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idol is a former scholar RAW novel - Chapter (108)
#108
사과는 안 하실 건가 봅니다
상태창을 통해 과거를 본 뒤, 군자는 종종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모든 것이 희뿌옇고 흐릿한 꿈이었다. 그러나 딱 한 명, 박영제의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시대의 불량학생을 ‘일진’이라 하던가.
그렇다면 박영제는 꽤나 지능적인 일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집요하게 군자를 괴롭히면서도 폭력 한 번 쓴 적이 없다. 대신 힘 깨나 쓴다는 놈들과 어울려 다니며 은근한 권력을 형성했다.
지금의 군자가 보기엔 코웃음 나오는 무뢰배들이나, 이 몸의 전 주인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이었을 테다.
그들은 은밀한 곳에서 군자를 압박하고 위협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몸에 흔적을 남길 것이라 협박했다.
그렇게 되면 부모님도 그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터.
이 몸의 전 주인은 그것을 두려워했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었으니까. 박영제 무리는 그 두려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박영제 무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자의인 것처럼, 교실 뒤편 공간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아이들의 비웃음은 그의 자존감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주먹질, 발길질 한 번 없이도 군자의 마음은 무참하게 멍들어 갔다.
그렇게 있는 대로 찢겨진 다음엔 박영제가 다가왔다.
군자야, 춤을 그렇게 추면 어떡하냐. 그게 노래야? 어?
내가 가르쳐 줄게.
원치 않는 가르침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시간은 군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박영제의 자존감과 우월감을 채우기 위한 고문 시간이었다.
박영제는 그를 ‘웃음 셔틀’이라 불렀다. 군자는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웃음’은 알겠지만 ‘셔틀’이란 대체 무엇인가. 허나 좋지 못한 단어임은 분명해 보였다.
딱 한 번, 이 몸의 전 주인이 박영제에게 대든 적이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어?
떨리는 목소리로 이를 악문 채 말했지만, 박영제는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웃었다.
뭔 소리야, 군자야.
너 아이돌이 꿈이라면서. 내가 선배로서 도와주는 건데?
그게 싫었으면 내 앞에서 춤을 추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못하는 애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참냐?
박영제는 모든 책임을 군자에게 철저히 전가했다. 이 몸의 전 주인은 그의 말에 끝까지 반박할 힘이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악몽 같은 시간들이었다. 몇 번이고 꾼 악몽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끝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몸의 전 주인이 느꼈던 고통이 밀려 들어와, 한밤중에도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
꿈 속에서, 군자는 그것이 단순한 상상력 덩어리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없었던 일이라면 이토록 가슴이 아프진 않을 테다. 이것은 그가 미처 보지 못했던 과거 기억의 조각들이리라.
“박영제···.”
정말 천하의 후레자식이 따로 없구나. 관용이고 자시고, 이 놈은 반드시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하리라.
그런 놈이 근래 들어 과거 친목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다니, 군자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박영제라는 놈은 양심도, 염치도 없는 인간인가? 그런 인간이 존재할 수가 있나? 얼마나 안면 가죽이 두꺼우면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어진 [노래해 듀오> 두 번째 촬영은 한적한 교외의 계곡에서 진행됐다. 이번 회차는 경연 대신 출연자 간의 친목, 곡 스케치 과정 등을 담기로 한 김석훈 PD였다.
마침 천운이 따라 영의정까지 섭외된 마당이니, 최대한 방송을 길게 늘려 이득을 보겠다는 심산.
“자, 오늘은 계곡, 캠핑장, 숙소까지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뭐, 송 캠프 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방송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출연자 간에도 자유롭게 의견 교환 하시면서 여유로운 휴가 보내시길 바랍니다.”
명목은 자유로운 송 캠프였지만, 영의정의 눈엔 딱 봐도 PD가 준비 없이 급하게 회차를 늘려 잡은 것이 보였다.
“김PD님, 너무 날로 드시려고 하시네~”
“크으, 어떻게 아셨지? 제가 원래 회를 좀 좋아합니다.”
이미 곡 컨셉도 잡았고, 스케치도 어느 정도 진행된 7IN 팀에겐 딱히 송캠프가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7IN 멤버들은 박영제와 함께 있는 것을 불쾌해 했고.
“현재야, 난 이제 저 인간 얼굴만 봐도 속이 더부룩하다.”
“나도 그래여. 선배 취급 하고 싶지도 않아.”
“아하하, 저런 건 선배도 아니지~”
그러나 박영제의 입장에서는 기회였다.
마침 군자와 친한 척을 하기로 노선을 잡은 참이었다. 바로 경연에 들어갔다면 들이댈 기회가 없었겠지만, 이런 명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
“흠, 흐음-.”
박영제의 손엔 직접 준비한 도시락까지 들려 있었다.
군자를 향해 걸어가며, 박영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쟤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는구나.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마침내 7IN의 베이스캠프까지 다가간 박영제가 군자를 불렀다.
“군자야.”
“···?”
“잠깐 얘기 좀 할까?”
갑작스런 박영제의 등장에 7IN 멤버들이 먼저 나서서 군자를 감쌌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태웅이었다.
“저희 지금 회의 중이었는데요.”
“회의?”
“네. 송캠프잖아여. 신곡 컨셉 회의 하고 있었음여.”
“그래? 노가리 까는 것 같던데.”
“노가리도 회의죠. 아시잖아요,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 툭툭 튀어나오는 거.”
“그럼 나도 노가리 까게 해 주라, 군자랑.”
“저기, 말씀을 이해 못 하시는-.”
태웅의 어조가 살짝 높아졌지만, 이내 군자가 나서며 그를 저지했다.
“태웅아, 괜찮다.”
“···.”
“선배님이 날 잡아먹기야 하겠느냐.”
“뭐, 그거야 그렇지.”
“다녀오마.”
멤버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군자가 박영제를 따라 나섰다. 다른 멤버들은 전전긍긍하며 그 뒤를 따랐지만, 김석훈 PD의 저지로 인해 가까이는 갈 수 없었다.
“지금은 군자랑 영제 그림이 좋으니까, 우선 다른 멤버들은 빠지자.”
“그래도 한 팀인데···.”
“저 친구들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서사가 있잖아.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우리가 바로 저지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그렇게, 마침내 박영제와 군자의 독대 시간이 만들어졌다. 사방에 펼쳐진 카메라를 확인하며, 박영제가 한껏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까 지난번에 내가 너무 딱딱하게 굴었지.”
“···.”
“미안하다. 너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 돼 있어서, 나도 모르게 질투를 좀 했나 봐.”
“···.”
“그 때 한 말은 다 잊어 줘. 선후배 말고, 그냥 친구로 지내자.”
그렇게 말하며, 박영제가 도시락을 스윽 내밀었다.
“밥 안 먹었지? 이거 내가 준비한 건데.”
“···.”
“나 도시락 셔틀은 진짜 처음 해본다, 하하.”
그 때까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군자는, 박영제의 입에서 셔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자 고개를 치켜들며 환하게 웃었다.
“셔틀?”
“응?”
“선배님, 지금 셔틀이라고 하셨지요?”
“어? 으응, 그게 왜···.”
“그래요, 셔틀! 과거엔 나를 항상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
“그 뜻이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습니다. 무언가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었군요?”
“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하하-.”
뜻밖의 전개에 박영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김석훈 PD 역시 모니터를 주목했다. 전부터 의구심을 품어 오던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근데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유군자가 박영제의 셔틀이었다고?
그럼 박영제가 일진 짓거리라도 했다는 건가?
“피디님,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흐음.”
“떼어 놓을까요?”
“아냐, 그냥 둬. 주먹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일단은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한 김석훈이었다. 당장은 그냥 장난치는 것일지도 모르니.
그 와중에도 박영제는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유군자를 셔틀이라고 불렀던 기억조차 없었다.
그러나 유군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선배님이 나를 웃음 셔틀이라고 불렀잖습니까.”
“아아, 그, 그랬나?”
그래, 분명 이 자식 춤 추는 것만 봐도 빵빵 터져서 그렇게 불렀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 얘기를 꺼낸다고? 미친 건가?
“그, 그거야 뭐··· 너만 보면 너무 즐겁고 웃음이 나오니까 그랬지.”
“흐음.”
“우, 우리 친구였잖아!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땐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셔틀과 우리는 급이 다르다고.”
“!”
“보통 친구끼리는 급을 나누지 않습니다. 이제 신분제는 철폐되지 않았습니까.”
“야, 너 무슨-.”
“허나 급이 다르다 하면··· 흐음, 셔틀이란 일종의 노비 같은 것인지요. 저는 선배님과 따로 살았으니, 솔거 셔틀은 아니고 외거 셔틀이었군요.”
“아니, 너 진짜 무슨 소리를···.”
“그런데 이제 선배님이 셔틀이라? 허, 과거엔 노비를 거느리시던 분이 지금은 어이하여 노비 신세가 되셨습니까.”
중얼거리던 군자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박영제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혹시 역모라도 일으킨 것입니까?”
“—!?”
이야기를 듣는 내내 박영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대체 이 미친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셔틀? 노비? 이 자식, 지금 이게 방송이라는 자각도 없나?
이 모든 것이 그냥 선 넘는 장난인지, 아니면 진지한 신경전인지. 박영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방송인데 이런 걸 그대로 내보내진 않겠지. 믿으면서도 유군자의 태도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 새끼가, 날 묻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이쯤 되니 어떻게든 친해져 보겠다고 도시락까지 싸 들고 온 스스로가 초라해진 박영제였다. 적어도 군자에게는 박영제와 풀어 보겠다는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쪼다 같은 새끼, 언제 적 일을 가지고 아직도 꽁해 가지고선.
순간 박영제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허리를 낮춘 박영제가, 군자 말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야, 적당히 해라.”
“···.”
“가만히 좀 있으라고, 화 날라 그러니까.”
네가 그 시절을 그렇게 잘 기억한다면 이 공포도 아주 잘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나 군자가 기억하는 것은 공포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예? 가만히 있으라고요?”
“그래.”
“이상하군요, 그 땐 분명 춤을 추라고 하셨었는데. 딱 지금 같은 표정을 하시고서요.”
“!”
“그 땐 되려 가만히 있으면 혼쭐을 내지 않으셨습니까.”
“—!?”
“지시 사항이 달라지니, 소생··· 아니, 소셔틀은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너 이···.”
분노를 참지 못한 박영제가 군자의 어깨를 낚아채려던 순간이었다.
타악-.
오히려 군자가 박영제의 손목을 낚아채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사과는 안 하실 건가 봅니다.”
“뭐?”
“하긴, 이제 와서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만.”
“너, 너···.”
“본인이 잊었다고, 상대까지 모두 잊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요. 난 어젯밤에도 악몽을 꾸었답니다.”
“!”
“선배는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