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
다시 사는 예고천재 ⓒ아보카도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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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타빌레 (Cantabile, 노래하듯이)
피아노를 치다 보면 칸타빌레의 경지라는 말을 듣게 된다.
셈여림표의 명 그대로 눈을 감고 들으면 알아서 가사가 떠올라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음악을 말하는데,
가사도 없는 피아노곡으로 어떻게 노래를 한다는 건지.
솔직히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연주를 듣기 전까진.
[C.Debussy – Arabesque No. 1](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감미롭고 우아한 선율이 미향예고의 졸업식장을 가득 채웠다.
마치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나르는 듯 부드럽게 말이다.
눈을 감으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다채로운 색감.
그의 손끝에서 퍼져나오는 아르페지오는 분명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진 이미지를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피아노가 노래하고 있던 것이다.
둔한 범재였던 내 귀가 활짝 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절대음감도 타고난 박자감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악보를 음으로 표현하기 바쁜 흔하디흔한 예술고 학생.
그런 내게 귀가 열린 일은 기적이며 동시에 저주였다.
음악과 피아노 전공 수석 졸업자. 김민호.
그날,
나는 평생에 따라잡을 수 없는 목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
2026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사람들은 쇼팽,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함께 이 콩쿠르를 세계 3대 콩쿠르라 부른다.
피아니스트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경지이며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무대인 벨기에의 브뤼셀.
그 영광스러운 파이널 진출자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남자가 바로 나의 귀를 열어주었던 그 수석 졸업자 김민호였다.
언제나 당당한 그의 태도.
미향예고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시절과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말끔한 복장을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모차르트가 그런 말을 했었죠.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고,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언어의 경계를 넘은 저의 목소리를 꼭 들려드리겠습니다.
가슴을 쭉 펴고 맑은 눈을 한 그.
그간의 행적만 보아도 그렇지만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정말 김민호만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천재.
역시 김민호를 지칭하기에 그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생중계 화면을 떠나 대기실로 향하는 김민호.
나는 다른 피아니스트가 화면을 채운 뒤에도 귀신에 홀린 듯 모니터 귀퉁이에 비치는 민호의 발걸음을 넋 놓고 보게 되었다.
끓어오르는 선망과 갈망.
구석진 화면에서 보이는 그 힘찬 발걸음 하나까지도 나는 끝내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다양한 감정이 내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그와 나는 같은 교실에 있었다.
분명 같은 교습을 받았고, 결과는 처참하게 달랐지만 참여한 국내 콩쿠르 역시 비슷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거리가 벌어진 걸까.
부러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이름 있는 마에스트로의 마스터 클래스를 들어왔다는 김민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두각을 드러내 모든 주니어 콩쿠르를 휩쓸었던 그가.
순박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피아노 앞에서는 맹수로 돌변하는 피아노 전공 수석 졸업생이
나는 너무나도 부러웠다.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미 나와 같은 나이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에 나간 그.
“너처럼 되고 싶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쿵쿵 울리고 있던 가장 큰마음을 나의 입으로 내뱉고 있었다.
늦은 새벽.
내일도 내가 소속된 오케스트라에서 공연준비로 온종일 나를 굴릴 테지만 나는 보고 싶었다.
김민호가 직접 언급했던 언어의 경계를 넘은 목소리를.
새벽 3시.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파이널 무대를 지켜보는 나.
이윽고 김민호가 건반에 손을 올리는 순간,
따스한 브뤼셀의 여름밤에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었다.
***
“자! 성현씨 조금만 소리를 죽여볼까? 으음, 그래요! 그렇지. 자 다시 가볼게요?”
국내 최고라 불리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그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 역할을 맡은 나는 손가락에 힘을 더 풀었다.
울리는 웅장한 협주.
목관악기와 현악기가 나의 반주에 맞춰 화음을 자아낸다.
“좋아요. 여기까지 다시!”
열성적인 지휘와 마흔이 넘는 인원들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나의 귀에는 새벽에 졸며 들었던 김민호의 연주가 떠나가질 않았다.
“성현씨?”
다만, 도끼눈을 뜬 마에스트로는 눈앞의 현실을 내게 강요했다.
“성현씨의 연주가 뛰어나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오보에가 더 돋보여야 하는 부분이란 것 알고 계시지 않나요?”
“아···.”
“오늘따라 더 집중을 못 하시네요.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닙니다. 집중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된 순간.
‘나의 연주’는 놓아줘야 하는 욕망이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중시하는 건 단일한 음색의 뛰어난 기교가 아닌 함께 어울러내는 화음이니까.
당연하게도 곡에 대한 나의 해석이나 내가 펼치고 싶은 기교 따위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지휘자가 원하는 그런 피아니스트가 거의 되어가고 있다.
오케스트라에 몸을 담근 지 반년.
이미 기계적으로 무색무취의 연주를 자연스럽게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협주는 더 다채롭게 그리고 나의 연주는 더 무채색으로 물들어갔다.
벨기에로 향한 김민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는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Cantabile(노래하듯이)
내가 갈망하던 경지와는 멀어지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서른셋, 오케스트라의 톱니바퀴 이성현.
이 나이를 먹고 이제 와서 오케를 나가 뭘 어쩌겠나.
돈은 확실히 후한 오케였기에, 부모님에게 효도하기도, 미향예고 동창회에서 뻗대기에도 손색없는 위치였다.
“그래. 내 주제에 노래하기는 뭘.”
그런 말을 중얼거린 나는 홀짝이던 캔 커피를 비웠다.
그날따라 설탕 가득한 커피에서 진한 쓴맛이 났다.
다행히 오케스트라의 협주는 성황리에 끝나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모리스가 나를 콕 집어 ‘천상의 반주자’라 칭했던 것이 기사화되어 이성현이라는 세 글자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같은 미향예고의 후배이자 이름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반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독주회를 돕는 배경으로써 불려 다니게 되었다.
‘그는 주인공을 띄워주는 법을 안다.’
‘연주자를 배려하는 음색을 가졌다.’
‘누구를 위한 연주인지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그의 피아노는 가히 반주계의 알파라 불릴 만하다.’
다양한 연주자들은 내게 그런 찬사를 보내왔다.
피아니스트 김민호처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지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반주자로 나의 이름은 굳어갔다.
분명 찬사인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영화로 치면 영원히 조연만 연기하는 배우가 된 것처럼.
나를 채우는 부유함도, 감미로운 와인도 기이하리만큼 내 갈증을 달래주질 못했다.
찬사를 들었다.
명함을 받았다.
연주회에 초청을 받았다.
교수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내게 타인의 음악을 어떻게 그렇게 변화무쌍하게 맞출 수 있는가를 물었다.
하지만, 내 귀를 뜨게 해준 연주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2026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벌써 4년이나 지난 콩쿠르의 녹화방송을 트는 나.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솔리스트 김민호의 발걸음.
고독한 무대 위에서 춤추는 손끝, 그곳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겨울바람과 얼음꽃.
“후우우우.”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숨 막히는 무채색 세상에 푸르고 시원한 색감이 번져가는 감각.
그야말로 내가 한없이 갈망하던 그 연주였다.
천재를 바라보는 범재의 생은 이런 걸까.
감히 천재가 걷는 길을 따라가 보고자 했던 대가가 이런 끔찍한 숨 막힘이라는 말인가.
이럴 거면 차라리 그의 연주를 듣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다음날 나는 4년 넘게 몸담았던 오케스트라를 나왔다.
이젠 눈을 감고도 걸어 나올 수 있는 협주장.
마에스트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함께 연주했던 연주자 중에는 배가 불렀다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심정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안다.
하지만 숨이 막히는걸.
가면 갈수록 더 가슴이 답답해져서 질식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뽀드득,
멍하니 걷다 보니 발치에 무언가 밟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계절은 이미 겨울이었다.
[Chopin Etude Op.25 no.11](쇼팽. 에튀드 11번)
자연스레 김민호의 ‘겨울바람’이 나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서슬 퍼런 바람과 새하얀 눈발이 어우러졌다. 분명 살을 에는 칼바람이었지만, 그 속에는 포근함이 감도는 신비한 음색이었다.
나는 정처 없이 걸었고 전신이 오들오들 떨려왔지만 더는 숨이 막히진 않았다.
그때 김민호의 ‘겨울바람’ 위로 덧씌워지는 소음이 들렸다.
엉망진창인 화음과 타건법.
누르는 힘도 페달도 너무 엉망진창이라 그게 피아노 소리라는 걸 눈치채기까지 좀 오래 걸렸다.
그런데도 나는 김민호의 연주를 들을 때와 같이 그 피아노 소리에 이끌리듯 걸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밑에 난 작은 창.
반쯤 열린 그 창틈에서 건반을 두드리는 꼬마의 손이 보였다.
아이는 오렌지빛 온기로 가득한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며 웃고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성당에 갔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띵-
연한 피아노의 고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너무도 따스하고 아름다운 미소.
말 그대로 그냥 즐거워서 치는 피아노였다.
내가 잊고 있던 것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아저씨가 한번 쳐봐도 되겠니?”
정신을 차리니 이미 나는 교회에 들어와 아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 아이가 갑자기 울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피아노 잘 쳐요? 이거 못 칠걸요? 진짜 어려워요!”
다행히도 아이는 붙임성 좋게 내게 대답해주었고 나는 그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럼 아저씨가 힘내야겠구나.”
내가 말하자 읏차, 하며 의자를 비켜주는 아이.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건반에 손을 얹었다.
악보는 간단한 캐럴이었다.
즉석에서 편곡해 화려하지만 부드럽게 연주했다.
주선율을 받혀주는 반주에 조금 힘을 싣자 곧장 옆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우와!”
아이를 돌아보니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보는 꼬마.
이내 아이는 신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다가 피아노가 자아내는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아, 그랬나.
오늘이 크리스마스였구나.
크리스마스에는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었지.
만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도 피아노로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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