전광판에 띄워진 라인업을 보고 열광했다.
1번 타자 중견수 서창열.
2번 타자 우익수 배영한.
3번 타자 선발 투수 강건우.
4번 타자 1루수 이시욱.
5번 타자 2루수 노경우.
6번 타자 3루수 황석규.
7번 타자 포수 박의현.
8번 타자 좌익수 유준.
9번 타자 유격수 정예성.
지명 타자를 포기하고서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다. 물론 울프팩과 양대근이 복귀한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타선에서 어디 한 군데 구멍이 나고 오늘 이 경기에서 충분한 성과를 낸다면 앞으로도 종종 이런 경기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오션스의 모든 관계자가 강건우를 바라보고 있다. 기자가 강건우를 찾으려 했지만 감독이 직접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유리는 강건우를 마지막으로 점검했고, 론버거 킨은 강건우와 직접 파이러츠 타자들의 접근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의현이 소리쳤다.
“야구 천재 강건우! 잘 부탁한다! 긴말이 필요 없으리라 믿는다!”
언제나 시끄럽지만 강건우가 등판할 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던 박의현이다. 그리고 실제로 다른 투수들과 합을 맞출 때와 비교하면 짧게 끝낸 박의현은, 그 어느 때 보다 긴장하며 포수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구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강건우다. 자신이 실수하면 이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포수 마스크를 옆구리에 끼우고 자기 얼굴에 스스로 뺨을 대여섯대 때리고 기합을 넣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박의혀어어어어어어언! 돌잔치에 오션스 유니폼을 집은 박의혀어어어어언! 사직 야구장 홈플레이트 뒤에 묻힐 박의혀어어어어언!”
민승기는 강건우를 앞에 두고 웃었다.
“큭큭큭…”
“형, 솔직히 제가 작년부터 선발로 뛰었으면 형 FA로 여기 못 왔어요.”
“…!”
“농담이에요.”
“…당연히 농담이겠지. 강건우…!”
“퍼펙트 하러 갑니다.”
“퍼펙트는 나만의…!”
“퍼펙트 하면 롤렉스 싸게 팔아요.”
“그 롤렉스는 나의…!”
“저 갑니다.”
“강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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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많은 시선이 느껴진다. 나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을까.
대근이 형도 오늘은 경기를 보러 왔다고 들었다. 울프팩이나 킹도.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구단주도 왔다나. 아무튼,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날 보고 있다.
저런 시선들은 익숙하다. 부담스럽지 않다.
유리가 분석실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알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모른다.
물론 야구장에서는 어떤 결과든 나올 수는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나는 정말로 마운드를 지배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평균자책점 1점대에 20승.
뭐…선발로 뛸 때 1점대는 그때 한 번뿐이었지만. 그다음 시즌이 평균자책점 2.21이었던가?
선발로 6시즌 뛰면서 1점대 한 번에 2점대 두 번.
데뷔 시즌과 그다음 시즌이 3점대.
난 최고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최고라고 생각한다.
스포츠에서 누군가가 맞붙는다고 가정할 때, 대처 방법을 더 열심히 마련해야 하는 것은 약한 쪽이다.
강한 쪽은 내 생각대로 하면 된다. 파훼법을 찾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다.
무수히 쏟아지는 외침 속에서, 나는 파이러츠 1번 타자를 상대로 초구를 던졌다.
몸쪽 낮은 포심.
“스트라이크!”
타자가 배트를 내지 않았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초구에 불과하지만 내가 생각한 그대로 들어갔다.
이거, 되는 날이다.
팬들이 조금 웅성댄다. 아마 전광판에 찍힌 149km/h라는 숫자 때문일 거다.
2구.
“스트라이크!”
이번엔 높은 포심. 타자가 헛스윙했고, 구속은 148km/h.
3구, 체인지업.
그립은 아래로 뚝 떨어지는 벌칸 체인지업.
던지기도 전에 타자가 헛스윙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내가 원하는 코스로 공이 날아갔고, 내가 상상한 대로 타자의 헛스윙이 나왔다.
슬쩍 웃음이 나온다. 내가 잡아낼 예정인 27개의 아웃 카운트 중 하나를 잡아냈다.
27개의 아웃 카운트는 어떻게 생각하면 많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적다.
2번째 아웃 카운트는 꽤 쉽게 잡아냈다. KBO 타자들의 눈에 140km/h대 패스트볼은 꽤 익숙한 구속일거다.
148km/h의 공을 던졌다.
익숙한 구속일지라도 포심이 아니라 투심이라서,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2번 타자 김해근은 그 공을 잘못 건드렸고 초구에 아웃. 유격수 앞으로 흘러가는 땅볼을 정예성이 당연하다는 듯 잡아냈다.
3번 타자 정조준이 타석에 들어온다. 관중석의 볼륨이 더 커지고 있다. 악을 쓰듯 소리를 질러댄다. 조준이 형의 표정이 꽤 진지하다.
강속구가 능사는 아니다.
빠르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어를 올렸다.
온몸의 근육이 날뛰듯 반응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곤두서듯 예민하게 느껴졌다.
초구는-
부웅!
“스트라이크!”
-바깥쪽 높은 포심.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강건우! 강건우! 강건우!”
167km/h.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
조준이 형의 배트가 구속을 따라오지 못했고, 나는 히죽 웃었다.
167km/h라도 제대로 맞으면 넘어간다. 조준이 형이 내 구속에 맞춰 기어를 올리면 스피드를 따라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러니까 다시.
이번에도 높게.
홈런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자라면, 절대 이 유혹을 지나칠 수 없는 높이로.
부웅-
“스트라이크!”
타자의 똥 씹은 표정을 보는 것은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내가 선발로 안 나갈 수도 있다고 한 말을 믿은 걸까?
평소라면 박의현이 큰소리를 뻥뻥 쳐댈 텐데 조용하다. 공 잡는 데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내가 싸인을 냈다.
체인지업.
낙폭 없이 밋밋한. 하지만 구속만 줄어든 체인지업.
박의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패스트볼도 그렇지만, 이런 밋밋한 공은 걸리면 제대로 날아간다.
자신감이 중요하다.
이거, 못 친다.
그냥 헛스윙하고 돌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꿈틀대는 근육, 차가운 머리, 목적지를 응시하는 눈길, 그리고.
공이 내 손을 떠나기 전, 갑작스럽게 걸어버리는 브레이크.
포심을 던질 때와는 다르게, 손가락 끝으로 잡아채는 게 아닌.
손가락 세 개를 공 가운데에 걸쳤다가 부드럽게 톡.
167km/h의 공을 보던 타자가 138km/h의 체인지업을 제대로 칠 수 있는가.
글쎄.
힘들걸.
부우웅-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이 양손 주먹을 불끈 쥐고 삼진을 선언했다.
헛스윙한 조준이 형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고, 나는 집중력의 블럭을 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강-건-우! 강-건-우! 강-건-우!”
“건우야!”
“우와아아아아아아! 강건우!”
“강건우!”
그렇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모든 사람이 내 이름을 외치는 것 같은 그런 거.
내가 분석실의 유리를 향해 손 키스를 날리자, 수만여 관중의 목소리가 부르던 내 이름에 유리의 이름이 섞여들었다.
일단, 3개.
남은 건 2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