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idol is a former scholar RAW novel - Chapter (79)
#79
세 번째 대안
“이 루삐가···.”
“강후 오빠?”
포니타 멤버들이 민강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분홍색 분장 물감을 치덕치덕 펴 바른 민강후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
“강후 오빠 맞아요?”
“···루삔데요···.”
“루삐는 존댓말 안 하는데.”
“···루삔데···.”
“목소리가 강후 오빠 맞는데?”
민강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주먹만 꽉 쥐었다. 유군자, 이 빌어먹을 새끼가···.
고개를 슬쩍 들어 보니, 군자는 민강후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형님, 뭘 부끄러워 하십니까. 후배들이 인사하겠다는데!
그 웃는 낯짝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 사이, 포니타와 신인들은 루삐 = 민강후를 기정사실화 한 것 같았다.
“강후 오빠, 이게 뭐예요~”
“분장 왜 이렇게 잘 됐어요?”
“선배님, [오늘의 퀴즈> 들어가셨구나.”
“···근데 몇 개를 틀리셨길래···.”
신인 시절부터 폼생폼사해 온 민강후였다. 특히 걸그룹 멤버들 앞에선 더 그랬다. 그렇다고 딱히 대쉬해 오는 멤버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었다.
‘포니타’도 민강후의 레이더망에 있던 그룹이었다. 비록 대중적으로 성공한 팀은 아니었지만 멤버들의 비주얼만큼은 훌륭했으니까.
게다가 그 옆에 선 신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막 연습생을 벗어난 신인 걸그룹이야말로 민강후의 핵심 타겟이었다. 신인들은 민강후가 무슨 개폼을 잡아도 현란한 리액션으로 120%의 만족도를 선사했다.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루삐 분장이라니. 핑크 면상이라니!
신인들은 하나같이 격투기 선수처럼 두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목 언저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
“흐읍-.”
민강후는 자신의 처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나, 신인 걸그룹에게 웃참 챌린지를 시전하고 있는 것인가?
“꺄하핫, 오빠.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와중, 포니타의 멤버 한 명은 눈치 없이 깔깔 웃으며 민강후의 어깨를 쳐 댔다. 괜히 벌컥 화가 난 민강후가 인상을 구기며 언성을 높였으나.
“해지 매!”
“푸하하핫, 발음은 또 왜 그래요!”
“웃교? 논 이게 웃기뇨?”
“꺄하하하하학—.”
빌어먹을 분장 물감 때문에 발음이 엉망이었다. 이제 사태는 민강후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아야, 그냥 가자···.”
“네 언니! 오빠! 화이팅! 군자 님도 화이탱!”
결국 포니타의 리더가 겨우 멤버들을 수습하여 자리를 떴다.
그렇게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군자는 산뜻하게 웃으며 민강후를 돌아보았다.
“형님, 강후 형님!”
“···.”
“저 분들이 형님을 몰라보시는 것 같아, 제가 조금 과하게 아는 척을 했답니다.”
“···.”
“하하, 아무리 촬영 중이라도 선후배 간의 법도는 지켜야 하는 법 아닙니까.”
그러나 민강후는 웃지 않았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오로지 악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망할 루삐 분장을 전부 지워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녹화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논··· 논 내가 오또케든 조진도.”
“조진도? 그건 또 무슨 칼입니까, 형님?”
“···기대해.”
“?”
분홍 괴물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어떤 방법으로든, 유군자를 한 번은 짓밟아 주겠다고.
* * *
7IN의 데뷔앨범 준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프로듀서 지현수는 신곡 [근본 (Origin)>을 차근차근 빌드업해 나갔다. 스케치부터 워낙 잘 뽑힌 곡이었기에, 전문 편곡팀이 함께하니 완성도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타이틀곡이 생각보다 빠르게 뽑힌 덕에, 데뷔 미니앨범에 발라드곡도 하나 추가하기로 했다.
7IN표 발라드곡의 가제는 [몽중화>. 아육시에서 멤버들과 함께했던 트레이너인 영은채가 작곡을 담당했다.
“···헤, 헤헤··· 군자 님께··· 우리 데뷔 멤버 친구들에게··· 곡을 준다···.”
곡비도 받지 않겠다는 영은채에게, 서은우 팀장이 애걸하듯 매달려 겨우 페이를 지급했다.
서 팀장이 원리원칙주의자였기에 망정이지,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평생 공짜로 일할 기세였다.
더블 타이틀 [Concept : 忠>, [근본 (Origin)>에 [예의없는 것들>, [PLAY!>, [몽중화>까지.
데뷔 앨범 작업엔 그 어떤 차질도 없었다.
회사가 열일하는 동안, 멤버들 역시 쉬지 않으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매일 같이 안무 연습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고, 각종 SNS나 제이라이브, 하이버스 등 소통 창구를 통해 부지런히 팬들과 소통했다.
숙소 분위기 역시 최상이었다.
성격은 모두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선비 기질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멤버들이 부딪히거나 갈등할 일은 거의 없었다.
군자 역시 누구보다 숙소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숙부이자 양아버지인 유형원의 슬하에서 외롭게 지내다, 동년배 친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니 그저 먹고 자고 노래만 불러도 하루가 행복했다.
때로는 간식을 만들기 위해 앞치마를 둘러메고 주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특히나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 바로 요리였다.
문원 유가의 제삿상을 담당하던 숙수와 군자는 각별한 사이였다. 덕분에 부엌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숙부는 요리는 사대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멀리했지만, 군자가 보기엔 갖은 식재료로 진미(珍味)를 만들어 내는 요리야말로 백성을 위한 과학이었다.
당시 기억해 두었던 조리법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수수 가루로 반죽을 내어 달콤한 팥앙금과 함께 구워 먹는 수수부꾸미는 군자가 어렸을 적부터 참으로 좋아하던 간식이었다.
치이이익-.
“자아, 들어들 보시게나.”
“와, 냄새 미쳤는데!?”
요리는 그 과정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완성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볼 때가 가장 뿌듯했다.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야, 이렇게 맛있는 걸 어떻게 천천히 먹냐.”
“으아, 나도 이제 늙었나 봐여. 이런 게 맛있넹.”
“군자야, TV 뭐 볼까?”
“그, [명품진품> 할 시간이긴 한데···.”
“좋지. 그거 은근 재밌더라.”
“수수부꾸미에 명품진품··· 이게 신인 아이돌의 실상···.”
“형아들, 우리 괜찮은 거 맞지?”
수수부꾸미, 명품진품과 함께 평화롭고 구수한 주말 아침이 흘러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접시가 비어 갈 즈음, 매니저 이용중 실장이 급하게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얘들아.”
“우왕, 실장님이다.”
“실장님, 와서 수수부꾸미 좀 드세요.”
“지금 간식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예?”
“일 났다.”
서은우 팀장의 긴급 호출이었다.
30분 후, 솔라시스템 대회의실.
멤버들이 회의실로 들어서자, 서은우 팀장이 반갑게 인사하며 그들을 맞았다.
“어서 와요. 주말이라 쉬고 있었을 텐데 불러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슴다!”
태웅의 우렁찬 답변에 서은우 팀장이 애써 웃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앨범 작업에 차질이 생겼어요. 기존에 함께 작업해 오던 뮤직비디오 제작팀, 안무 팀과 작업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네?”
순항하던 앨범 작업이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당초 계약 예정이었던 탑 티어 뮤직비디오 제작사 ‘HDR’, 안무팀 ‘페이백’과의 계약이 동시에 결렬되어 버린 것.
“에? 이렇게 갑자기요?”
“···어, 어째서···.”
“이 상황에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은 궁금하실 겁니다.”
멤버들은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제작팀과 함께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고 있었으니까.
“HDR과 페이백은 이번에 컬리뮤직과 계약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컬리뮤직은 ‘페이버릿’의 소속사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는 듯, 지현수가 이마를 찡그리며 책상을 가볍게 내리쳤다.
“컬리뮤직이 뺏어간 거네요?”
“굳이 말하자면 빼앗아 간 건 아니죠. HDR, 페이백, 두 팀 모두 솔라시스템과 함께 움직이던 팀이었습니다만 전속 계약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아니 그래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지···.”
사실, 컬리뮤직이 굳이 두 팀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그들 역시 전속에 가깝게 함께 작업해 오던 제작팀이 있었으니까.
즉, 이 계약은 명백히 7IN을 견제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사태 파악이 끝난 군자가 짧게 침음했다.
참으로 아쉬운 선택이다. 모두 같은 꿈을 가지고 같은 고충을 느끼며 나아가는 동업자일진대, 어째서 이렇게 서로를 견제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죄책감도 느꼈다. [오늘의 퀴즈>에 출연했을 당시, ‘페이버릿’ 멤버 민강후는 군자에게 꽤나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촬영 종료 뒤엔 인사도 제대로 받아 주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이 사태의 원인일 지도 모르겠구나.
“···죄송합니다.”
“유군자 씨가 왜 죄송합니까.”
“어쩌면 제가 촬영장에서 민강후 형님을 도발한 것이 원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서은우 팀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
“컬리뮤직이 두 팀과 계약한 날짜는 유군자 씨가 [오늘의 퀴즈>를 촬영한 날짜보다 빠릅니다.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 생겼든, 그와 무관하게 컬리뮤직은 우리에게 시비를 걸 예정이었다는 겁니다.”
“···.”
“게다가, 그런 큰 결정에 민강후 개인의 기분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렇습니까.”
“예.”
서은우 팀장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칼처럼 잘라 말했다.
“그 때 민강후에게 창피를 주었다면, 그건 사태의 화근이 아니라 적절한 복수였겠죠.”
서은우 팀장의 말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 군자였다. 그러나 마음이 편해졌다고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회의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서은우 팀장이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미안합니다. 내 불찰로 기존에 작업하던 팀들을 잃었습니다. 더 꼼꼼히 확인했다면, 더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서은우 팀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군자는 내심 감탄해 마지않았다.
서은우 팀장의 관직은, 조선 품계로 치자면 못 해도 정 3품 가량은 될 것이다.
그 위치에서도 유생들 앞에서 이토록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안다니. 전부터 느꼈지만, 참으로 선비다운 면모가 있는 분이시구나.
“이제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현재, 우리의 데뷔 앨범 발매 일정에 맞추어 뮤직비디오와 안무를 제작해 줄 수 있는 탑 티어 제작사는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
“물론 한 단계 낮은 급의 제작사나 안무팀을 섭외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죠.”
“···.”
“데뷔 일정을 조금 뒤로 미루더라도 최상의 포트폴리오를 가진 팀과 협업하느냐. 아니면 아직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일정을 맞춰 줄 수 있는 팀과 함께 작업하느냐.”
“···.”
“물론 여러분들에게 선택의 책임을 떠넘기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의견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묻고 싶습니다.”
서은우 팀장이 내민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일정을 미루고 탑 티어 제작팀을 찾느냐, 아니면 일정을 맞춰 줄 수 있는 2티어 제작팀을 찾느냐.
그러나 군자의 눈엔 어쩐지 세 번째 선택지가 보이는 것 같았다.
솔라시스템, 컬리뮤직의 규모를 상회하는 거대 기획사의 정2품 급 관료.
다른 건 몰라도, 근본 있는 안무 구성엔 반쯤 미쳐 있는 형님.
군자의 스마트폰엔 그 두 명의 연락처가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끄흐으음···.”
“유군자 씨, 의견이 있을까요?”
“어쩌면 세 번째 대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정을 늦추지 않고, 최고의 실력을 가진 분들과 작업할 수 있는 대안이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