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
11. 어 템포 (A tempo, 본디 빠르기로) -2
펄럭,
동기 피드백을 마친 학생들이 하나, 둘 기숙사로 향하고 혼자 남은 혜선은 학생들이 남긴 답안을 채점하던 중이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펜.
대부분은 B+에서 C+ 사이를 오가는 피드백뿐이었기에 혜선의 채점은 거침없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오늘은 첫날이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도착해 있을 자신의 짐을 정리할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처음 집을 나와 생활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게도 마음은 심숭생숭 할 것이며 머릿속도 공부가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
그 때문에 본래 첫 번째 피드백은 나눠준 종이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게 정상인데···.
“신기하네.”
반을 넘어 한 장을 가득 채워버린 두 학생.
김민호와 최지은.
그리고 그 둘을 가뿐히 넘겨버릴 정도로 양이건 피드백의 질이건 훌륭한 학생이 바로 성현이었다.
“이성현.”
역시 M스튜디오 출신인가, 라고 단순하게 치부하기에는 피드백 내용물이 너무 차이가 났다.
고등학교 3학년이 적을 법한 피드백을 말끔하게 적어놓은 김민호.
그리고 중간쯤에서 바이올린의 피드백을 끝마쳤다가 급하게 더 채워 넣은 듯한 내용의 최지은.
그리고 그런 최지은을 대놓고 자극한 존재. 이성현.
반 학생들은 모두 성현이 피드백 용지를 뒤집는 순간 휘둥그런 눈을 떴었다. 물론 담임인 자신도.
“문 선생님?”
그때 앞문을 열고 피아노 전공의 선생님이 1반으로 들어왔다.
“뭐 하세요? 첫날인데 피드백은 빨리 끝내고 쉬러 가시죠.”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요? 아, 그래요. 김 선생님이 피아노전공이시잖아요. 이거 읽어보실래요?”
“오오. 역시 수석들이 모인 반은 뭔가 다른 가봐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 선생은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그에게 성현의 피드백을 내미는 혜선.
“오. 가득 채웠네요?”
“첫날인데, 기특하죠?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읽는 김 선생. 그런데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와. 이건? 무슨 대학원생이 썼나요? 특히 바이올린 쪽 이해도가 장난 아니네요!”
“그렇죠? 그거 쓴 아이가 요즘 저희가 매일 같이 이야기하던 걔예요.”
“걔요? 아아. 설마 피아니스트 김정석씨가 직접 데려왔다는···!”
“네. 성현이요.”
이성현.
아무런 콩쿠르 수상경력도 없고, 중3 겨울까지 기초레슨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있는 화제의 인물.
정말 혜성같이 등장한 그 아이 하나 때문에 떠들썩해진 것은 비단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민호에 지은이, 거기에 성현이까지, 김 선생님 복 받으셨네요.”
미향예고의 교사진마저 성현의 등장에 한껏 요동치는 중이었다.
***
눈을 뜨자 보이는 밝은 햇살.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껌뻑거린 뒤에야 내가 기절하듯 잠에 빠졌었다는 걸 알았다.
시각은 아침 6시 10분.
어제 맞춰두었던 알람시계가 울리기까지 아직 40분이나 남았다.
“푸우우우.”
등교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주 만세라도 외칠 기세로 내게 칭찬 공세를 퍼붓던 담임선생님.
학기 중에 수십 번은 작성하게 될 동기 피드백으로 그렇게 과한 칭찬을 받게 되니 오히려 담임이 날 괴롭히는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었다.
맹한 와중에 덥기까지 하니
나는 조금 이르지만, 세면도구를 들고 샤워장에 가기로 했다.
샤아아악,
찬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나니 좀 정신이 들었다.
어젯밤, 뒤늦게 내 짐이 도착해 그걸 모두 정리하고 자겠다고 아주 난리를 쳤었다.
그래서 잠드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기절하듯 잠을 잤던 것 같았다.
“후우.”
그래도 정리를 마치고 이렇게 편안하게 시설을 이용하게 되니 마음이 편했다.
역시 등록금을 3백이나 먹는 미향예고 답게 모든 시설이 아주 고급졌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어제 내가 적어둔 포스트잇을 확인했다.
-종합 성적 1등.
-같이 공부할 대상 탐색.
-4월 콩쿠르 신청.
최지은과 김민호는 아무래도 있는 집안 자식들이다 보니 장학금에는 관심이 없다.
게다가 둘 다 공부할 시간에 피아노를 더 열심히 치자는 성격으로 단순히 ‘실기 우수자’ 선발에 있어서는 엄청난 강적이지만,
‘종합 점수 우수자’로 기준을 바꾸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게 된다.
다만, 그 둘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나 역시 피아노 앞에만 붙어있게 되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같이 공부할 애가 있으면 그럴 일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망의 콩쿠르 신청.
이 시점에서 가장 빠른 콩쿠르는 아마 서울시와 미향제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일 것이다.
과거로 돌아온 뒤 맞이하는 첫 콩쿠르.
동시에 현재 무명이나 다름없는 ‘이성현’ 이름 석 자를 다른 이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킬 좋은 기회였다.
먼 과거,
나는 1학년에게 그냥 무대 경험을 늘린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이 첫 콩쿠르에 당당히 통과했던 김민호를 보며 그냥 멍하니 놀라던 학생 A였다.
수많은 배경 중 하나.
오케스트라를 거치고, 나름의 명성을 얻은 뒤에도 그 배경이라는 입장은 변하질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뀔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배경으로 머물지 않을 것이다.
***
일반 교과목을 배우는 오전 수업은 금방 지나고,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오후 전공 시간이 되었다.
한곳에 몰아넣으니 바글바글한 피아노 전공생들.
첫날에는 아직 조가 나뉘지 않았기에 모든 인원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반가워요. 나는 너희의 전공 시간을 담당하게 된 김기택이라고 해요.”
다소 딱딱한 인사말과 반대로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은 훈남이 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현역 피아니스트, 김기택이었다.
이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기억이 많았다.
아무래도 같은 피아노의 전공 선생님이다 보니 얼굴을 마주칠 일도 있었고, 쓴소리를 들은 적도 많아 기억에 남는 분이었다.
이 선생님은 주로 미향예고에 오기까지, 학생에게 있었던 나쁜 습관이나 연주 방식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주시는데,
이 레슨 방식이 나를 담당해주었던 선생님과는 정반대여서 특히 기억에 남은 것 같았다.
“…이렇게 수행평가와 실기고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이번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면 1학기에 가산점이 붙으니 알아두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학사 일정과 점수 요소를 설명해주신 선생님은 이제야 들고 있던 종이를 옆에 있던 피아노에 내려놓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조를 짜야 하니, 첫 테스트를 해볼까요?”
보통의 전공 수업은 선생님과 학생 전체가 마주 본 상태로 진행되어야 하지만,
단순히 머릿수만 세어봐도 마흔이 넘는 피아노 전공생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제1 전공실, 제2 전공실로 분반을 하고, 그러고도 한 피아노를 같이 쓸 조를 짜야 했다.
“그럼 김민호 학생?”
곧바로 선생님은 김민호를 호명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로 걸어가는 김민호.
쓱,
그런데 그는 내 옆을 지나가는 순간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응?”
내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자 김민호는 이내 싱긋 웃으며 그만의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여기 김민호 학생은 다들 아시죠?”
“네~”
모든 피아노 전공생이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입지와 탁월한 실력. 김민호는 또래 피아노 전공생들에게 있어서 스타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피아노는 좋은 연주를 계속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김민호 학생이나 이번 학년 음악과 전체 수석인 최지은 학생같이 뛰어난 학생을 필두로 조를 만들 겁니다.”
슬쩍 올라오는 선생님의 시선.
그 끝에 닿은 학생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안다.
‘한 천재가 전체를 바꾼다.’라는 말이 모토인 미향예고이니까.
성적과 성향을 고려해 조를 짜려고 하는데, 어렵게 짜놓은 조에 갑자기 잡음이 발생하면 싫지 않은가.
아무래도 한 학기간 조장이 될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 처음부터 실력을 보여줄 생각이신 것 같았다.
이내 김기택 선생님은 준비해둔 가방에서 한 악보를 꺼냈다.
“다들 잘 들어두세요.”
피아노 앞에 앉는 김민호.
그는 주저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가 손목부터 아래로 내리는 느긋한 타법으로 곡을 시작했다.
“쇼팽 왈츠 7번.”
첫 음을 누르는 순간,
내 앞에 앉아있던 최지은이 중얼거렸다.
단조 특유의 서정적이고 우울한 감각을 잘 살린 음이 퍼져 나온다.
거기서 느껴지는 녹진한 감각이 순식간에 전공실을 휘감았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향수.
폴란드의 민속춤에 가까운 리듬을 가지면서도 흥겨움보다는 그리움으로 채워진 왈츠는, 말 그대로 쇼팽의 슬픈 감각이 그대로 잘 묻어나는 연주였다.
폴란드의 열정적인 작곡가 쇼팽의 의도를 그대로 따른 완벽한 곡.
‘역시 김민호’라는 말이 또 입에서 나올 만큼 대단한 연주였다.
“어?”
곡이 마무리되어가던 그때,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습관이···?’
넉 달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몸에 배 있던 손목을 쓰지 않는 습관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쁜 습관을 고친다는 것이 말이 쉽지, 실제로 몸을 교정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걸 고작 넉 달 만에 해냈다고?
아니, 애초에 김민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그 습관을 고치지 못했었다.
높은 음색의 아르페지오를 퍼트리며 울리는 마무리의 낮은음.
그리고 아주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서는 자신만만하게 나를 응시하는 김민호.
마치 나에게 자신의 노력을 뽐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좋습니다. 혼자서 고쳤군요.”
그리고 바로 그런 그를 칭찬해주는 김기택 선생님.
아무래도 선생님이 이번 입시 고사의 심사위원이었던 만큼, 김민호의 습관에 대해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그리고 당차게 가슴을 펴며 대답하는 김민호.
그야말로 내가 항상 바라보던 김민호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은 이성현 학생?”
나?
최지은이 아니라?
선생님이 나를 호명하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학생이 나처럼 최지은을 예상하던 것인지 그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성현 학생?”
“아, 예.”
나는 김민호와 바통 터치를 하듯 피아노 앞으로 나갔다.
“같은 쇼팽의 왈츠를 연주해주면 됩니다.”
아,
그러자 피아노 전공생들이 모인 쪽에서 뭔가를 이해했다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민호와 비교하며 좋은 연주의 표본을 언급해주겠지.’
‘그래서 일부러 최지은이 아니라.’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뭔가를 기대한다는 듯한 미묘한 시선을 보내는 선생님이 보였다.
뭐지?
아니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비교를 위해서 날 부른 건지,
아니면 뭔가 특별한 것을 보고 싶었던 건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손이 닿는 자리에 피아노가, 그리고 눈앞에는 연주해야 할 악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연주할 수 있다.
그거면 끝이지 뭘 더 신경 쓰는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자 갑자기 악보에서 서글픈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음정과 어조가 뒤엉킨 구슬픈 울음은 곧장 눈물을 머금은 듯한 음악이 되었고,
그 음색은 내가 향해야 할 연주의 방향성을 노래하고 있었다.
[Chopin Waltz Op.64 No.2](쇼팽. 왈츠 7번.)
언젠가, 중학교 클래식부에서 에튀드 1번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처럼.
이윽고,
내가 그 선율에 손을 얹는 순간 연주는 알아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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