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6
116. 바실란도 (Vacillando, 흔들리면서)
‘백건오 한국 종합 콩쿠르’는 피아노 콩쿠르가 아니다.
그 때문에 나와 지은이 그리고 민호가 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에는 다양한 악기 명과 과제곡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피아노 – Franz Schubert] [바이올린 – Ernest Chausson] [플루트 – Sigfrid Karg Elert] [첼로- ······.]과제‘곡’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간결한 작곡가들의 이름만 기입되어 있던 것이다.
“이게 뭐야!?”
가장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지은이였다.
그녀는 눈썹이 살짝 찌푸려질 정도로 놀라서는 새된 소리를 내질렀는데 워낙 커서 교감 선생님의 개인 교무실에 그 목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그녀의 당혹감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백건오 한국 종합 콩쿠르는 특별함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작곡가의 의도에 맞춘 연주를 고평가하는 아주 전형적인 ‘콩쿠르’였다.
소위 전통과 이미 정착된 문화를 중시하는 이런 권위 있는 콩쿠르의 특성상, 보통은 작년에 했던 방식으로 올해도 진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예선 1차부터 그 형식이 변한 것.
심지어 나는 전생에도 ‘한국 종합 콩쿠르’에서 과제곡이 작곡가의 이름으로 나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즉, 과거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분명 나, 혹은 나와 엮인 누군가가 변했기 때문이겠지.
내 주변에서 국내 최대 콩쿠르의 형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금천문화재단의 김 이사장님이나 모리스 슈만 정도인가.’
만약 모리스가 이번 콩쿠르의 권위자와 어떤 진솔한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 불가능하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참,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가 혼자 조용히 변화의 원인을 찾고 있으니 침착하게 모니터를 응시하던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정곡인데 자유곡이라는 건가? 그런데 그 의도를 모르겠네.”
응?
지은이는 당황하고 나는 딴생각을 하던 잠깐 사이에 민호는 뭔가를 알아낸 걸까.
“의도?”
내가 민호의 말에 그리 물으니 그는 모니터에 표시된 어떤 글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봐.”
그래서 내가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자 담백하게 피아노 부문 옆에 적혀 있는 한 마디.
-하지만, 여긴 베토벤이 없잖아!
“베토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분명 저 말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작곡가 슈베르트가 죽기 전에 했던 말이 분명했다.
자신이 선망했고, 존경했던 작곡가에 대한 마음이 느껴지는 유언.
그런데 그 글귀가 어째서 권위 있는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 옆에 덩그러니 적혀 있는 걸까.
그런 걸 내가 고민하는 사이, 민호는 과제곡이 공개된 홈페이지를 정독하고는 말했다.
“일단 주최 측에서 글로 적어놓은 부분은 다 읽어봤는데 기본적으로는 과제곡에 적힌 작곡가의 곡을 2곡 골라서 예선 심사일까지 준비해오면 되는 모양이야.”
단순히 참가자의 자유로 2곡을 고르고 연주하는 것뿐이라면 단순히 자유곡 2곡을 과제곡으로 했어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직접 작곡한 곡이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주최측은 이상하게도 슈베르트의 유언을 굳이 이 과제곡 홈페이지에 적어놓았다.
심지어 가장 눈에 잘 띄는 피아노 부문이라는 큰 글씨 밑에.
“대체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걸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콩쿠르에서 아무런 의도도 없이 이런 특별한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하긴 힘들다.
그렇게 내가 민호와 둘이서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을 하고 있자 한참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지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유언을 적어둔 거야. 뭐, ‘원전연주’라도 하라는 건가.”
그런 말을 하는 지은이의 어조는 커다란 수수께끼를 눈앞에 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들렸지만, 그 단어는 달랐다.
나는 머릿속에서 뭔가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는 말했다.
“원전연주라고?”
내가 놀란 목소리로 말하자 오히려 내 격한 반응에 놀라 눈을 껌뻑이는 지은이.
“응? 으응. 저번부터 듣게 된 3학년 작곡 수업에서 들었거든. 사실 우리가 연주하는 곡들 아무리 작곡가의 의도나 악보에 맞게 연주한다고 해도 그 시대의 연주랑은 조금 달라.”
“다르다면?”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조율법이 있고 성향이라는 게 있잖아? 거기서 당대의 소리를 최대한 재연하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시대연주, 정격연주라고도 불리는 원전연주거든.”
지은이의 차분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원전연주’
사실 우리가 평소 연주하는 곡들과 작곡가가 실제 살았던 시대에 소리는 다르다.
비유하자면 과거의 악보들을 성경이라 생각해보면 쉽다.
성경은 한 구절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면서도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재해석되는 일이 많지 않은가.
우선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시대에 맞는 재해석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정형화된 해석일지라도 엄연히 따지면 결국 ‘재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악보도 이와 같다.
현대적인 셈여림과 조율 상태와 그 시대의 상태는 다르다.
때문에 ‘듣기 좋은’ 소리를 넘어 ‘당대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방금 지은이가 내게 설명해주었던 ‘원전연주’인 것이다.
“그런데 유언이랑 원전연주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야?”
내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묻자 지은이는 답했다.
“음, 그게 나도 얼마 전에 알게 된 건데, 원전연주를 목표로 하는 악보에는 작가의 유언 같이 상징적인 말을 짧게 적어두기도 한다더라고?”
피아노계보다는 작곡을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관행.
하지만 금천문화재단 소속의 작곡가들이 그런 방식을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비교적 최근에 그런 문화가 한국에 정착되고 있다고 지은이는 말했다.
“그러니까, 피아노 콩쿠르에서는 분명 다른 의미로 쓰인 거겠지.”
한숨을 픽 내쉬면서 그리 말하는 지은이.
확실히 피아노 콩쿠르에서 작곡계의 관행으로 의도를 숨기는 건 좀 이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교육에 한한 이야기.
“아니야. 지은아. 이거 정말 원전연주 지향할 거라는 표시일 수도 있겠어.”
“정말?”
내가 말하자 지은이는 물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분히 과제곡 명단이 나열된 모니터를 다시금 천천히 바라보고 확신했다.
“피아노 전공생이라도 대학에서는 전공 점수를 채워야 해서 원전연주 관련 강의를 수강하게 되거든.”
“응? 음대?”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의 지은이.
나는 차분하게 다시금 설명했다.
‘원전연주’는 실전경력을 중시하는 미향예고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사항이다.
수업 때 들은 적은 분명 있지만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지나가게 되는 정도.
실제로 민호도, 나도 유언과 원전연주의 연관성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막상 음대에 가면 학생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전공 점수를 일정량 이상으로 채워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원전연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생각했을 때 프로를 대상으로 하는 ‘백건오 한국 종합 콩쿠르’에 참가하는 이들은 대다수가 음대를 졸업한 사람들.
그러니 작곡계의 관행을 통해 이번 예선이 원전연주를 지향하리라는 사실을 이렇게 1시간 가까이 고민하는 이들은 사실상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까 딱 미향예고의 저학년이 아니라면 다들 알고 있을 내용이니까. 과제곡이 그 방식으로 공개돼도 이상할 건 없다는 거지?”
내 설명을 듣던 민호는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을 구하듯 물었는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도 뭔가 걸리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미향예고의 저학년이 아니라면 다들 알고 있을 상식이니 문제가 없는 과제곡 출제방식.
그런데 이건 반대로 생각하면 미향예고의 저학년만 모를 방식이라는 뜻 아닌가.
그런데 하필 요새 한껏 명성을 크게 얻고 있는 나와 민호가 참가 의사를 밝힌 이 콩쿠르 과제곡 출제방식이, 미향예고 저학년만 알기 힘든 방식으로 공개되었다?
“확실히···.”
“뭔가 싸한데.”
마침 지은이와 민호도 이 묘한 지점을 눈치챘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거대한 악의가 느껴지는 상황.
“마주혁 원장님께 상담해볼까?”
“아니면 내가 아버지한테 여쭤볼게.”
지은이는 곧바로 M스튜디오에, 민호는 이번 콩쿠르의 후원과 진행을 맡은 단체가 ‘금천문화재단’인 만큼 김 이사장님을 거론했는데,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까부터 ‘원전연주’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하는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뭘까.
분명 전생의 김민호가 한창 접혀있던 날개를 펴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나는 머릿속 기억의 저편에 묻혀 있던 어떤 것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왜, 왜 그래?”
“성현아 괜찮아?”
갑자기 소리를 쳐서 그런지 놀란 얼굴의 민호와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은이.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은 듯 개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계속 심각한 표정을 짓고 이던 내가 돌연 그리 말하자 지은이와 민호는 내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의문을 표했다.
“잘 들어봐, 우리는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연습할 때만 의도적으로 다른 연주를 해야 해.”
“응? 다른 연주?”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때만?”
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의 의문을 해소해주기보다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걸 우선했고, 두 사람은 내가 몰아붙이듯이 말하자 일단 조용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해야 할 요소를 두 사람에게 말해주면서 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인간의 짓이라는 걸 초장에 눈치챌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그래.
굳이 미향예고 저학년의 학생들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이번 예선 심사 방향을 공개한 주최측, 거기에 한창 인기몰이를 시작한 신인을 그 표적으로 삼는 졸렬함까지.
이것과 똑같은 레퍼토리의 사건을 나는 분명 전생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명 ‘신인 죽이기’라고 불리는 이 졸렬한 모략은 훗날 밝혀지길 어떤 ‘한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전생의 김민호마저도 ‘그 사람’ 때문에 한동안 고생을 했었다.
그 사람.
정석 선배와 같이 탑급 연주자들을 언급할 때 현역이 아님에도 언제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클래식 협회’의 관계자.
‘피아니스트 곽재윤.’
그는 전생에 나와도 아주 치졸하고 비열한 일로 얽힌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그가 꾸민 짓이 분명했다.
그는 놀라울 만큼 번거로운 수를 써가며 신인을 방해하고, 망신을 주고자 이런저런 공작을 펼치는 인물로, 하는 짓은 놀라울 만큼 어이가 없는 것들이지만, 중요한 건 절대로 자신이 의도적으로 신입을 괴롭혀왔다는 걸 잘 숨길 방법만을 고수하는 놈이었다.
그 때문에 전생에도 놈이 민호를 꾸준히 고의로 괴롭혀왔음이 입증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었는데···.
“이번에는 사람 잘못 골랐다. 이 자식아.”
나는 이미 그 인간이 어떤 놈인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전생에 먹은 엿을 그대로 돌려줄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