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hitter hides fastball RAW novel - Chapter (324)
천재 타자가 강속구를 숨김-326화(326/385)
웨딩 로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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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에는 여러 종류의 선수가 존재한다.
민김박 같은 투수가 있으면 이훈 같은 투수도 있고, 이현호 같은 투수도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민승기나 김권종, 박용재 같았으면 그런 투수들이 수십억에서 백억 대에 이르는 거액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3회 초, 오션스의 선두 타자로 나선 정예성은 배트 그립 아래쪽에 테이핑을 두껍게 감은 채 타석에 나섰다.
이 선수 또한 한때는 천재 소리를 질리도록 들었던 선수다.
천재 유격수.
한 시대를 풍미할 거라는 기대를 받던.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만 23세의 이 내야수는 아직 프로에서 뛸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보다는 의문점이 있었다.
고교 시절에는 바이킹스의 한때 국가대표 유격수였던 김만재를 보며 꿈을 키웠다.
프로 지명 당시에는 한 해 선배인 엔진스의 공격형 유격수 김산과 비교되었고, 프로 데뷔 직후에는 동갑내기 아이언스 유격수인 정종훈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기대치가 없어졌다.
최고 유격수가 되리라는 기대에서 기대치는 점점 내려왔다. 김만재, 옥시경, 윤세환 같은 선수들에 비비는 것도 사치스러웠다. 자신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던 성호재나 이대승이 치고 올라오는 사이, 음주운전 유격수 정귀현과 트레이드되었다. 물론 다른 선수들도 끼어 있긴 했지만.
아무튼, 한때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정예성은 이제 강건우가 마운드에 설 때나 유격수로 투입되는 백업 멤버가 되었다. 대타로는 거의 나서지 않는다. 팀의 4, 5, 6번 타자가 발이 굉장히 느린 편이라 대주자로 투입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정예성은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러웠다.
후보에 그치는 것이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오션스의 분위기에 휩쓸린 걸지도 모르지만, 정상을 향해 가는 팀에서 명확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어떤 그 누구라도 강건우를 대신할 수는 없다. 나도 강건우가 될 수 없지만, 다른 누가 오더라도 마찬가지다. 강건우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필요하다.
배트를 가능한 한 짧게 쥐고, 타석에 나가서, 감독이 원하는 바를 수행했다.
딱!
기습 번트.
본인에게 타격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예성은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다이아몬즈 시절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위안받을 수 있는 점은, 내가 안타를 치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이다. 그리고 번트를 대는 선수가 거의 없기에 상대 팀은 번트 수비를 소홀히 하곤 한다.
번트를 댔으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혀를 빼물고 달렸다.
번트 타구는 오묘하게 굴러갔다. 느리게, 3루 파울라인 바로 옆을 타고.
최지용이 달려 나왔지만 에드손 타바레즈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리고 타구는 파울라인을 넘어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우와아아아아아!”
“아! 씨바!”
환호와 욕설이 공존했고, 정예성은 다른 선수들처럼 포효라도 하고 싶었지만, 성격 탓에 그렇게는 못 하고, 그냥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환하게 웃었다.
에드손 타바레즈가 분을 못 이기고 모자를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정예성은 조금 어색하게 두 팔을 벌리고 관중석을 바라봤다.
“와. 예성이 진짜 빠르네.”
“근데 예성이 와 저랍니까? 파이러츠 팬들 도발하는 거 아닙니까?”
평소 조용한 편인 정예성을 생각해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복장이 이미 터져버린 파이러츠 팬들의 분노는 이미 쏟아지고 있었다. 정예성은 뒤늦게 흙이 눈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아채고 1루 코치에게 눈을 씻을 물을 부탁했다. 그리고 눈을 씻어낸 이후에야 여기가 사직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
뻘쭘하게 뒤돌아선 정예성은 1루 베이스에서 보이는 3루 측 오션스 팬들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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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는 이런저런 이유로 흔들리곤 한다. 첫 경기에서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었던 에드손 타바레즈는 예성이 형의 기습 번트 이후 급격히 흔들렸다.
내가 파이러츠 벤치의 생각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 정황상, 좌투수 이민호가 좌타자인 오션스 1~3번을 상대한 후 내게 고의적인 볼만 던지고 내려간 후 에드손 타바레즈가 바로 올라온 것을 보면 날 피하고자 했음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급히 몸을 푼 게 아니라 미리 몸을 풀고 올라왔었으니.
무사 1루 상황에서 창열이 형이 번트를 댔다. 파울라인을 벗어나 볼 카운트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에드손 타바레즈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창열이 형이 히죽 웃었다. 보통 실패하면 자기 실수라 하더라도 식빵부터 굽고 보는데.
확실히 저런 타입의 선수도 필요한 법이다. 보여지는 기록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팀에 가져다준다.
딱!
“파울!”
딱!
“파울!”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런데 사실, 파울 여러 개 쳐서 투구 수 늘리는 것보다는 그냥 안타가 훨씬 낫다.
창열이 형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타이밍 자꾸 어긋나서 계속 파울 치는 건데 일부러 파울 내는 척 하는 거다.’
그러자 노경우가 물었다. ‘왜요?’
창열이 형은 코웃음을 치고 대답했었다.
‘투수 기분 좆같으라고.’
연속으로 몇 번 파울 타구가 나오면, 투수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괜스레 투구 수가 아깝게 느껴지고, 타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것도 쳐보라며 볼을 던지는데 타자가 꿈쩍도 안 하면 더 열 받는다. 그리고 타자를 맞혀버리겠다며 몸쪽으로 붙였는데 타자가 귀신같이 알고 피해서 볼넷을 얻으면?
“우우우우우우우!”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투수는 돌아버리는 거지. 눈이 반쯤 뒤집힌 에드손 타바레즈는 다시 모자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창열이 형이 휘파람을 불었고, 투수의 머리가 폭발해버리기 직전.
파이러츠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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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원 감독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직 스코어는 0대 0이다. 아직 강건우 앞에 좌타자가 둘 남았고, 계획대로라면 에드손 타바레즈가 노경우와 배영한 까지는 상대해줘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에드손 타바레즈가 폭발해서 싸움을 벌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더 큰 손해로 돌아온다.
현재 불펜에는 투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감독이 투수 코치에게 에드손 타바레즈를 교체한다고 말할 때까지는 많은 생각이 필요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교체시켜. 지금 싸움 나면 화풀이로밖에 안 보인다.”
“예.”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으려면 모든 선수가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한바탕 주먹질이 오가고 나면 오션스의 중요한 선수 몇몇이 퇴장으로 빠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 선수들도 다칠 수 있다.
오션스는 벤치 클리어링에서는 탈한국 스타일이다.
결국, 투수가 고수원으로 교체되었다. 이름 탓에 다이아몬즈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선수다. 3회에 벌써 투수 세 명. 그래도 이런 발악이라도 해야만 했다.
딱!
노경우가 타구를 외야로 날렸다. 2루 주자 정예성이 홈으로 뛰려다가 유시훈의 영리한 쇄도와 옥시경과의 빠른 중계 플레이로 3루로 되돌아갔다.
무사 만루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병살을 따내도 강건우가 타석에 나오게 된다. 11월임에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욕이 절로 나온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을까.
“스트라이크! 아웃!”
고수원이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아웃 카운트 하나를 따냈다. 1사 만루.
오션스 팬들이 들어찬 원정 관중석 쪽에서 난리가 났다. 대기 타석에 서 있던 강건우가 움직이고 있었다.
새하얘졌던 머리에 쥐가 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밀어내기 고의사구를 주고 양대근과 승부?
아니면, 사이드암 셋업맨 맹대규를 올려서 강건우를 잡아낼 시도를 해야 할까.
올 시즌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0.181에 불과한 맹대규다. 하지만 강건우에게 맞았던 그랜드슬램이 감독의 머리를 스친다.
“…대규 투입해.”
“…예.”
모 아니면 도. 미리 몸을 풀었던 사이드암 투수 맹대규가 올라와 연습 투구를 마치고 강건우에게 공을 던졌고, 단 1구 만에 승부가 나버리고 말았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악-!
또.
만루 홈런.
창원 파이러츠 파크와 사직 야구장이 동시에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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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을 치고 나면, 특히 만루 홈런을 때린 뒤에는 마음이 들뜨기 쉽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나는 오늘 타순 한 바퀴를 상대하는 동안 상대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냉철하게 판단하고, 한 바퀴가 돌고 나면 본능에 맡길 생각이기에 더 그렇다.
홈런을 치고 광기 어린 눈빛으로 날 맞이하려는 팀 동료들을 외면하고 옆으로 빠졌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면한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와. 강건우 독한 것 좀 봐라. 우와.”
선발로 투타 겸업을 하는 경기에서는 호흡도 중요하거든. 저기서 소리 지르고 난리 치다 보면 뭔가 흐트러질 수도 있다.
아웃 카운트 하나인 상황에서 만루 홈런을 때리고 나왔고, 대근이 형은 내 컨디션을 배려해 공을 많이 봤다. 추가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충분히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마운드로 올라가 번거로운 타자인 오현태를 3루수 땅볼로 처리했다. 노루 형이 눈 한 번 감지 않고 타구를 처리해줬다.
옥시경에게는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 타석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강태오는 초구를 건드려 유격수 땅볼.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정리된다. 파이러츠 타자들의 컨디션과 그들의 생각이 차곡차곡 쌓인다.
타자들은 첫 타석에서 투수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 한다. 구속은 어떤지, 어느 코스를 주로 던지는지, 어떤 구종으로 결정지으려 하는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타석에서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도.
부상으로 투수를 빨리 그만뒀지만, 나는 내 정체성이 타자보다는 투수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파이러츠 타자들을 한 번씩 상대해본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내 속에서 잠자고 있던 투수 강건우를 꺼내놓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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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말.
파이러츠 타자들은 4대 0의 스코어를 뒤집을 수 있을지 희망을 쉽게 품진 못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오늘 경기 강건우의 데이터는 모았다.
“구속은 조금 느리게 가져가는데, 제구랑 무브먼트가…”
준비한다고 해결되는 상대는 아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생각은 하고 들어가야 한다.
“한 방 노리지 말고, 차근차근 가자. 컨택 위주로 해서, 아직 경기 안 끝났다.”
4점 차이면 포기하긴 이르다. 박근수는 꽤 자극받은 상태로 타석에 들어섰다. 어떻게든 뭐라도 하고 싶다.
딱!
“아웃!”
하지만 결과를 내진 못 했다. 절묘하게 타이밍이 안 맞았다. 살짝 뜬 타구를 양대근이 제 자리에 선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잡아냈다.
김해근은 배트를 최대한 짧게 쥐었다. 그랬더니, 서클체인지업이 짧게 쥔 배트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다. 황당하다. 연타석 삼진.
정조준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는, 파이러츠 팬들이 일말의 기대감을 걸었다.
141km/h.
“스트라이크!”
타이밍을 또 빼앗겼다. 하지만 쉽사리 기어를 내릴 수가 없다. 이를 악문 정조준이 스윙을 넓고 길게 가져가려고 마음먹었다.
137km/h.
딱!
“파울!”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다. 투심 구속을 저기까지 떨어뜨린다. 강건우를 노려봤는데, 눈에 어딘가 생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항상 보던 놈과 다른 놈인 것 같다. 자신을 볼 때면 언제나 도발적인 눈빛이었는데.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머리를 식혔다. 심판이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할 때까지 버텼다.
‘진짜 이런 개씨발…’
강건우라는 사람이 싫은 건 아니다. 그냥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까지 농락당할 수 있나. 저놈의 머릿속을 조금도 훔쳐보지 못하고 있다.
승부의 시간이 왔다. 강건우가 투구 동작을 시작했고, 정조준은 잠시 숨을 멈췄다.
대응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기 위해 한계까지 끌어올린다.
그런데.
강건우의 투구 폼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고 본능이 외쳤다.
공이 높은 곳을 향해 온다. 이건 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본능의 경고보다 조금 더 컸다.
부우웅-!
풀스윙.
그리고, 심판의 삼진 콜.
“어…씨발…이거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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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우! 삼진! 삼진을 잡아냅니다! 결정구는 커브! 슬로우 커브!
-정조준 선수의 표정을 좀 보세요. 이게 뭔가 싶을 거에요. 구속이 얼마죠?
-예, 이거…99키로입니다. 예. 99km/h 커브가 나왔어요.
-최고 구속과 거의 70km/h 가까이 차이 나는…이거 못 쳐요. 못 칩니다. 절대로 못 칩니다. 이걸 어떻게 칩니까? 이건 반칙이에요. 강건우 선수, 반칙입니다. 진짜 이건 반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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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늪 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거기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한계 없이 빠져들어 가게 된다.
그리고 나를 억지로 그 안에 넣었다가 빼는 법을 배웠을 때,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한 선수가 될 수 있었다.
가끔 거기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속에서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통제하되, 서서히 떠내려간다.
“강—건—우—!”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너무나도 아쉬웠던 것은, 이걸 통제할 수 있게 됐는데 나는 투수를 그만뒀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머리를 차갑게 해서 던지는 것과는 또 다르다. 괴물이 되어 모조리 집어삼키는 느낌이라고 하면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시즌 내내 이런 상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태를 일 년 내내 유지하려고 했고, 그런 시도가 유리와의 관계를 더 나쁜 곳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게 정신을 놓지 않아야 한다.
공을 던질 때마다 관중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 아웃, 아웃, 아웃.
마운드에서 내려왔는데도 사람들의 흥분은 전혀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타석에 서면 파이러츠는 투수가 누구인지와는 관계없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 같았다. 일단 볼 세 개, 그리고 스트라이크 하나, 다음은.
따아아아아아아악-!
베이스를 천천히 돌았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늪에서 나오지 않기 위함이다.
거기에서 나오더라도 아무 문제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정도면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의 오차라도 생기길 원하지 않는다.
여러 시선이 느껴진다. 승기 형의 눈빛에 드디어 어느 정도는 존경심이 담겼을지도 모르겠다.
의현이 형은 벤치에서 두 손으로 자기 두 눈을 덮고 있었다. 감독님은 연신 팔을 쓸어내리고 있다. 투수 코치님은 내게 와서 물었다. ‘내가 자네 종아리를 좀 주물러도 될까?’
그리고 나의 희망, 나의 빛, 나의 모든 것.
유리 누나가 문 안쪽에서 예쁘게 웃어주고 있다. 언제라도 날 묶고 있는 것들을 걷어차고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내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치워버렸다.
포수는 상욱이 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 눈물을 찔끔 흘리며 자기 손을 내려치던 의현이 형을 발견한 감독님이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경기를 포기해버린 듯, 터덜터덜 걷듯이 수비하다가 실책을 저지른 2루수 오현태를 대신해 나온 대타 이금석에게 삼진을 잡아냈다.
국가대표팀 동료였던 옥시경에게는 몸쪽 공을 보여준 후 슬라이더로 마무리했다. 옥시경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부에서 흘러나온 공기에는 좌절감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없다.
어차피 여기에서 누군가는 이겨야 하고, 그게 나여야 할 뿐이다. 그런 감정을 가질 거라면 이 바닥에 발을 들여선 안 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향상심이 없는 데도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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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러츠, 9회 말 2아웃. 대타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대타 조영재. 시즌 타율 0.249에 4홈런. 그리고…강건우 선수가 27번째 아웃 카운트에 단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예. 오션스가 역사를 새로 쓰기 직전입니다. 오션스도, 강건우 선수도요. 아직 단 한 명도 내보내지 않은 강건우 선수. 초구, 던집니다!
손끝을 떠난 공이 맹렬하게 쏘아져 나갔고, 조영재의 배트가 헛돌았다.
-스치지도 못하네요.
해설이 담백한 이유는, 오늘 강건우의 구위가 너무 압도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조영재의 표정에서 전의가 사라졌다는 것을 읽은 까닭도 있었다.
-2구, 또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145km/h라는 구속이 찍혔다.
구속과는 상관없이 공에 힘이 느껴진다. 저 정도 구속이면 때릴 법도 한데 왜 손도 못 대느냐는 파이러츠 팬들의 불평도 쏙 들어간 상태다.
포수 주상욱은 속이 미칠 듯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위가 아프다. 모든 압박감이 전신을 짓누른다.
박의현은 어떻게 이걸 견디고 있었을까. 내가 선발로 나섰다면 이걸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래도, 실수할 수는 없다. 포수 마스크 아래 가려진 아랫입술에 살짝 핏물이 맺혔다. 괴성을 지르고 싶지만 겨우 참아냈다. 노 볼 2스트라이크.
마지막.
단 1구만 받아내면 된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강건우의 몸이 꿈틀댄다. 이런 상황에서 마운드에 선 강건우를 보고 있으니, 어딘가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강건우가 왼발을 뻗었다.
강건우가 오른팔을 들어 올렸고.
강건우가 몸을 비틀며 조그마한 야구공을 집어 던졌다.
쏜살처럼 날아온다.
배트는 나오지도 못했다. 왼손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다행이다. 미트에 무사히 들어온 모양이다.
“스트라이크—”
다리가 풀려버릴 것 같다. 심판이 목소리를 길게 뺐다가, 마무리 지었다.
“아웃-!”
끝났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더라.
강건우가 마운드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포효하는 것이 보인다. 주상욱은 풀려버릴 것 같았던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자기도 모르게 포수 마스크를 집어 던지고 마운드로 달려가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강건우! 강건우! 강건우!”
“오션스 승리하리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전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