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05
105. 리사이틀 (Recital, 독주회)
민호는 딱 오늘 밤 9시 50분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다고 말했다.
왜?
마 원장님에게 듣기로 민호는 다양한 마에스트로들과 만나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대단한 레슨과 실전 경험을 곧잘 쌓아나가고 있다고 들었었다.
또한, 말 한마디에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해버리는 민호를 그가 몸담은 오케스트라에서도 매우 좋게 보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왜 돌아온 것일까.
그곳에 남아 있었다면 분명 일취월장이란 단어 그대로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뤄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민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런 의문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혹시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런데 놀랍게도 민호는 내 미묘한 말투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져왔다.
원래는 눈치가 없던 편이었는데, 낯선 타지에서 생활하니 그런 쪽으로 감이 발달한 듯 했다.
아니 원래부터 눈치는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던가.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의문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좋은 인식까지 얻어낸 오케스트라를 굳이 발로 차 버리고 돌아온 이유.
그런데 민호는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약속했잖아. 백건오 한국 종합 콩쿠르. 그 결선에서 너랑 꼭 맞붙어보고 싶으니까. 그래서 돌아왔지.
출국 전에 나와 나눴던 약속.
민호는 정말로 그것 때문에 황금 같은 기회를 마다하고 귀국을 택했다고 한다.
정말, 무슨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건가 싶은 발언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때마침 인천 공항에서 운전 기사님을 기다리고 있던 민호에게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어수선해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민호에게 내일 있을 독주회를 말했고, 또 놀라운 말을 듣게 되었다.
-알아. 실은 네가 리사이틀을 열었다는 소식 때문에 일주일 일찍 돌아온 것도 있거든.
이, 이 기특한 녀석···.
내가 놀라 말문이 막히니 민호는 또 악동 같은 목소리로 한차례 웃어버리더니 말했다.
-유럽에도 재미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성현아, 너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는 것 같더라. 그래서 듣고 싶어졌어. 네가 이 방학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 말은 냉정히 식어가던 내 머릿속에 다시 불을 지폈다.
“내일 보자.”
나는 각오를 다지고 민호와 인사를 나눈뒤 전화를 끊었다.
직후, 나는 가히 전투적으로 침대에 누워 곧바로 눈을 감았다.
평상시 일어나던 스마트폰 알람을 아침 6시 반에서 버스 첫차에 맞출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꾼 뒤에 말이다.
내일이 정말 기대된다.
***
새벽 5시 2분.
알람이 울리는 순간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정장과 구두를 챙긴 뒤 테이블에는 짧은 쪽지를 남기고 출발했다.
‘먼저 갈게요.’
오늘이 역사적인 날이 될 거라고 하시면서 꼭 태워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1분 1초라도 아끼기 위해 새벽 버스를 타고 충무 아트홀로 혼자 향했다.
어제 스태프 형과 대화를 하면서 스태프들끼리 사용하는 마스터키 위치를 들어두길 잘했다.
달그락,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극장 바로 옆에 있는 피아노 연습실이 있는 연습동으로 향했다.
계절은 한 여름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맑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눈앞에 피아노가 있다.
이성은 냉정하게 ‘적절한 연습량’을 내게 권고하고 있었지만, 감성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제 있던 지은이의 독주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자극을 받았다.
거기에 유럽 순회공연을 끝냄과 동시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서라도 한국에 돌아와 준 민호가 내게 기대하고 있다.
심지어 독주회는, 내가 갑자기 중학생의 나이로 회귀하기 전까지도 그리고 현생을 살게 된 직후에도 계속해서 원하고 원해왔던 무대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성적인 움직임을 택했다.
드으웅-
연습실에 마련된 울림이 깊은 피아노의 건반을 누른다.
고작 하룻밤이지만, 참아왔던 만큼 그 단순한 울림마저도 내게는 한 없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하핫.”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걸렸다.
나는 아침 연습을 시작했다.
***
독주회란 내게 큰 의미를 지닌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가 할 수 있게 되어도 반주자는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솔리스트가 아니었기에, 닿을 수 없는 곳. 손을 아무리 뻗어도 점점 더 멀어지는 목표 지점.
그게 바로 독주회였다.
전생에서는 김민호와 나의 차를 완벽히 나타내는 절벽과 같았고, 현생에서도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독주회를 여는 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나는 ‘미향예고의 세 천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피아노계에 새로운 바람’이 되었다가 현재는 ‘피아노 치는 파가니니’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을 나타내는 별칭이 생긴다는 건, 다시 말해 내 인지도가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심 불안했다.
사람들은 ‘어린 천재’를 좋아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만일 흔히 말하는 잠시 반짝하고 마는 관심이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이 내게는 항시 존재해왔다.
아무래도 반주자로 살았던 기간이 그만큼 길었기에, 주연이 아닌 배경으로서 스포트라이트 밖의 세상을 뼈저리게 잘 알기에 확신하질 못했다.
내가 거대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허나, 오늘 나의 가치는 객관적으로 증명되었다.
‘피아노 치는 파가니니’
‘이성현 리사이틀!’
이와 같은 이름으로 판매된 객석의 수는 무려 892명.
간단히 말해 9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직 나의 연주를 듣기 위해 오늘, 이곳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는 어딜 어떻게 봐도 가벼운 업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의 수치였다.
당장 정석 선배나 마주혁 원장님이 독주회를 열어도 이처럼 많은 관객이 주목하리라 확신할 수 없는 단계의 숫자.
그게 9백 명이라는 관객의 수가 가진 의미였다.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믿기 힘들었다.
혹시 누가 서버를 해킹해서 장난을 친 것은 아닐지, 아니면 일시적인 오류가 아니었을지 계속 의심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믿는다.
실제로 대극장에 들어와, 남궁진 조율사님이 엄선해주신 백금색 무늬가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리허설을 진행하다 보니, 내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진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곳에서 그것도 고등학생 1학년이라는 나이로 독주회를 연다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로 향한 나.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푹신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무리 리허설이라 힘을 조금 빼고 연주를 진행했다 할지라도 내 독주회는 무려 2시간 48분으로 기획된 상황이었다.
말로 2시간 48분을 말하는 건 쉽지만,
사실 168분이라는 시간 동안 연주를 계속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체력을 회복하면서도 방금 있었던 리허설에서 부족한 부분을 복기해보는 사이, 끼익.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현아.”
곧바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 단순히 내 이름을 불렀을 뿐이었지만, 어제 봤던 순수하고 맑은 웃음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서 와. 지은아”
눈을 뜨고 조금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자 ‘헤헤헤’하고 예쁘게 웃던 얼굴이 또 겹쳐 보였다.
“어제는 미안. 내가 그 전날부터 잠을 못 자서···.”
“아! 걱정하지 마~ 다 들었어. 몸은 괜찮아?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었잖아.”
“응. 그건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마주보던 시선을 피하는 지은이.
아무 근거도 없는 짐작이지만, 어제 나와 얼떨결에 껴안듯 접촉했던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대기실에 방문하는 손님은 지은이가 끝이 아니었다.
“성현아!”
독주회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민호부터,
“축하한다!”
홍진태와 클래식 버스킹의 맴버분들.
“너무 긴장한 건 아니지?”
나를 걱정해주시는 정석 선배와 이 순간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마주혁 원장님.
아직 공연 시작은 6시간 넘게 남은 시각이었음에도 무슨 내 대기실이 만남의 광장이라도 된 듯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하길 반복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이르지만 다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하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기묘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점심을 먹은 뒤 나는 또 다양한 손님들과 만나게 되었다.
유키에 모리와 함께 나타난 플루티스트 황민재.
두 사람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은 가지 않지만, 꽤 친해져 있었다.
그리고 김백찬 기자와 ‘봉사 센터’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진행하셨던 감독님.
두 사람도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하며, 나를 축하해주었다.
왜 다들 독주회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오롯이 나의 연주회를 듣기 위해 찾아와주셨다는 사실은 실로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 역시 홀로 준비를 해야 했기에 오후 4시가 넘어서부터는 혼자 있게 해달라고 스태프에게 부탁해 대기실로 오는 사람을 전부 막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니 이번에는 또 묘한 긴장감이 샘솟기 시작해 가만히 있기보다는 잠시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밖으로 나갔다.
“와아···.”
나는 무대 뒤에서 암막 천 너머를 보며 감탄을 내질렀다.
아직 독주회 시작은 2시간이나 남았건만 1층 VIP석과 R석은 대부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날 심사해준 한예종의 교수님도 있었고,
“와. 저분까지?”
과거, 내게 가혹한 반주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시던,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박준필 선생님과 그 옆에는 이번 모리스 슈만 콩쿠르 결선에서 맞붙었던 피아니스트 정민주까지 앉아 있었다.
참,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내 독주회를 보기 위해 찾아와주셨다.
“하하핫···.”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한 사람의 운명이 이토록 격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헛웃음 같은 걸 터트리면서도,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
찌이이잉-
대기실에만 들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차분한 심경으로 자신의 독주회를 떠올리던 중이었으나, 드디어 시간이 된 것이다.
“가자.”
이미 갈아입은 정장, 부모님이 큰맘 먹고 성장하는 내 몸에 맞춰 새롭게 맞춰주신 옷이었다.
거기에 광택이 좔좔 나는 구두까지.
나는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대기실 문을 열자 수많은 스태프가 나를 주목했다.
꽤 친해진 사람들은 짤막한 응원을, 평범하게 면식만 있는 사람들은 미소를 보내온다.
터벅, 터벅,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내 걸음에 맞춰 울려 퍼졌다.
이제 단 세 걸음이면, 나는 이 어둑한 ‘배경’을 벗어나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로 향한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실제로 9백 명에 달하는 인파를 코앞에 두자 그 인기척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잠시 그 감각에 당황하며 내가 걸음을 멈추자 누군가 내 오른 어깨를 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걱정하는 얼굴의 지은이가 있었다.
“침착하게. 리허설에서 했던 대로만 하면 돼 성현아.”
듣고 있었구나.
몰랐다.
딱히 체감하진 못했지만 역시, 나는 오늘 온종일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덥석,
무의식중에 내게 짤막한 응원을 해준 지은이의 손을 잡아버렸다.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을 잡고 잠시 심호흡을 하니 긴장이 조금씩 풀려오는 걸 느꼈다.
“서, 성현아?”
“와. 역시 너희 사귀는구나? 얼마나 됐어?”
당황하는 지은이와 달리 반대쪽에서는 태평한 목소리의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대기실을 나왔을 때부터 같이 걸어왔던 것 같기도 했다.
“안 사귀는데···.”
나도 모르게 민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응? 진짜?”
안 사귄다는 말에 놀라는 민호를 보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은이의 따스한 손이 긴장을 풀어주었고 민호의 가벼운 농담이 용기에 불어 넣어줬다.
두 사람은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여기서 내 무대를 관람하기로 했던가.
아, 솔직히 아까 대기실에서 셋이 무슨 대화를 나눴었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튼, 나는 방금까지의 초긴장을 모두 잊어버린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응. 안 사귀고 있어. 아직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고개를 다시 지은이에게로 돌리자.
‘어, 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홍당무가 된 지은이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더 활짝 미소를 지었고 마침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무대를 향해 걸었다.
그래. 9백 명이면 어떻고, 1천명이면 어떠랴.
이곳이 바로 내가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그 독주회 아닌가.
많은 것이 변했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건 바로,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고, 그런 내 눈앞에 피아노가 있다는 사실.
인사를 마친 나는 피아노로 향했다.
차분히, 아주 느릿하게 나의 손은 건반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 내 뒤에는 앞으로의 목표인 민호가 있다.
그리고 지금껏 그토록 바라왔던 독주회는 내 눈앞에 있다.
주저와 고민과 긴장이 빚어내던 머뭇거림을 벗어던지고, 용기를 낸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손끝과 건반이 만나는 그 순간,
[C. Debussy – Claire de Lune](드뷔시. 달빛)
대극장은 시퍼런 달빛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