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artial Arts Trainer RAW novel - Chapter (375)
◈ 하산 (3)
“그간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는지요? 무진 스님.”
“저는 괜찮았습니다. 설화 시주님께서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갑작스레 무진을 찾아온 손님은 바로 천류상단의 금지옥엽(金枝玉葉) 류설화였다.
“무진 스님과 정무맹의 활약 덕에,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답니다.”
살포시 웃는 그녀의 미소가, 무진의 눈가를 사로잡는다.
무진은 애써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천류상단도 지금 한창 바쁜 시기일 텐데, 이곳 숭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무진의 물음에,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유지한 채 담담하게 입을 답했다.
“무진 스님을 뵙고 싶어 찾아왔을 뿐이랍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내뱉은 답변이었으나, 어째선지 무진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천주가 사용하던 무시무시한 헌원신단공보다, 그녀의 담담한 한마디가 더 심장에 해로운 느낌이었다.
‘왜 이러지?’
무진은 스스로의 상태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요즘 많이 외로웠나?’
당장 떠오르는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신천이라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연애를 포기하고 무공과 싸움에 매진했었다.
신천이라는 적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와중에 연애나 하고 있는 건, 여러모로 무책임하다는 느낌이었으니까.
자신을 믿고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자신과 사랑을 나눈 연인에게도.
하지만, 이제는 그 가장 큰 걸림돌이 사라졌다.
안 그래도 하산 뒤에는 술과 고기, 그리고 사랑을 즐기리라 다짐했던 와중, 이렇게 훅하고 치고 들어오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무진이었다.
“저를 만나려고 굳이 바쁘신 와중에 찾아왔단 말씀이십니까?”
애써 정신을 부여잡아가며 묻는 무진의 말에, 류설화는 역시나 부드럽게 웃으며 조곤조곤 답해 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안 그래도 바쁜 일들은 미리 처리해 두었으니까요.”
천류상단은 이전부터 소림과 정무맹에 줄을 대고 있었다.
반대로 신천이나 사도련 쪽에 줄을 댄 천하오대상단인 대금상단이나 은하상단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사도련과 신천이 무너진 현재. 천류상단은 빠르게 그들의 사업들을 흡수해야만 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그 기회를 노리고, 은하상단과 대금상단의 빈자리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진이 그간 바쁘게 지낸 만큼, 류설화 또한 지난 보름여 동안 거의 잠도 자지 못한 채 일에 매진하며 중원 곳곳을 돌아다녀야만 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단순히 일이 바쁘기에 무진을 찾아오지 못한 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일찍 찾아뵙고 싶었으나, 무진 스님도 정리할 일들이 많을 테니, 시간을 조금 두는 게 좋을 듯해 이제야 찾아오게 되었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일을 조금 내팽개치더라도 무진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녀가 굳이 일을 마치고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무진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무진 또한 정리할 일이 많으리란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는 무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무진 또한 바쁜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몸과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준 것이었다.
그리고 무진 또한, 그녀의 말이 단순히 핑계가 아닌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과장된 말투나 몸짓보다,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진실되기 마련. 그리고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오롯이 무진을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또한 매한가지였으니.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무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고야 말았다.
‘이, 이렇게 미인이었었나?’
자꾸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방에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의식되고 있었다.
무진의 그 어딘가 어색한 반응에도, 류설화는 그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무진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자연히, 무진의 머릿속에 어렸을 적 보았던 류설화의 모습이 떠올랐다.
첫 만남 때는 그냥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무진보다 생물학적 나이가 두 살 정도 많았다지만, 시비에게 의존하고 스스로 뭐 하나 결정하지도 못하는 소심한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변화하긴 했으나, 무진이 느끼기엔 의존의 대상이 시비에서 자신으로 바뀐 느낌에 가까웠다.
뭐, 예전보다는 조금 활발해진 듯했지만, 결국 그냥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진이 낭왕에게 중상을 입었을 때.
그녀는 무진에게 고백 비슷한 말을 꺼냈었다.
천류상단의 금지옥엽인 자신이 책임을 질 테니, 이만 무공을 관두고 자신의 곁에서 살지 않겠느냐는 식의 말을.
그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무진 입장에선 어린 여동생이 떼를 쓰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긴 시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류설화는 변해 있었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무진에게 의존하지도,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무진에게 무관심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진의 선택과 나아가는 길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배려해 주려 노력하였다.
마치, 지금 그녀가 보이는 태도처럼.
마냥 어린아이라 여기고 있던 그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짝사랑해 준 여인. 무엇보다도, 이제는 서로가 동등한 어른으로서, 서로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여인.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와중, 무진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참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하산하는 쪽으로 현천과 약조까지 맺은 마당에, 무엇보다 신천이 무너진 지금, 굳이 이 감정을 외면할 필요는 없을 듯하였다.
그렇기에 무진은, 조금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저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설화 시주님.”
민망한 듯 쭈뼛거리는 무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아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뭔가 자신이 실수라도 했나 싶은 무진이, 급히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꽃이 피어났다.
지금까지 옅게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하였다.
그리고 그 꽃잎을 타고, 이슬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참고 있던 감정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듯, 활짝 웃는 그녀의 눈동자를 타고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린 채로 그녀의 웃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화인(火印)처럼, 그 꽃이 무진의 뇌리에 아로새겨진 순간이었다.
* * *
그날 이후, 무진은 그녀와 진지한 만남을 이어 나갔다. 아무리 마음이 동했다지만, 바로 식부터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
뭐, 이 시대에서야 그게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무진 스스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신천, 사도련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기념하기 위한. 그리고 전쟁이 끝났음을 기념하기 위한. 무엇보다도, 차기 정무맹주를 선출하기 위한 무림대회가 열리는 날이.
무진은 류설화와 함께 천류상단의 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호남성으로 향하였다.
물론, 그 둘이 타고 있는 마차만 느긋하게 이동할 뿐. 그 뒤를 따르는 마차에는 쇳덩이가 한가득이었다.
연애 중에도 운동을 게을리할 생각이 없는 무진이었다. 그리고 류설화 또한 그런 무진을 이해해 주었다.
아니, 애초에 무진 덕에 재활운동 사업을 운영하게 된 류설화였으니, 그녀 또한 나름 운동중독자였다.
그렇게 함께 쇠질과 근연장술을 즐기며 느긋하게 이동하다 보니, 머지않아 호남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과거 정무맹의 초석이 다져졌던 곳이 재건되어 있었다. 천주에게 무너졌던 그 정무맹의 건물이.
당연히, 천류상단의 솜씨였다.
대금상단과 은하상단의 사업까지 흡수하고, 무엇보다도 정무맹과 독점에 가까운 계약을 맺고 있는 천류상단은 이제 천하오대상단을 넘어 천하제일상단에 가까운 위세와 능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곳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용봉지회였다.
이제는 무너져 버린 무림맹의 잔재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정무맹은 용봉지회의 전통을 이어 갔다.
비무대 위에서 겨루고 있는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는 무진의 심정은 여러모로 기묘했다.
‘나도 저 때는 그랬었지.’ 하는 감상이 아니었다.
‘……내가 나가도 될 거 같은데?’
우습게도, 용봉지회에 나선 이들의 평균적인 나이대가 무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무진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정도.
무림에서 후기지수로 볼 나이대였다.
애초에 지난 용봉지회에서 열여덟, 열아홉 정도의 나이에 우승한 무진이 어딘가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대회에 볼일이 있는 무진이 용봉지회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류설화와 함께 여러 행사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용봉지회를 비롯한 주요 행사들이 모두 막을 내리고.
드디어 정무맹에서 처음으로 연 무림대회의 대미를 장식할 행사가 시작되었다.
“무림의 동도 여러분들 반갑소이다. 빈승은 정무맹의 맹주직을 맡은 현천이라 하외다.”
비무대에 오른 현천의 인사에, 무림대회를 찾아온 무림인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울려 퍼진다.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볍게 손을 들어 준 현천이, 웅혼한 불가의 내공이 깃든 음성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빈승은 애초에 불가에 뜻을 둔 스님이니, 속세의 일에 너무 오랫동안 얽매이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겼소이다. 하니, 오늘 이 자리에서 정무맹을 이끌어 갈 차기 맹주를 선출할까 하외다.”
그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재차 비무대 주위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잠시 그들이 진정하길 기다린 현천이, 차기 맹주 선출 방식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정무맹은 결국 무림인들의 모임이외다. 하니, 기본적인 선출 방식은 비무로 진행하겠소이다. 살수를 펼치지 않는, 정파의 방식에 맞는 비무를 통해 최종 승자가 맹주로 선출할 것이외다.”
“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가 급히 외친 물음에, 현천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제한을 두겠소이다. 이미 전쟁이 끝나고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니, 지난 전쟁에 대한 소식은 다들 접하셨으리라 믿고 있소이다. 하니, 맹주 선출에 참가하고 싶은 이가 비무대로 올라오면, 무림의 동도 여러분들께서 가부를 결정해 주시구려. 참가자를 지지한다면 힘찬 박수와 함성을 보내 주시면 될 것이외다. 만약 무림 동도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라면, 맹주직을 이어받을 자격은 없소이다.”
현천의 선언이 끝나고, 비무대 주변에 모여든 좌중들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한 사내가 성큼성큼 담당한 걸음으로 비무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바로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악이었다.
황보악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 여겼다. 자신 정도면 무공도 출중한 편이고, 전쟁에서 나름 공도 세웠으니 말이다.
‘흐흐흐. 맹주께서 약조를 지켜 주었구나. 아, 이제는 전(前) 맹주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선 황보악이 비무대에 오르기 직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흐흐흐. 역시 다들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 황보악이었으나, 함성 사이사이 어딘가 이상한 단어가 들려왔다.
“신승이다!!”
“신승께서 맹주직에 출마하셨다!”
“암! 신승이시라면 맹주에 오를 자격이 있으신 분이시지!”
‘신승?’
왠지 모를 찝찝함에 고개를 돌려보니, 옆편에서 익숙한 얼굴의 젊은 사내가 비무대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황보악은, 비무대로 올리려던 다리를 급히 물리고는 멈춰 섰다.
그때. 먼저 비무대에 오른 무진이, 의아한 얼굴로 황보악을 바라보았다.
“황보세가주님. 비무대에 오르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순식간에 주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황보악이 급히 외쳤다.
“그, 그저 가까이서 비무를 보기 위해 나온 것이었소.”
굳이 황보악에게 더 창피를 줄 필요는 없었기에, 무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비무대의 중앙으로 향하였다.
사실, 황보악이 가장 먼저 움직였기에 무진의 시선을 끌었을 뿐.
황보악과 마찬가지로, 비무대로 향하려다 멈춘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날 전쟁에서, 무진의 무위를 직접 보거나 어디선가 들은 이들이었다.
특히, 맹주직에 도전할 정도의 고수들은 죄다 그날 전쟁에서 직접 무진의 무위를 본 경험이 있었다.
여기서 무진과 비무를 벌여 봐야, 개망신만 당하고 끝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딱 한 명만 빼고.
“청수야 멈추거라!!”
“청수를 붙잡거라!!!”
갑자기, 무당의 도사복을 차려입은 무리들 사이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맹주직에는 관심도 없던 청수가, 무진이 비무대에 오르자 칼을 뽑아 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비무대 주위에 몰려든 무림 동도들의 시선이 무당 쪽으로 향하였고, 청수를 붙들고 있던 무당 도사들의 얼굴이 창피함에 붉게 물들었다.
왠지 그 모습이 안쓰러웠기에, 무진이 자연지기를 실어 웅혼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수 도장이 혹 맹주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맹주 선출식이 끝난 이후에 따로 비무를 벌이는 것은 어떻겠소이까?”
“단둘이 말입니까?”
눈을 빛내며 묻는 청수의 말에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발작을 일으키려던 청수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후우…….”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진 무당의 노도사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소란이 일은 이후에도 비무대에 새로 올라오는 이는 없었다.
추가로 일다경 정도를 기다린 현천이, 내공을 실어 선포하였다.
“하면, 도전자가 없는 관계로, 정무맹의 이대 째 맹주직을 신승(神僧) 무진이 맡게 되었음을, 전대 맹주인 본승의 이름으로 선언하겠소이다.”
[ 完 ]K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