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4
114. 떠나는 이들
아직 TV와 지상파 방송사에 입김이 강하던 2010년의 중순.
케이블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시청률 9%.
아직 케이블 방송사 기획의 특별한 드라마들이 나오기 전 시대였기에, 사실 케이블 방송사에서는 단 5%의 시청률을 넘기는 것만으로 ‘대박’이란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어떤 방송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관심을 끌어모은 것일까.
화면 안에는 잘 조성된 스튜디오에 캐쥬얼한 복장의 여성 사회자가 맞은편에 앉은 이들을 향해 어떤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필 하모닉’의 마에스트로이신 김철용 선생님께서는 이번 무대 연습에는 아무런 개입도 안 하셨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마찬가지로 맞은편 소파에 앉은 사람들은 지긋한 나이가 돋보이는 흰 머리의 두 남자.
잔뜩 놀란 표정의 사회자에게 김철용은 허허실실 웃으며 말했다.
“개입···. 을 했네, 안 했네. 말하기 전에 저는 버스킹에 대해 아예 모르는걸요.”
“그런 무대를 보여주셨는데요?”
“하하핫, 그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우리 필 하모닉의 자문을 맡아준 이성현 학생의 작품이었습니다.”
와아아-
김철용이 그렇게 단언하자 주변에 앉아있던 ‘클래식 자문 위원단’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마찬가지로 진행을 맡고 있던 여성 사회자도 조금 전의 보여줬던 인위적인 표정이 얼굴에서 사라지고 정말 놀란 얼굴이 되어서는 말했다.
“그, 그러니까 무대 기획부터 변주되어 연주된 곡들의 모든 편곡, 프로들을 상대로 하는 연습 주도까지 모두 이성현 학생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신가요?”
프로와 고등학생.
아무리 성현이라는 아이가 천재라 해도 그 격차는 단순한 천재성만으로 매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클래식의 선율.’이라는 이 방송의 사회자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인데, 이어지는 김철용의 말에는 몸을 들썩일 정도로 더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무대에 올랐던 그 단원들은 성현 학생이 직접 뽑은 사람들이었죠.”
“네?! 그러니까 그 말은 즉···.”
“예. 성현이는 이미 그 나이에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 높았습니다. 제가 필 하모닉에 모셔온 그 날 이미 말이에요.”
단순히 단원들의 숫자를 줄이고 구성을 유지한다고 해서 좋은 연주가 나오리란 법은 없다.
다양한 악기가 조합된 팀의 적절한 인원을 구성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높고 넓은 지식이 있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는 서울대 음대 출신이자 이미 1년 넘게 ‘클래식의 선율’이라는 방송을 맡고 있던 이 여성 사회자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오케스트라 지식을···. 엇! 죄, 죄송합니다.”
실시간 방송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리게 될 정도로 말이다.
이에 여 사회자는 급히 자신의 입을 가렸는데 오히려 두 마에스트로는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클래식의 선율’은 몇 달 전, 모리스 슈만이 직접 출현해 나를 직접 언급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방송이었다.
그때는 아무리 내 사진을 멋대로 공개했을지라도 시청률이 3%가 나오면 잘 나왔다 여기던 수준이었기에 피부에 와닿는 파급력을 갖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청률이 무려 9%.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TV가 있는 집이 열 곳 있다면 그중 하나는 이 방송을 봤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방송에서는 무려 1시간에 걸쳐,
‘이성현 학생은 닫혀있던 제 귀를 뜨게 해준 학생이었습니다!’
‘그 어떤 베테랑도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한 사람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걸 증명해준 거죠.’
‘성현이는 천재예요. 지금껏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다 비웃어 넘길 만큼 대단한 역대급 천재 말입니다!’
이런 말을 계속해대니 낯부끄럽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참고로 이번 일을 통해 내 별칭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렇다면 성현 학생은 그야말로 혼자 움직이는 오케스트라.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거군요?’
나를 보고 움직이는 오케스트라란다.
아마 악기들에 대한 지식과 단원들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낸 점을 높게 평가받은 듯했는데···.
그거 사실 전생에 기억으로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괜히 머리만 아파 왔다.
“하아.”
여하튼,
소규모의 오케 경연에서 보기 좋게 승리를 거둔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나중에서야 김백찬 기자님에게 전화를 받고 알게 된 사실인데, ‘클래식의 선율’이라는 프로그램이 갑자기 시청률이 폭발했던 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기습적으로 진행했던 그 작은 ‘오케 경연’ 그 현장에 유명 연예인이 있었고, 그가 자신의 SNS에 이를 언급했다고 한다.
벌써 SNS가 적잖게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갔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지 약 반년, 전생에는 관심이 없어 몰랐던 일들을 참 많이도 알게 되는 듯했다.
‘성현아. 그런 빅 이벤트가 있는데 나를 안 부르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참고로 김백찬 기자님은 그렇게 말하며 좀 많이 서운해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번 일은 내가 주도한 일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말을 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웬 한숨이야?”
내가 의자에 앉아 가만히 숨을 내쉬고 있으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선배, 벌써 수속 끝났어요?”
멋들어지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정석 선배.
오케 경연이 끝나고 일주일 뒤인 오늘은 바로 정석 선배의 출국 날이었다.
“그 클래식의 선율이라는 방송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하핫, 대신 그 덕분에 요새 연예인급 인기몰이 중이니까. 오히려 고마운 것 아니겠니?”
“저는 이렇게 불편한 게 싫다고요···.”
“선글라스 잘 어울려 성현아.”
“놀리지 마세요.”
정석 선배의 말대로 나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도 푹 눌러쓰고 있다.
내 인기에 대해서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 없이 공항에 왔다가 한차례 인파에 둘러싸였던 터라 정석 선배의 물건을 빌린 것이었다.
“출국 시간까지는 얼마나 남으셨어요?”
“음, 앞으로 한 시간 남았으니까. 30분 정도 있다가 가야지.”
그리 말하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정석 선배.
그는 아마 2시간이나 일찍 왔다가 인파에 둘러싸여 한참 동안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나를 떠올리는 듯했다.
“근데 참 신기하네. 그 중학교에서 성현이 널 봤을 때는 설마 1년도 안 돼서 이런 대단한 사림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 내 예상과 달리 정석 선배는 예전일을 회상하고 계셨던 것 같다.
묘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는 왠지 모를 울컥함을 느꼈다.
그래, 그 달빛이 내리쬐던 음악실에서 정말 우연히 정석 선배를 만나지 못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M스튜디오와의 연관 점이 없으니 민호와 지은이를 만나는 건 입학 후가 되었을 것이며, 이렇게나 친해지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선배의 도움으로 성공해낸 독주회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내진 못했겠지.
김백찬 기자에게 듣기로 그는 그 독주회에서 내 팬이 되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저널리즘에 폭격을 정통으로 맞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음악을 접한 지 10개월’이란 말이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부모님과 화해를 할 때도 정석 선배는 바쁜 일정 속에서 날 위해 시간을 만들어주셨었고 그 외에도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두 개의 연주법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연주자라는 발상을 해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현재, 다양한 주법을 마음대로 오가는 연주자 이성현은 없었으리라.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나는 정석 선배에게 큰 도움을 받기만 한 것 같다.
“선배···.”
“응?”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선배한테 받은 도움만 떠올려봐도 이미 양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예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가.”
내 말을 들은 정석 선배는 나와 맞춰주기 위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선배의 눈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성현이 너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단다.”
“제게요?”
“응. 나는 말이다? 요 3년, 아니 이젠 4년째구나. 어딜 가든 멋진 대접을 받고, 어디서든 칭찬을 듣다 보니 좀 오만해져 있었어.”
“선배가요?”
“음악에 대한 열정은 벌써 식어버린 지 오래였고, 피아노를 치는 것도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단다.”
의외의 말이었다.
그 열정적인 정석 선배가 피아노에 질려있었다니.
“본래라면, 리프만 오케스트라의 제안도 나는 아마 거절했을 거란다. 그런데 어디 사는 어떤 멋진 친구가 내게 많은 걸 가르쳐줬거든.”
‘어떤 멋진 친구’라는 말을 하며 나를 응시하는 걸 보면, 선배는 아주 노골적으로 내게 영향을 받아 오케스트라 이적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출국을 결정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고마워 성현아. 널 보고 있으면 정말, 옛날에 마주혁 원장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내가 계속 떠오른단다.”
그건, 정말 가슴이 아프면서도 두근거리는 일이었지.
라고, 선배는 작게 중얼거리며 내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잡았다.
“네 덕분이야. 네 덕에 나는 다시 피아노를 즐길 수 있게 됐어. 정말 고맙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정중한 어조로 고개까지 숙이는 정석 선배.
“아니, 서, 선배?!”
그에게 있어 나를 옆에서 지켜본다는 건 내가 떠올리고 있던 사실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던 모양이었다.
“하하하핫.”
내 놀란 얼굴을 보며 정석 선배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우리 두 사람의 만담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국 게이트로 향하는 선배와 나.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함께 걸었다.
이제 저 게이트를 선배가 넘어가면 다시 만나는 날은 아무리 빨라도 2년 뒤, 그렇게나 많은 도움을 받아놓고는 막상 이별 선물 하나 준비하지 못했다는 게 내심 후회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어물쩍거리며 발걸음을 늦추니 선배는 뒤를 돌아 발을 멈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셨다.
“아, 그래. 내가 그걸 말 안 했구나.”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가만히 있는데, 선배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성현아. 네 1승이구나.”
“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승부욕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란다.”
“그렇죠?”
“그러니까 아까 성현이가 해줬던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는 철회해주지 않겠니?”
“처, 철회요?”
“그래. 난 사실 너와 내가 다음에 만나는 날이 2년이나 3년 뒤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단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석 선배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에스트로 리하르트에게 나를 추천해서 내게 독일 유학을 주선해주겠다는 말일까.
아니, 그런 말을 하는데 왜 1승 1패를 논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내가 복잡한 생각을 하던 와중 정석 선배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1년 내로 세계무대에 나와라. 성현아. 그러면 우리는 거리 다음으로 콩쿠르에서 다시 맞붙어볼 수 있지 않겠니?”
“제, 제가 세계무대에요?”
농담하는 걸까 싶긴 했지만, 정석 선배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래. 비록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이게 내가 네 첫 스승으로서 너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과제란다.”
1년 내로 세계무대에 서라니···.
정작 현재의 내가 음악을 공부한 게 1년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 말이다.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묻는 정석 선배의 눈빛은 언제나 같은 제자를 보는 것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는 마치 민호를 바라보던 나의 눈빛과 같은, 경쟁자를 응시하는 듯한 경쟁심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는 즉, 피아니스트 김정석이 나를 라이벌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다시 말해 선배는 나를 믿고 인정해준 것이다.
무려, 정상에 서 있는 자신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연주자라고 말이다.
“네!”
그걸 눈치채고 말았기에 나는 힘을 담아 답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배가 준 그 과제를 꼭 이뤄내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꼭 선배를 만나러 갈게요.”
“그래.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분명 사제지간으로 출발한 사이였던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그 누구보다 신뢰하는 라이벌이 되었다.
정석 선배는 모든 미련을 떨친 표정으로 출국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세계무대라니···.”
내가 말하고 나서도 너무 뜬금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세계무대는 내가 전생에서도 밟아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이 나이에 그곳을 목표로 하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이제 나는, 전성기의 자신마저도 아득히 뛰어넘을 시간이 된 것이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일 텐데, 이상하게도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재미있어질 거 같네.”
그렇게 정석 선배는 출국과 함께 내게 ‘세계무대’라는 목표를 하나 남기고 떠나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