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18
118. 바실란도 (Vacillando, 흔들리면서) -3
나를 향하는 악의가 눈앞까지 들이닥쳤을 때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은 뭘까.
상대방의 악행을 모두에게 알린다?
그런데 현재의 경우 상대방은 철저하게 우연이나 사소한 오해를 통해 자신이 도망칠 쥐구멍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둔 상황이었다.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주먹을 들고 턱주가리를 날려버리는 거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안녕하세요.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곽 재윤 부장님?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나는 곽재윤이 내게 내민 명함을 천천히 훑어보며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이다.
뭐, 이번 생만 보면 처음 보는 게 맞긴 하지만.
“협회에서는 부장이라고 불리지만, 피아니스트이기도 하고 지금은 심사위원 자격으로 와 있기도 하니 편한 대로 불러주렴.”
그러자 원래부터 동그란 눈이 초승달과 같은 실눈을 그려 더 부드럽고 유순한 표정을 지으며 그리 말하는 곽재윤.
누구에게든 자연스럽게 호감을 얻으려 하는 그의 버릇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네. 부장님.”
그에 맞춰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내 ‘부장’이라는 발언에 잠시 눈썹이 흔들리는 곽재윤.
그는 연주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라 부장이란 호칭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 부장님은 협회에서 쓰는 직함이라 피아니스트나 심사위원······.”
“죄송한데 제가 너무 긴장해서 그런데요. 왜 저를 찾아오신 건지부터 여쭤봐도 될까요?”
말을 끊자 다시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또 막상 웃는 얼굴을 풀지도 못하는 곽재윤.
“아이고, 내가 실례했구나. 사실 이번 1차 예선 공개에서 우리 쪽에서 작은 실수가 있었으니 사과를 하고자 온 거란다.”
“원전연주 말이신가요?”
“그, 그래. 듣기로는 예선 준비에 꽤 차질이 생겼던 것 같은데 이 자리를 빌려 내가 사과를······.”
“아, 그거 아무 문제 없어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또 곽재윤의 말을 끊으며 단언하는 나.
내 당돌한 발언에 그는 잠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을 거다.
보통 그의 주변에는 그의 말을 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뿐더러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틀이나 예선 형식을 착각하고 있었다고 들었단다. 그래도 괜찮은 거니?”
“그래도 닷새나 시간이 남았었잖아요? 아무 문제 없죠.”
저쪽에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선뜻 사과를 건네는 것조차 막아버리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나.
다소 오만해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내가 그의 괴롭힘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방식이었으니까.
그의 악행을 떠벌리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주먹을 냅다 휘두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네가 아무리 수작질을 벌여봐야 다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현재 이틀간 삽질을 했다 해도 이런 ‘한국 종합 콩쿠르’ 예선 정도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말 그대로 ‘천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이었다.
“그, 그래. 익히 들었다만 역시 담이 크고 아량이 넓은 친구로구나.”
그러자 역시나 사과를 빙자해서 내 신경을 긁지도 못하게 된 곽재윤은 씁쓸한 어조로 그리 말했다.
참고로 얼굴은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그대로였다.
이에 나는 회심의 한 방을 날리기로 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눈 덕분에 긴장이 조금은 풀렸어요.”
그렇게 예의 바르게 배꼽에 손을 모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
인터뷰 때를 위해 연습해둔 내 영업 미소를 본 주변의 예선 참가자들은 순간적으로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뭐야?”
“재수 없는 애는 아니었나 보네.”
“예의도 바른데?”
“역시 성격 좋다는 소문이 맞는가 보네.”
곧바로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런 웅성거림.
곽재윤에게 강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겠다고 정작 주위에 모인 연주자들에게 비호감을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로써 놈은 예선 직전에 나를 찾아와 멘탈을 흔들지도 못했고 오히려 자신이 펼친 수작질이 무의미하다는 것만 확인한 꼴이 되었다.
심지어 훗날 걸고넘어질 ‘건방진 놈’이라는 인식까지 방금, 깨끗이 지워졌고 말이다.
눈앞의 곽재윤은 아직도 미소를 지은 표정 그대로였지만, 내 감사 인사를 받고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는 점에서 그가 크게 당황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엿 먹이러 온 놈에게 오히려 엿을 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휴~’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좀 놀랐었거든.
***
천재,
곽재윤에게 있어 천재란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동 세대의 피아니스트들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하던 남자.
M스튜디오의 김정석.
그는 나이, 학연, 소속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실력 하나로 우뚝 선 사람이었으며 동 세대의 피아니스트를 존중해주는 법이 없는 무정한 놈이었다.
그는 언제나 클래식 협회, 협회장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당당했다.
말을 끊은 적도 수없이 많으며, 말을 걸면 노골적으로 귀찮은 티를 내기까지 했다.
함께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했을 뿐인데 말이다.
협회에서, 국내에서 클래식에 종사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기에 재윤은 놀랐다.
하지만 권력으로 짓누를 수 없는 넓은 인맥과 그 무엇보다 M스튜디오 마 원장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정석을 노골적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었기에 재윤은 화가 났다.
그리고 그때부터 재윤의 재미있는 놀이, ‘신인 죽이기’의 주 표적은 항상 천재라 불리는 어린 연주자로 변모했다.
그러던 중 이성현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후계에도, 연주에서도 항상 초연한 태도를 취해왔던 짜증 유발자 김정석이 직접 데려온 그의 제자.
곽재윤은 흥분했다.
이미 모리스 슈만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고 수없이 많은 기사에서 ‘천재’라고 불리고 있던 성현.
성현은 정말, 그 잘난 김정석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판박이였고 마침 이번에 심사위원 자리를 얻게 된 ‘한국 종합 콩쿠르’에 지원하리라 의사 표명을 했다는 기사도 보게 되었다.
그걸 보자 곽재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
비록 김정석은 독일로 도망가버렸지만, 재윤이 성현이라는 어린 연주자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그걸 정석이 보게 된다면···.
대체 그 잘나신 얼굴이 어떻게 구겨질지.
재윤은 그보다 더 완벽한 복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첫 공작이었던 1차 예선의 형식 변경.
성현을 비롯한 미향예고의 세 학생이 사이좋게 보통 연주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재윤은 그 자리에서 폭소하고 말았다.
“뭐가 천재라는 거야. 아 정말 하하하하하!”
역시, 아무리 잘나도 결국 배움이 부족한 고등학생 1학년일 뿐 아닌가.
원래 아무리 ‘연주’를 잘해도 가방끈이 짧으면 어떻게든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법이었다.
다년간 건방지고 빽없는 이들에게 ‘신인 죽이기’를 해온 재윤은 확신했다.
자신의 복수가 보기 좋게 성공하리라는 걸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사실, 예선 대기실까지 찾아가 성현을 직접 만나는 건 지극히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연습 시간을 신나게 날려 먹은 이들은 대부분 연습실에서 표정이 좋지 않았기에 그걸 구경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 것이었다.
하지만,
‘부장님,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왜 저를 찾아오신 것부터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도 닷새나 시간이 남았었잖아요?’
성현은 너무 태연했다.
연습을 이틀이나 날려 먹어 놓고는, 무슨 모기라도 한 마리 있었냐는 듯한 그 태도.
이에 재윤이 당황해서 별다른 말을 못 하고 있자 지극히 오만하고, 방자해 보였던 그놈은 갑자기 사과하며 주변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까지 모두 없애버렸다.
“씨발.”
혹시 ‘신인 죽이기’를 눈치챈 건가?
아니, 현재까지 그 어떤 사람도 신인 죽이기와 클래식 협회 부장 곽재윤을 연관 짓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과 함께 ‘신인 죽이기’에 동참하는 놈들은 모조리 입에 돈을 발라뒀으니 배신을 했을 리도 없고.
“그럼, 그게 원래 자기 성격이라고?”
씨발, 씨발,
곽재윤은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지하 1층 화장실 구석에 앉아 연신 욕을 쏟아냈다.
말을 끊고, 건방지며, 곽재윤의 권위를 길바닥의 돌멩이라고 여기는 그 태도까지.
“똑같네.”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20대 초반의 김정석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하!
곧바로 헛기침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삼키는 곽재윤.
한껏 분노로 일그러져 화장실 문을 발로 찰 것만 같던 그였지만,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표정이 변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거잖아?”
이미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기에는 너무 거대해져 버린 김정석 대신, 이성현을 최대한 가지고 놀면 되는 것 아닌가.
곽재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일그러져 있던 얼굴 그대로 기이한 웃음소리를 뱉었다.
어차피 그의 계산 속에서 성현은 예선을 통과하는 쪽이 더 좋은 상황이었다.
예선을 통과하면 계속 곁에 두고 가지고 놀 수 있지만, 탈락해버리면 괜히 ‘신인 죽이기’를 하기가 번거로워진다.
“그래. 처음부터 연습을 개판으로 하건 잘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었잖아.”
마치 자신을 타이르듯 그런 말을 홀로 중얼거리는 곽재윤.
그는 생각했다.
통과해도 좋고, 탈락해도 좋다고.
이런 식으로 성현이 어떤 선택을 해도 결국 재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 되는 이 상황이 중요한 거라고 말이다.
“그래··· 그래···.”
재윤은 난잡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내더니, 이내 덜그럭, 소리를 내며 지하 화장실을 나섰다.
***
1차 예선이 시작되었다.
금일 오전조에 배정되어 예선 대기실에 있던 참가자의 숫자는 100명.
그 때문에 과제곡으로 출제된 슈베르트의 곡 중에서 너무 길고 장황한 곡은 어쩔 수 없이 약 3분가량의 연주를 듣고 자르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항이었지만, 참가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1차 예선은 사실상 서류 심사라 봐도 무방한 단계였으니까.
그래, 딱 3명.
아직 프로 레벨의 경력이 그리 많지 않아 명징한 실력을 보여준 무대가 많지 않은 미향예고의 셋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곽재윤은 이러한 점을 심사위원 회의에서 강조했다.
자격을 제대로 갖춘 것이 사실인지 검토해볼 필요성이 있다.
특히 독일의 리프만 오케스트라까지 다녀온 김민호를 제외한 두 사람을 이 자리를 통해 확실히 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은 곽재윤이고, 클래식 협회장의 아들이기도 한 그의 ‘상식적인’ 발언에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동의를 표했다.
“후후흐흐.”
자신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고 있음을 인지한 곽재윤은 그렇게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다른 참가자들이 눈앞에 서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음에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성현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주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그는 생각했다.
‘원전연주’는 그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빈틈이 생기가 되어있다.
그 시대에 맞는 연주에 너무 충실하면 솔직히 현대에 걸맞은 연주실력을 판별하기 힘들어지고, 거꾸로 현대에도 듣기 좋은 연주를 ‘원전연주’랍시고 선보이면 그건 심사기준에 따라 문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넌 어떤 연주를 할 거냐. 푸하하하핫.’
성현이 어떻게 연주를 하건 태클을 걸 생각만 가득하던 곽재윤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큰 미소가 지어졌다.
“46번 참가자. M스튜디오의 이성현군.”
안내자의 음성이 들려왔고 또각, 또각 청아한 소리를 내며 드디어 성현이 심사위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을 거다.’
바로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군침을 삼키는 곽재윤.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는 턱밑까지 올라온 웃음을 참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무대에 오른 성현을 안내해주었고, 성현은 결국 어떤 연주를 하건 시비가 걸리게 될 피아노 의자에 앉고 말았다.
물론, 곽재윤에게 이번 예선에서 그를 탈락 시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사소하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심사위원들 사이에 성현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놓으면 이후 2차 예선, 본선에 들어서 분명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 생각해 사전에 움직이는 것이지.
‘그래. 급하게 할 것 없다.’
진정을 되찾은 곽재윤.
그런 그가 마치 비웃음 같은 실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서, 성현의 손끝은 건반을 향해 날아들었다.
딩-!
[Schubert – Moment Musicaux No. 3](슈베르트 – 악흥의 순간 3번.)
‘푸핫, 악흥의 순간? 어차피 끊어야 하는 연주에서 짧은 곡을 택하다니. 역시 머리에 든 건 있는 놈이었군.’
역시, 김정석과 판박이인 아이답다고 할까.
곽재윤은 느긋하게, 감각적으로 울려 퍼지는 성현의 연주에 고개를 끄덕였다.
‘풋, 그래서 결국엔 원전연주에 몰두하기로 한 건가.’
그래도, ‘원전연주’가 뭔지도 모르고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이 이틀이나 삽질을 해놓고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건 솔직히 인정해줄 만하다고 생각하는 곽재윤.
‘하지만, 네가 얼마나 잘났건 어차피 계획되어있건 사전 작업은 할 그대로 진행할 거란다. 이 건방진 꼬마야.’
감히 내 말을 끊어?
나를 상대로 머리를 굴려?
성현의 놀라우리만큼 유려한 연주를 들으면서도 그런 생각들에만 몰두하고 있던 곽재윤.
그런데,
‘아니?!’
언제나 겉으로, 어떻게 해서든 두꺼운 가면처럼 짓고 있던 그의 미소가 갑작스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 정도로 놀라운 변화가 지금, 심사위원석에 앉은 모두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을 크게 뜬 사람은 비단 곽재윤 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놀라게 해준 성현의 연주법,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