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04
104. 컴퍼지션 (Composition, 작곡) -5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짠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행위나 다름없다.
어떤 ‘테마’를 잡느냐에 따라 연주회의 그림이 변하고 객석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프로그램을 짠다는 건, 미술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어떤 ‘시대’를 보여줄지, 고전, 낭만, 근대로 흐르는 거대한 ‘흐름’을 보여줄지 그걸 결정해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면 이제 그 안에 채워 넣을 조각들 즉, 어떤 곡으로 그 밑그림을 채색할지 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큰 산을 보라색으로 칠해 인상적인 추억을 남기려 하고, 또 어떤 연주자는 산을 ‘사계’라는 다양한 곡으로 묘사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이의 연주 테마는 다소 난해했다.
스트라빈스키나 모리스 라벨과 같은 20세기의 음악가들을 시작점으로 잡고, 점차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이다.
대체 어떤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취했는가.
선택된 곡들에는 통일된 지점이 없고, 국적도 다르며 시대도 계속 변하니 지은이의 의중을 파악할 만한 힌트는 없었다.
단순히 최지은이라는 개인을 보자면 난해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짠 이 의문의 실타래 같은 프로그램은 최지은 개인이 아닌 그녀의 할머니를 고려했을 때 순식간에 풀려버린다.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곡의 배치.
거기에 초반부 연주될 곡들을 잘 살펴보면 그건 지은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했던 곡들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뒤로 가면 갈수록 고전주의를 사랑했던 김순이 할머님의 업적이 돋보이는 곡들이 많다.
즉, 이 프로그램은 지은이에게서 김순이 할머님으로 향하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짜인 구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란···.
지은이가 이미 수차례 언급했던 ‘이별을 위한 준비’이겠지.
딩 -!
새하얀 드레스의 지은이가 손을 뻗자, 아름다운 물의 요정이 붕 떠오르는 착각이 일었다.
[Maurice Ravel : Gaspard de la nuit](모리스 라벨 : 밤의 가스파르)
밤의 가스파르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교를 내재한 높은 난이도의 곡이었다.
당장이라도 넘칠 듯 일렁이는 물에 대한 묘사가 돋보이는 1악장.
라벨은 신비롭고 맑은 화음과 쏟아져 내라는 32분음표들을 통해 1악장의 주제인 물의 요정 옹딘의 다양한 감정을 묘사했다.
라벨은 이 곡을 작곡할 당시부터 고난이도의 곡을 쓰겠다 다짐하고 있었고, 때문에 세밀하고 빼곡하게 묘사된 감정의 변화를 연주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호오오. 그새 실력이, 더 늘었다니···.”
김순이 할머님의 작은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손녀이기에 좋게 봐주는 게 아니었다.
할머님은 진심으로 지은이의 탁월한 기교에 감탄하는 것이다.
어려운 곡이다.
허나, 어려운 곡이기에 지은이의 특징은 더 빛을 발했다.
보통의 연주자들이라면 내용을 보자마자 진지하게 내려놓을지부터 고민하게 되는 악보들을 지은이는 연습했다.
연습량이 부족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지은이지만, 이는 반대로 연습량만 충분하다면 그 어떤 난곡도 그녀의 장해물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엄청난 기교,
자칫 손가락에 무리가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까지 드는 빠른 템포의 악상.
그런 거칠고 묵직한 선율을 지은이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연주해냈다.
이전까지의 지은이가 기계처럼 작곡가의 저의에 맞춰 연주하는 타입이었다면, 현재의 최지은은 달랐다.
악보가 제시하는 음색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솔직한’ 감각을 끌어낸다.
분명 연주되는 선율은 거친 파도와 같이 밀어닥치는 음색이었음에도 그 안에 담긴 입으로 내뱉지 못한 슬픔과 티 낼 수 없던 외로움이 아주 강하게 묻어나왔다.
“다르네. 정말···.”
이제는 나도, 완전히 그녀의 연주에 몰입해 자신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만큼 지은이의 연주는 대단했다.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색채가 고전주의의 균형미와 결합했다.
다양한 색의 빛이 난반사 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반짝이는 선율.
그럼에도 그 안에는 어색하고 이상하지 않을 규칙성 같은 것이 있었다.
기교가, 극한의 기교가 지은이의 손끝을 타고 환상적인 세계를 비췄다.
어느새 3악장의 종반부까지 연주되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지금의 지은이는 달라.”
전생의 지은이도, 지금까지의 지은이도 현재 무대 위에 있는 연주자와는 아예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그녀는 드디어 나조차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탐구자가 되었다.
***
연주회는 아름다웠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러갔음에도 500여 명이 넘는 수많은 관객은 모두 시간이 가는 것을 똑바로 체감하지 못했을 만큼 사람의 오감을 마비시키는, 정말이지 엄청난 독주회였다.
한 번의 인터미션을 가진 뒤, 곧바로 2부의 시작을 알리는 곡이 모리스 슈만이 작곡한 곡이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그가 작곡한 묵직한 분위기의 레퀴엠이 그 어떤 곡도 능수능란하게 연주해내는 지은이와 만나 꽃을 피웠다.
아름다움 위에 놓인 슬픔.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
그런데도 벌써 사무치는 그리움.
김순이 할머님의 생을 바탕으로 작곡을 했다 들었는데, 듣고 보니 이건 처음부터 지은이의 시선에 비친 김순이 할머님을 묘사한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마저 울컥하게 만드는 마성을 가진 곡.
그야말로 거장의 손에서 탄생한 레퀴엠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대단한 선율이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2시간 20분이나 되는 독주회 연주시간.
보통 일반적인 개인의 연주회가 100분 내외인 것을 생각하면 이번 모리스 슈만의 욕심은 그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지은이의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곡과 곡 사이에 잠시 가지는 휴지부가 길어졌다.
땀에 젖은 드레스가 피부에 달라붙은 것이 보였다.
어떻게 하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지은이는 또 곡을 시작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도 뛰어난 음색의 연주를 듣다 보니 드디어 마지막 곡이 피아노를 타고 흐른다.
다름 아닌 연주자, 지은이가 직접 작곡한 곡인 ‘할머니’.
그 곡은 지금까지의 독주회와는 전혀 달랐다.
극한의 기교도 없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던 짧은 음도 없다.
남은 것은 고요한 객석의 자그마한 중얼거림까지 들려올 법한 공허함.
딩-
길고 담백한 울림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비유하자면 영화의 엔딩 크래딧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곡은 전체적인 독주회의 분위기와 정말 잘 어울렸다.
숨 가쁘게 조여오던 압박감이 탁 트이고 느껴지는 편안함과 안락함.
“아.”
그제야 나는 지은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껏, 독주회가 시작되고 무려 2시간 동안 숨을 쉬는 것조차 허용해주지 않던 그 묵직한 압박감.
허나, 그 끝에 다다라서는 편안한 분위기를 마음껏 뽐낸다.
이건 김순이 할머님의 인생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연로한 나이를 먹기까지 힘들게 살아왔던 김순이 할머님의 생애.
나도 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은이의 친가에는 할머님은 계시지만 할아버지가 없으시다.
이미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게 된 한 여인의 일대기.
지은이는 이 기나긴 연주회를 통해 할머님의 생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쁘고, 힘들고, 졸려도 눈을 감지 않고 일을 하고 또 일해서라도, 아들을 저명한 외과의로 키워낸 노력과 인내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삽입된 지은이의 자작곡이 한없이 편안한 까닭은 간단했다.
할머님의 미래가 앞으로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기도.
일종의 소원.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전해졌을까.
내가 자그마한 의문을 품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김순이 할머님은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계셨다.
눈물이 뺨을 적시고 턱에서 뚝뚝 떨어질 만큼 하염없이 울고 계셨다.
그리고 마지막 곡을 마친 지은이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맨 앞에 있는 할머님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예전처럼 버팀목이 되어주고 믿음에 보답하는 관계로는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지은이와 할머님은 과거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신뢰가 생겨나는 관계로 발전한 듯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소리 없는 교감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작!
큰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은이의 독주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
연주를 마치고 내려온 지은이는 그야말로 녹초였다.
서둘러 객석에서 일어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는 지은이를 찾아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벽을 짚고 간신히 선 자세로 굳어 있었다.
“괜찮아요? 업어줄까요?”
옆에서는 친숙한 얼굴의 스태프 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은이에게 그런 질문을 연신 던지고 있었지만, 지은이는 지친 상태에서도 고개를 저으며 벽에 기대어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이미 구두를 벗은 맨발이었고, 눈에 초점도 거의 풀려 당장이라도 잠들 것만 같은 지은이의 얼굴.
역시 2시간 반에 달하는 연주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괜찮아?”
그런 지은이에게 다가가 내가 묻자, 당장 기절할 것 같던 지은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성현, 아···.”
그리고 그녀는 바로 옆에서 이런저런 심려를 표하고 있던 스태프 형을 두고 내게 터벅, 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도중에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그대로 주저앉을 것처럼 흔들리길래 깜짝 놀란 내가 한걸음에 달려가자 와락 안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하아··· 나아···. 해냈어. 독주회, 헤헤.”
뜨문뜨문 숨에 섞여 나오는 단어들.
나를 보자마자 계속 붙들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것인지, 지은이는 정말 내 품에서 그대로 잠이 든 것처럼 축 늘어졌다.
느리지만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꽤나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걸 보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 잠든 것 같았다.
“헤··· 헤헤헤···.”
순간적으로 큰 접촉에 놀랐던 나였지만, 흡족하고 뿌듯해하는 지은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콩닥거리던 심장이 금방 진정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웃는 걸 보면 그녀도 자신의 연주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할 예정이었는데, 지은이가 잠이 든 바람에 일정이 꼬였다.
나중에 모리스 슈만에게 직접 들으니 지은이는 어젯밤부터 잠도 자지 않고 연습과 작곡을 병행했다고 한다.
그 기나긴 독주회가 끝날 때까지,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버틴 것이다.
참 전생이나 현생이나 나를 놀라게 만드는 데는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정석 선배와 예린이 이렇게 셋이서 저녁을 먹은 뒤 집으로 향했다.
연주 전날에는 연습하지 않는다.
이미 이른 아침에 최종 점검을 했으니 나의 규칙은 깨져버렸지만, 이래 봬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장 M스튜디오로 달려가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내 가슴 속에 피워진 열의를 밤낮없는 연주로 전부 표현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열정을 가지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지은이였다.
현재는 ‘비상하는 원조 천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지은이의 독주회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이었기에 더더욱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어졌다.
자극을 받았다.
멋지고 아름답게 성공기를 내 눈앞에서 보여준 그녀가 있으니 나도 더 당당하게 성공적인 독주회를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마구마구 치솟는 것이다.
하지만 의욕만 앞서서는 안된다는 걸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차분히,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려서···.
‘헤헤헤.’
음, 솔직히 내 품에 안겨서 잠든 지은이가 헤실헤실 웃던 얼굴이 계속 떠올라서 더 피아노가 치고 싶어지는 것도 있다.
이게 그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인지 뭔지 하는 건가.
아니, 지은이를 생각하는 게 왜 부정적인 마음이야.
오히려 긍정적인 거겠지.
“하아.”
아무튼, 다양한 요소들이 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질러대니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이럴 땐 무작정 달리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막상 지금은 씻고 나온 참이라 그러기는 싫었다.
그렇게 뭘 하면 좋을지 전전긍긍하던 찰나, 스마트폰의 전화벨이 울렸다.
“응?”
순간, 나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스마트폰에 아주 정확하게 적힌 발신자의 이름.
그건 다름 아닌···.
“여보세요? 민호···야?”
-와, 성현아 잘 지냈어?
독일 유학을 간 뒤 단 한 번도 연락이 없던 김민호였다.
“뭐야? 전화해도 되는 거야?”
오케스트라 순회공연 중에는 연락이 힘들다고 들었었다.
때문에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민호는 평소와 같은 악동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꾹꾹 웃더니 말했다.
-나 지금 한국이야.
“뭐?!”
나는 민호의 말에 너무 놀라 새된 소리까지 내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