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hitter hides fastball RAW novel - Chapter (216)
천재 타자가 강속구를 숨김-218화(218/385)
사기꾼들의 스포츠 -5-
#
때때로 민승기는, 자신이 어쩌면 오션스 팬들의 염원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닌가 생각했다.
대단히 훌륭한 스토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1984년, 그리고 1992년.
두 번의 우승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2028년 오션스는 세 번째 우승을 목전에 둔 것 같았다.
앞선 두 번의 우승이 그랬듯, 정규 시즌 우승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밑에서부터 기세를 올리며 올라와 최후의 승자가 되는 시나리오.
포지션은 다르지만, 괴물 신인이 나타나 팀을 단숨에 이끌었다는 점에서 92년도의 그 이야기와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물론, 달라진 타선과 잘 뽑은 외국인 투수들의 힘도 있었다.
하지만 시즌 내내, 그리고 플레이오프까지 힘껏 내달렸던 오션스는, 특별히 화려했던 강건우에게 조금 가려져 있던 또 다른 핵심 선수 박의현의 부상 여파를 이겨내지 못했다.
오션스 팬들은 마지막 경기에 패배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건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선수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선수가 9-9-10-10-10의 시절을 지나온 선수들이었다.
다른 팀 팬들은 10-10-9-9-9를 기록한 메테오스를 묶어 세기의 풀 하우스(포커에서 같은 숫자 3장과 같은 숫자 2장의 조합) 대결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포커에서는 같은 숫자가 총 4개뿐인데 오션스와 메테오스의 9와 10이 합계 다섯 개니 둘이서 사기도박을 했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아무튼, 마지막에 이기지 못한 오션스 선수들과 36년 만의 우승을 놓쳐 슬프면서도 3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이 최종 2위를 했다는 복합적인 감정에 팬들이 함께 울 때, 민승기도 같이 울었다.
기쁘고도 슬펐다.
자신이 오션스의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기뻐했고, 순수하게 팬으로서 오션스 선수들의 눈물에 함께 슬퍼했다.
그리고 지금.
오션스와 낙동강 라이벌로 불리는 파이러츠 홈구장 마운드에 선 민승기는.
“스트라이크! 아웃!”
파이러츠 9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3이닝 동안 무려 6개의 탈삼진을 따내며 단 한 명의 주자도 내보내지 않은 완벽한 피칭.
민승기는 ‘민승기이이이이이!’ 라고 외치거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 턱을 한껏 치켜들고는 파이러츠 관중석을 한 바퀴 쓱 둘러보고는 씩 웃으며 덕아웃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 어딜 꼬라보노!”
거칠기로는 어디에도 밀리지 않는 파이러츠 팬들이다. 도발하는 듯한 눈빛에 한 팬이 소리쳤고, 민승기는 더 꼿꼿한 자세로 걸었다.
‘에이스는 절대 기죽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법.’
박의현이 따라붙었다.
“오늘도 멋있으십니다! 승기 형님! 포브스 선정 가장 닮고 싶은 야구 선수 1위! 포스코 선정 가장 부산 시장에 어울리는 남자 1위! 메이저리그 선수단 투표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투수 1위! 민승기이이이잇!”
강건우가 민승기와 박의현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민승기의 입가가 씰룩이고 있었다.
#
잘 던지던 승기 형이 불의의 일격을 맞았다.
아니, 불의의 일격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3.1이닝 동안 완벽하게 던지다가 볼넷 하나를 내줬고, 자신 있게 던진 공이 조준이 형의 배트에 제대로 걸렸다.
스코어 2대 0.
사실, 누구에게 맞더라도 어차피 숫자는 똑같다. 상대 팀 간판타자에게 홈런을 맞거나, 새파란 신인에게 홈런을 맞거나 어차피 같은 2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대가 조준이 형이다 보니.
둘 다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대표 단톡방에서 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그…뭐라고 해야 하나. 오션스를 상대로 입을 털어대던 조준이 형에게 승기 형이 약간은 불태우는 면모도 있고 해서.
한 방 맞기는 했지만, 추가 실점은 없었다.
그런데 또, 이닝을 끝낸 뒤 표정을 보니 심리적 타격 같은 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등판할 때 엄청나게 섬세한 사람은 아니다. 과거로 돌아온 뒤 처음 봤던 전력 분석 리포트에는 ‘종종 멘탈이 흔들리고 득점권에서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사람이 바뀐 걸지, 아니면 오션스가 오션스답게 선수 분석에 실패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투수지만, 투수들은 저마다의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다.
종종 다른 투수들의 머릿속이 궁금할 때가 있다. 사실 승기 형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는 투수가 아니라도 좀 궁금하기도 하다.
승기 형과 박의현의 뇌는…음.
약간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인간이라면 응당 가지게 되는 불가항력적인 호기심이라고 해야 하나.
내게 누군가 단 한 명의 정신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유리…보다는 승기 형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유리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닌데, 유리와의 관계에서 의외성이 있다는 점은 우리 관계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니까 그렇다. 유리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다. 솔직히, 야구 선수로서는 뭔가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그다지 없다. 내가 뭘 더 이뤄야 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유리와 함께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유리의 생각을 몰라도 좋고, 알아도 좋다.
반면, 승기 형이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살아가는지 알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선발 투수의 멘탈을 흔들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승기 형.”
“강건우.”
“솔직히 조준이 형한테 맞으면 다른 타자들보다 더 기분 나쁘지 않아요?”
누가 뭐래도 난 아직 21살일 뿐이다. 내가 정확히 몇 년을 살아왔는지는 나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21살이라는 나이는, 나이에 걸맞게 조금 애 같이 말해도 괜찮은 나이다. 종종 사람들이 내 나이를 헷갈리거나 당황해할 때도 있지만.
비교적 어린 선수들은 조급해하거나 치기 어린 발언을 해도 쉽게 받아들여지곤 한다.
승기 형은 내 말에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잠깐 지어 보이고는 대답했다.
“투수로 오래 던지다 보면, 언제든지 맞을 수 있고 패배를 겪을 수도 있는 법이지.”
전에 사직에서 홈런 맞았다고 무릎 꿇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좌절하고 슬퍼한다면 결코 투수로 롱런할 수 없다.”
그리고 나한테 좀 맞았다고 울기도 했었지 않나?
그게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나는 오늘 경기에서 더 이상의 실점은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야 누구든 할 수 있겠지.
“2실점이 아쉽긴 하지만, 내가 2실점 완투패를 한다면.”
갑자기 실책이라도 저질러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팀의 승리를 위해 충분히 최선을 다한 것이고, 우리 팬들의 비난은 내가 아니라 2실점 완투를 한 나를 승리 투수로 만들어주지 못한 타자들을 향하겠지.”
어찌 됐거나 오션스 팬들의 평판에만 신경 쓰시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몇 점 정도 더 내준다 하더라도 오션스 팬들은 내 편을 들 거다.”
대가리 속에 행복회로만 가득 찼나. 아니, 행복회로 반에 내로남불 반절 정도?
하긴 뭐…
투수들은 대체로 자기애가 강한 사람들이 워낙 많긴 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한국시리즈 2경기 등판해서 두 경기 모두 완봉승하고 준우승하기 대 컨디션 완전히 망해서 평균자책점 두 자릿수로 팬들에게 쌍욕 먹지만 팀 우승.”
“…뭐?”
“둘 중에 고를 수 있다면 뭐 고를 거예요?”
“…”
승기 형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금세 표정이 펴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네 경기에 등판해서 네 경기 모두 완봉승으로 팀을 우승시킬 테니까 그런 가정은 필요 없지.”
“아니,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요.”
“인생에는 수없이 많은 갈림길이 있지.”
“예?”
“선택지가 단 두 개뿐이라는 편견을 버려라, 강건우. 그러면 너는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다.”
뭐라는 거야 진짜.
잠자코 듣고 있던 주상욱이, 날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
파이러츠 좌익수 정조준은 오늘 꽤 기분이 좋았다.
민승기급의 투수에게 홈런을 때리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경기 전에 국가대표 단톡방에서 민승기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오션스를 상대로는 더 이기고 싶다. 인접한 연고지의 라이벌 팀이라는 것 외에도, 저 팀에는 강건우가 있으니 더더욱.
그리고 리그 2위를 달리고 있기에, 리그 1위이자 9연승에 도전하는 오션스를 멈춰 세워야 할 필요도 있었다.
민승기를 상대로 자신의 투런포가 결승타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 날이겠는가.
선발 투수 에드손 타바레즈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4이닝 무실점으로 굉장히 잘 던지고 있다. 하지만 5회에 상대 8번 타자 박의현이 볼넷을 얻어냈을 때, 약간의 불안감이 치솟았다.
만약, 강건우 앞에 만루 상황이라도 놓인다면?
지난번 민승기가 등판했던 오션스 전에서도 정조준은 투런 홈런을 때렸다. 그날 강건우도 홈런을 쳤다.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던 강건우에게 사기를 당했었다. 물론, 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꽤 오랫동안 160km/h 중반대의 공을 던지지 않다가 자신에게 보란 듯이 그 공을 던져 경기를 마무리했었으니.
4대 2로 졌었다.
오션스의 촐싹대는 2루수가 타석에 섰다. 그리고 하필이면, 2루수 오현태가 강습타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무사 1, 2루가 됐다.
여기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강건우 앞에 먹음직스러운 밥상을 차려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좌익수는 이런 상황에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서창열의 타구가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절묘하게 갈랐다. 저런 치사한 타구를 때려내는 데는 거의 장인이나 마찬가지다. 재빨리 달려와 타구를 잡아내고 던지려 했지만, 오션스 주자들은 안정적으로 행동했다.
괜히 무리할 필요가 없다.
박의현의 주력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라는 점도 있고, 두 타석 뒤의 강건우가 아니더라도 다음 타자인 배영한도 시즌 타율 0.331을 기록하고 있다.
파이러츠 덕아웃이 부산해졌다. 투수 코치가 통역을 대동해 올라와 투수와 대화를 나눴다.
2점 차 우세가 그리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서 최선은 병살 유도.
병살타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아내고 점수를 내주지 않은 상황에서 강건우를 피한 후 양대근과 승부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투수는 어떻게든 내야 땅볼을 유도하려고 애썼지만, 영리한 배영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파이러츠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다. 5구를 보는 동안 배트 한 번 내지 않고 밀어내기 볼넷. 에드손 타바레즈의 KBO 첫 피홈런이 강건우였다.
벤치는 결단을 내렸다.
아직 조금 이른 상황이지만, 불펜 에이스인 맹대규를 투입하기로 했다.
최고 154km/h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
올 시즌 체인지업 제구에 약간의 난조를 겪으며 좌타자를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우타자 상대로는 여전히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땡큐야! 점마 함만 잡아도!”
맹대규의 별명은 맹땡큐다. 물론, 잘 던질 때만 그런 별명이기는 하다. 등판해서 이닝 삭제해줘서 고맙다고 맹땡큐.
두들겨 맞는 날이면 가볍게 맹가놈으로 시작하고, 맹청이나 맹뻑큐는 웃어 넘길만한 별명이다.
아무튼, 정면승부해서 잡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고의사구를 내주면 동점이 되니 그럴 수도 없다. 메이저리그식으로 표현하자면 마무리 투수 바로 앞에 올라오는, 8회에 등판하는 프라이머리 셋업맨을 올린 것도 지금 이 순간이 승부처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타자가 양대근인데 좌타자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맹대규를 6회에 올렸다. 이 의미를 다들 알고 있었다. 불펜에서는 좌투수가 준비 중이다.
맹대규의 초구는 볼.
슬라이더에 강건우의 배트가 나오지 않았다.
오션스 팬들의 조롱이 마운드까지 도달했다.
“대구야! 쫄았나!”
파이러츠 팬들이 질세라 응원의 목소리를 냈다.
“땡큐야! 조지뿌라!”
양 팀 팬들의 상반된 감정이 쏟아지는 가운데.
맹대규가 2구째를 던졌다.
맹렬하게 날아간다. 153km/h. 바깥쪽 높은 코스. 배트가 따라 나오기 좋은, 존에서 살짝 벗어난 곳을 향해서.
그리고 강건우의 배트도 격하게 돌았다. 평소처럼 잡아당기면 파울이 날 가능성이 크다.
따아아아아아악-!
강건우가 모든 타구를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퍼 올리는 스윙으로 밀어친 타구가, 경기장을 일시에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잠시 후, 원정 팬들의 함성이 구장을 뒤덮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건우야!!!”
“직이네!!!”
중계 카메라가 바빠졌다. 강건우가 배트를 뒤로 집어 던지는 모습을 찍은 후, 입술을 깨문 맹대규를 비췄다.
그리고 강건우의 손가락 하트.
그다음은 유리창 너머로 기뻐하는 정유리.
멀리 날아가는 타구를 보며 분해하는 정조준에서 환호하는 오션스 팬들로 옮겨간 카메라는, 양손에 든 깃발을 번쩍 들고 포효하는 ‘사직동 쌍깃발’ 오소희를 찾아냈다.
“갱! 건! 우!”
오소희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윗집 총각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오소희가 깃발을 땅에 내려놓거나 의자에 앉는 일은 없었다. 때로 남편 정종석이 오소희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찍어 닦아내 주었고, 강현재와 이미래도 함께 목놓아 응원전을 펼쳤다.
강건우는 마무리로 등판하지 않았다. 민승기가 조금 고집을 부려 끝까지 경기를 책임졌다.
9연승을 이뤄낸 오션스 선수들은 경기를 끝마치고 크게 기뻐했다.
오션스 구단 역사상 최다 연승은 11연승.
파이러츠를 스윕하면 타이 기록을 이룰 수 있다.
휴 브레드먼 감독이 경기 후 선수들에게 외쳤다.
“매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의식할 필요는 없어! 하던 대로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