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1
111. 메데시모 템포 (Medesimo tempo, 같은 빠르기로) -3
“내 일정이 너무 당겨졌기 때문이란다.”
시원한 여름밤, 정석 선배는 씁쓸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일정이요?”
“그래.”
선배의 일정이 당겨지는 게 왜 내가 필 하모닉에서 손을 떼라는 결론과 이어지는 걸까.
내가 이에 대해 미간에 힘을 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선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리프만이라는 피아니스트를 혹시 알고 있니?”
물론 알고 있다.
M스튜디오의 마 원장님과 동시대에 활동한 피아니스트로 저번 방학에 민호에게 유학을 제안했던 것도 바로 리프만 오케스트라였다.
“네.”
“그쪽에서 이번에는 나를 초청했단다. 민호처럼 배우기 위한 유학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후원자와 계약을 연장하기 위해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열고자 나를 선택한 거지.”
“그게 왜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정석 선배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번 소규모 경연은 좋든 싫든 내 한국에서의 마지막 커리어가 될 거라는 말이란다.”
“한동안 안 돌아오시는 거예요?”
“그래. 민호랑 달리 난 최소 기한 계약이 2년부터 시작이라···. 성현아, 네 졸업식도 보지 못하게 되겠구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
정석 선배가 리프만 오케스트라에 가게 되는 것은 전생에도 있었던 일이라 ‘언젠가’ 갈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본래 정석 선배가 리프만 오케스트라로 이적하는 건 지금 기준으로 3년 이후의 일이었으니까.
어떠한 변화가 안정성을 추구하던 정석 선배의 도전 욕구에 불을 지핀 것인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전생과 다른 사건들은 대부분 나를 거쳐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아마 선배의 이적이 3년이나 빨라진 건 내가 있기 때문이란 걸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서울 시향의 지휘자님에게 빚이 많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흥미로 참가하게 된 이번 무대에 전력으로 임할 생각이고 말이야.”
“전력이요?”
“그렇지. 적당히 하지 않을 거야. 아주 완전히 서울 시향이 이기도록 최선을 다해서 압도해버릴 거란다.”
정석 선배의 눈빛은 강렬했다.
정말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닿게끔 부릅뜬 눈.
“그런데 압도적으로 패배한 경력 같은 건 성현이 네가 참가하고 싶다는 한국 종합 콩쿠르 예선 심사에 마이너스가 될 거라는 건 뻔하잖니. 그래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거란다. 이해해주겠니?”
이내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금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온 선배.
그러니까 선배가 말한 이번 경연에서 손을 떼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건, 정석 선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번 경연의 승패가 나와 있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당연히 승자는 서울 시향이라는 거겠지.
자신이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것만으로 벌써 승리한 듯 말하다니···.
그 어떤 사람이 말해도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며 핀잔을 들을 말이리라.
하지만 그걸 정석 선배가 하니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는 국내 현역 피아니스트 중에서 ‘최고’를 논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고 이름이 거론되는 인물 아니겠는가.
그리고 선배의 염려대로, 압도적인 패배 같은 경력은 안 그래도 통과하기 힘들다는 ‘한국 종합 콩쿠르’ 예선에서 안 좋은 영향을 주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이 자리에서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한 달 동안 고생했을 텐데, 미안하다. 성현아.”
내가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선배는 나를 위로해주듯 어깨를 토닥여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선배를 향해 말했다.
“재미있겠네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재, 재미?”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정석 선배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버렸다.
“저는 더 좋아요. 오히려 무대 위에서 진심인 선배와 만날 수 있다니 너무너무 기대되는걸요?”
그러나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니 굳었던 선배의 얼굴은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맹하게 변했다.
그래,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분명 ‘현명한’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생에서 안정적이고 현명하기만 추구하는 삶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정석 선배의 열의는 내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윤활유가 되었다.
진심인 선배랑 무대에서 맞붙어볼 수 있다니 반대로 정말 좋은 기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미소를 짓고 있으니 멍하던 선배가 문득 피식, 하며 입을 열었다.
“하, 하하핫, 그래. 성현이 너는 항상 그렇게 나를 놀라게 했었지. 미안하구나. 내가 잠시 까먹고 있었어.”
그리고는 만개하는 정석 선배의 미소.
선배는 내 대답이 정말 마음에 든 듯 밝은 미소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다.
“나중에 원망하기 없기다?”
“전 원망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그러니? 그러고 보면 확실히 그렇구나. 하하하!”
그렇게 선배와 나는 서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했고, 시간이 너무 늦기 전에 인사를 나누고는 갈라져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선배가 곧 떠난다니···.
과거로 돌아와서 그 누구보다 먼저 얼굴을 마주했던 선배가 멀리 떠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
다음날, 나는 지은이와 민호에게 어젯밤 정석 선배와 나눴던 대화를 모두 얘기했다.
“그러면 정석 선배에다가 클래식 버스킹 분들까지 오실 거고, 거기에 서울 시향 연주자들도 합류할 테니까······. 솔직히 승산이 있느니, 없느니 말할 필요도 없겠는데.”
그러자 지은이는 곧바로 염려를 표했다.
그야 ‘서울 시향’에는 이미 그 분야에 있어 전문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필 하모닉’에는 없다.
그런 상황에 고등학생 달랑 셋이 끼어들어 봤자 뭐가 변하겠는가.
사실 그게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역시 정석 선배와 비슷하게 가장 ‘현명하게’ 사고하는 지은이 다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민호의 첫마디는 달랐다.
“성현아 혹시, 그 클래식 버스킹이라는 팀원분들은 대부분 뭐 하는 분들이셔?”
역시나 어떤 상황에 부닥치건 민호는 대책을 떠올리려 했다.
“음 아마 대부분은 직장인이시고 내가 알기로 홍진태 씨랑 다른 두 분만 서울 시향 소속이실 거야···.”
“아, 그러면 같은 팀원들끼리 연습량도 많이 차이가 날 텐데 평소에는 어떻게 하는 거야?”
“아마···.”
그렇게 나와 민호가 머리를 모아 곧바로 상대 팀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자, 옆에 있던 지은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우리의 대화에 참여해 함께 논의를 해주었다.
“고마워 지은아.”
이런 지은이의 배려에, 지금까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던 부분을 입에 담아 감사를 표하자 지은이의 딱딱해져 가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불가능한 일에 진심으로 도전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자칫 바보같은 행동을 보일 수는 있지만, 내가 아는 ‘천재’라는 족속들은 언제나 그 바보 같은 일을 현실로 이뤄내는 존재였다.
“그러면···.”
“서울 시향도 약점이 있을 거야.”
“팀원들 간의 연습량 차이? 아니면 같은 곡 해석을 공유하지 못한 다거나.”
그리고 어쨌건 참가를 결심한 지은이와 민호는 그 ‘천재’라는 명칭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내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기쁨의 미소를 짓고는 대책 회의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를 주고받던 중, 나는 김철용 지휘자에게서 이 일을 받아들였던 순간부터 내가 떠올려봤던 방법을 드디어 입에 담았고,
“와, 그거 아이디언데?”
“통상적인 방법을 거꾸로 생각하자는 거구나?”
지은이와 민호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내가 본래부터 생각하고 있던 그 방법, 거기에 오늘 오전 시간을 통째로 쏟아부어서 떠올려낸 다양한 아이디를 조합해보자···.
“와, 이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드디어, 처음에는 곧바로 낙담을 표했던 지은이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 우리 주제는 이걸로 결정?”
“응.”
“이의 없음.”
“오케이!”
그렇게 가망이 없어 보였던 승부에 대책을 순식간에 마련해낸 우리는 빠르게 점심을 먹고 필 하모닉의 협주홀로 출발했다.
***
필 하모닉 협주홀 건물에는, 중앙에 있는 오케스트라 협주장 옆에 중간 정도 크기의 합동 연습실이 존재한다.
그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기자 선별된 여섯 명의 단원분들이 앉아계셨다.
“오, 작은 선생이랑 똑똑이 친구들, 오늘부터 연습 시작하는 거 맞죠?”
왼쪽부터 차례로 현악기인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목관악기인 트롬본, 바순, 오보에의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명백한 프로들이었지만, 참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껏 자신들이 해본 적 없는 어딘가 참신하고 새로운 연습을 하게 되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당돌하게 앞에 서서 그렇게 말했고 충분히 친해진 그들은 다행히도 내 말에 주목해주었다.
“우선 이거 받으세요.”
그렇게 지은이와 민호의 손을 거쳐 배분된 프린트는 간단한 프로그램 북이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베토벤 협주곡 4번, 거기다 모차르트 협주곡 20번?”
“세 곡으로 되겠어요?”
“아니지 악장만 따져도 아홉 개나 되니까 오히려 긴 거지.”
그리고 그 준비하는데 단 30분도 소요되지 않은 프로그램 북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단원들은 각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누군가는 버스킹에 이런 곡이 과연 어울릴까를 고민했고, 다른 단원은 너무 단순하고 유명한 곡만 있는 건 아닌지 불만을 표했다.
단 3곡의 이름을 보고서 수십 가지의 말이 오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식견이 장난 아니게 넓음을 알 수 있다.
역시, 베테랑다운 반응이라는 거지.
“크흠, 그럼 계속 얘기해도 될까요?”
“아이고 미안, 미안 계속해.”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저는 버스킹 전문 팀까지 보유한 서울 시향에게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는 특별한 변곡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야. 뭐,”
“솔직히 그렇지.”
“정면으로 붙어서 이기고 싶냐고 물었을 때 까놓고 나, 우리 작은 선생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잖아.”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여러 가지 사족을 덧붙이는 단원들.
부드럽게 이어 말하기에는 좀 불편했지만, 그만큼 관심을 보이는 것이니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요. 그래서 저희는 협주곡을 연주하면서도 전혀 오케스트라답지 않은 형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 답지 않은 형식?”
“지금 나눠드린 프로그램 북은 그냥 앞으로 열흘간 진행할 연습의 베이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베이스라고? 이미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곡들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묻는 표정의 단원들.
그들은 대부분 내 이야기를 우리가 이 곡을 ‘편곡’할 예정이라고 이해한 듯했다.
뭐 굳이 따지면 틀린 것은 아니려나.
“네. 이미 완성도가 높던, 낮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내 말에 일제히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는 표정이 되는 단원들.
나는 이제 충분히 관심을 끈 것 같아 이미 내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입에 담았다.
“전 이번 버스킹에서 오케스트라가 재즈로 연주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오케스트라와 재즈.
연습에 연습을 거쳐 ‘완벽한’ 화음을 이뤄내고 그 선율을 공연에서 선보이는 오케스트라, 그리고 즉흥적이고 변칙적인 색이 강해 언제나 규정된 악보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연주를 추구하는 재즈.
두 형식은 어딜 어떻게 봐도 공존할 수 없어 보인다.
“우리가 재즈를?”
“이 구성으로 이제부터 재즈풍으로 곡을 다 편곡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아?”
“오케스트라 단원이 재즈라니···. 솔직히 신선하네.”
실제로 단원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내 말에 어느 정도 동조해주던 것과 달리, 이번만큼은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예상하던 바였다.
“힘들게 편곡할 생각 없습니다.”
“편곡 안 하고 재즈풍이라니, 진짜 즉흥 연주라도 하려고 그래? 우린 아홉 명이나 되는데?”
지금 말한 비올리스트의 지적은 타당했다.
이들은 모두 실력 있는 단원이라 시간만 있다면 즉흥 변주에 맞춰주는 일 따위 식은 죽 먹기로 해냈을 테지만, 정작 그 시간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힘든 것은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괜히 내가 이런 광경을 예상하였겠는가.
당연히 적절한 대비책이 있었다.
“네, 제가 아는 사람, 넷이 모이면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가 있거든요.”
“네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렇죠.”
나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묻는 비올리스트에게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 연습량이 쪼오오금 많을 테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단원들은 내 마지막 당부가 같잖게 여겨졌는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이 되었는데, 그들은 모를 것이다.
내 기준으로 ‘조금 많다는 게’ 얼마나 많은 건지 말이다.
“오늘부터 스파르타로 갈게요?”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