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39
139. 데클라만도 (Declamando, 낭독하듯이) -2
니엘 리히터,
올해가 2011년이니 아마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 정도려나.
니엘은 더는 리하리트 리프만이 제자를 직접 양성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직접 데려온 처음이자 마지막 연주자였다.
덕분에 그녀는 등장부터가 이슈였고, 온갖 기대가 모인 상황에서 ‘베토벤’을 더없이 완벽하게 연주해내 더 인기를 얻는다.
그렇게 완벽한 데뷔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얼마 안 가 더 대단한 일화로 유럽을 들썩이게 만드는데, 그 일화란···.
그녀가 리하르트 리프만의 눈에 닿아 처음 레슨을 받을 때의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다는 것이다.
고작 4년도 안 돼서, 세계 정상급 연주자가 갑자기 툭, 나타났다?
당연히 이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기자들은 그녀가 어디 음대 출신인지 혹은 어떤 예고를 졸업했는지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 탐색은 전혀 의외의 사실을 밝혀내게 된다.
니엘 리히터라는 사람은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고등학교는 지극히 평범한 곳을 나와 스물한 살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음악을 배운 적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천부적 천재.
뼛속부터 재능으로 무장한 21세기 모차르트의 화신.
참 듣는 것만으로도 오글거리는 별칭들을 줄줄 달고 다니는 독일 피아노계의 미래라 불리는 연주자.
그게 니엘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였다.
“…꽤 재미있지 않니?”
이 같은 이야기를 1시간 가까이, 운전하면서 내게 천천히 들려주던 정석 선배는 문득 이어지던 말을 끊고는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점이요?”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내가 반문하자 선배는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정작 본인이 몰라보는 거야? 어딜 봐도 닮았잖니. 대한민국에 나타난 파가니니의 화신하고 말이야.”
아,
파가니니의 화신이라는 건 날 말하는 거겠지···?
선배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확실히 비슷하긴 비슷했다.
제자를 키우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 스튜디오로 데려왔으며, 음악을 배운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연주를 선보였었거나 하는 부분들이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등장한 지 4년 차인 현재, 이미 세계인의 인정을 받은 피아니스트라는 것과 나는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뿐인가?
뭐, 난 이제 1년을 막 넘긴 시점에 세계급 연주자로 인정을 받았으니 더 파격적인 부분에서는 내가 그녀를 압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저, 그 별명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선배.”
파가니니의 화신이라니, 이거 참 손끝이 오그라드는 별명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그래?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이초살의 피아니스트? 아니면 그래, 첫 별명이었던 새로운 바람이라는 별명을 좋아했던가?”
“놀리지 마세요.. 하아 갑자기 머리가···.”
정말로, 없던 멀미마저 느끼게 만드는 내 별명들.
하, 괜히 이 별칭들의 출처인 김백찬 기자가 떠올라 화가 난다.
다음에 만나면 꼭, 최대한 상냥하게 한 번만 발로 차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금방 도착할 줄만 알았던 목적지.
허나, 선배의 자동차는 1시간 넘게 움직였음에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뭐라도 말을 하려던 나는, 전생부터 뜬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밝혀진 건 없던 니엘에 관해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니엘 그분이 절 싫어하진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소문으로 듣기에 좀 무뚝뚝한 편이라고 들었거든요. 저도, 그렇게 살가운 편은 아니니까 그···. 좀 어색하진 않을까. 걱정돼서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엘은 성현이 널 좋아하거든.”
“저를요?”
“그래.”
니엘 리히터가 날 좋아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데뷔한 사람이니 공감대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거려나.
뭐, 솔직히 선배의 말이 틀린 적은 없으니 나는 괜히 긴장하던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
그런데, 실제로 만난 니엘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색이 옅은 금발에 퍽 사무적인 복장을 하고 나타난 니엘.
인형 같은 외모에 시퍼런 크리스탈 같은 청안의 소유자로 전생에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그녀라는 건 척,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정석 선배의 말을 믿고 애써 살갑게 인사를 건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주 짧았다.
“네.”
뭐랄까,
분명 주차장까지 직접 마중을 나와주시긴 했는데, 반갑다거나, 어색해한다거나 하는 어떤 인간적인 반응이 보이지 않는 니엘.
내가 그녀의 생김새라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길 안내를 해주는 로봇이라고 오해할 지경이었다.
“많이 긴장했나 보네.”
뒤늦게 운전석에서 짐 정리하고 나온 정석 선배가 내 옆에 서서 그런 말을 했는데, 그런가?
저게 긴장한 건가···.
오히려 화가 난 거라고 하면 믿겠다.
어쨌건, 그렇게 안내를 받아 입장하게 된 이 거대한 건물은, 오는 길에 선배에게 듣기로 다름 아닌 리프만 오케스트라에서 연습용 협주홀로 이용하는 아트홀이라고 했다.
숙식과 연습을 한 번에 해결하겠다고 아예 아트홀 하나를 빌려버리는 스케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빅쓰리라고 불리는 세계 3대 오케스트라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려나.
새삼 그 대단함을 실감하니, 바로 이 정도의 오케스트라에게 초대를 받고, 함께 활동했던 민호와 정석 선배가 대단해 보였다.
말 한마디 없는 니엘을 따라 향한 곳.
그곳에는 마피아같이 생긴 한 남자가 밝은 미소를 짓고는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하네.”
분명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하르트 리프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독일어를 구사하며 리프만이 먼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하자.
그는 내 주저 없는 행동에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하하하, 하고 큰 웃음을 터트렸다.
네덜란드 공항에 입국한 뒤, 정석 선배도, 니엘도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리하르트 리프만 마저 한국어를 사용해준 덕분에 딱히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지만, 사실, 난 불어와 독일어를 좀 할 줄 안다.
실제로 모리스 슈만과 있을 때도 그가 이따금 내뱉는 독일어를 전부 알아들었지 않았던가.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었나?”
애써 나를 배려하기 위해 한국어를 구사하던 리프만이 독일어로 묻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한 20년 전쯤에요.”
“자네 나이가···.”
“올해로 열여덟 살이죠.”
“그래? 푸하하핫, 유머 감각까지 있다니 정말 대단하군.”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빵빵 터져버리는 리하르트 리프만.
그는 참, 어디 사는 독일 작곡가처럼 한차례 길게 웃더니 이내 진정하고는 말했다.
“피곤할 텐데···. 입국 당일에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하네. 혹시라도 정석 군을 미워하진 말게? 그는 내가 부탁한 데로 움직여줬을 뿐이니까.”
어쩐지,
배려심 깊은 정석 선배가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내게 또다시 장거리 이동을 강요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강행군은 다 눈앞의 리하르트 리프만의 부탁 때문에 생긴 일인 듯했다.
뭐, 애초에 내가 정석 선배를 미워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내가 괜찮다고 리하르트 리프만에게 말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또 한차례 흘린 뒤, 말을 이었다.
“모리스 선생의 부탁으로 여기 네덜란드에 방문했다고 알고 있는데, 맞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예선 시작이 한 달이나 남은 이 시점에 유럽에 온 주원인이 모리스 슈만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자타공인 내가 시드권을 얻을 수 있도록 가장 많이 노력해준 사람이었다.
다만, 세계 어디에도 공짜란 없는지 모리스는 자신의 노력을 대가로 작년에 스무 번은 족히 넘게 이야기하던 자신의 신곡 발표회에 참가해 달라고 말했다.
솔직히 시드권은 감사하긴 했으나, 오직 그것뿐이었다면 난 유럽에 오는 걸 더 고민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고 모리스와의 일정이 끝나고 나면 일본의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와의 협주로 바쁠 테고 그렇지?”
그래, 방금 리프만이 말한 대로 나는 마침 작년에 내게 협주 제안을 해주었던 유키에 모리가 이곳 네덜란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결국 유럽행 티켓을 끊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그렇게 되네요.”
허허,
솔직히 나도 놀랐다.
대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정석 선배가 계신 리프만 오케스트라.
거기에 모리스 슈만의 작곡 발표회,
유키에 모리의 독주회 일정이 모두 이곳 네덜란드에서 겹친 것이다.
솔직히, 셋 중에서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이번 제안을 거절하려 했었는데···.
이 정도면 뭐, 하늘이 나보고 유럽에 가라고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당시 내 대외활동을 일부러 막고 계시던 백건오 선생님마저 생각보다 시원하게 동의해주신 바람에 이렇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데, 내 빽빽한 일정이 눈앞에 계신 리하르트 리프만은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최종적으로 자네가 시드권을 얻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우리 리프만 오케스트라의 정석 군인데, 왜 도움 한번 준 적도 없는 유키에 모리가 자네를 독차지하냔 말이야.”
주로, 내가 리프만 오케스트라와 이것저것 행동을 같이하지 않는 점이 말이다.
근데, 내가 무슨 물건이냐. 독차지가 뭐냐 독차지가···.
“하지만, 이미 네덜란드로 오기 전에 끝낸 이야기라서요.”
“아니, 애초에 그 ‘이야기’라는 곳에 우리 오케스트라가 없지 않았나. 그러니까 무효 아닌가?”
“그, 네?”
나는 웃으며 이상한 말을 시작한 리프만을 보며 새된 소리를 냈는데, 그는 나를 보며 더 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네가 우리 오케스트라에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같이 움직여주었으면 한다만···.”
“그게, 이미 모리스나 유키에씨 하고는 이야기를 일정을 맞추고 온 거라서요···?”
“그래.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네. 난 자네를 납치하려고 하거든,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가 잘못된 줄 알고 눈만 껌뻑거리다 물었다.
“뭐라고요?”
“자네를 납치하려 한다고 했다네.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 일정이 아슬아슬할 때까지 놔주지 않겠다는 소리지. 어떤가?”
아니, 사람 면전에서 미소를 지으면서 납치하겠다고 하면···.
대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이 사람, 겉모습만 마피아 보스처럼 생긴 줄 알았는데 사고방식도 좀 이상했다.
“싫다고 하면요?”
“나갈 방법이 있네.”
“뭔데요?”
“우리 오케스트라의 메인 피아니스트 정석 군과 피아노 대결을 벌여서 3연승을 거두면 된다네. 어때, 우리 리프만 오케스트라를 걷어차고 다른 곳에 가는 것 치고는 쉬운 조건이지?”
쉬운 조건은 개뿔.
정석 선배한테 3연승을 거두라니 이 사람 미친 거 아닌가?
세계적인 거장들은 다 원래 다 이런가?
난 두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려 정석 선배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좋은 승부를 기대한다는 듯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석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선배는 왜 또 그렇게 신나는 얼굴이고···!’
하아, 애초에 선배도 한패였던 건가.
아니, 내가 요새 좀 유명해지긴 했다 해도 이렇게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작정하고 붙잡으려 할 만큼의 연주자는 아니지 않나?
아니, 아닌가.
나만 잘 모르지 나 이미 그만큼의 연주자가 되었던 건가?
음. 골방에서 반년간 틀어박혀 있다가 나온 직후 비행기를 탄 탓에 세간의 평가 같은 걸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피식, 웃음을 터트린 리프만은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게. 나도 그 정도로 현실성이 없는 어른은 아니니까.”
지금까지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던 그는 앞선 말들은 다 장난이었다고 말하듯, 나와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2번째로 우리가 자네를 해방해주는 조건은 간단하네. 여기 자네와 같은 시드권자인 니엘에게서 연승이 아니어도 좋으니 10승을 따보게나.”
리프만의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서 나는 그가 처음부터 하려 했던 이야기가 이거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이 아끼는 제자인 니엘에게 나라는 신선한 자극을 주려고 했던 것 아닌가···.
정말 이야기를 그냥 빙빙 돌리다 못해 괴상하게 배배 꼬아서 하는 아저씨다.
니엘 리히터와의 연습을 강제하다니···.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냥 일어나도 큰 문제는 없는 일이었다.
근데, 정작 이번 일에 나한테 손해가 있나?
니엘 리히터는 나와 함께 퀸 엘리자베스에서 시드권을 받은 사람이다.
원래라면 합동 연습을 시켜달라고 억지를 부려도 단호하게 거절당할 상황인 거거든.
어딜 봐도,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
유일하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나흘 뒤가 모리스 슈만과 만나기로 한 날이라는 점 정도인데,
‘아까,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리프만 오케스트라와 있길 원한다고 했던가.’
아마 일주일을 상정해서 10승을 말한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모리스 슈만과의 일정이 꼬인다.
근데 그건 다시 말해서, 나흘 안에 니엘 리히터에게 10승을 거두면 그만이라는 말 아닌가.
과거의 나라면 앞으로 일어날 난장판에 두통을 느꼈을지 모를 이 상황이, 지금의 내게는 그저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내 모든 일정도 지키고, 니엘과 합동 연습을 할 이 기회도 다 챙기면 그만이지.
“좋습니다. 까짓거 해보죠. 뭐!”
나는 결심하며 당차게 말했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인형처럼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던 니엘 리히터를 바라봤는데, 정작, 이야기의 장본인인 그녀는 안색을 새파랗게 물들이고는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설마,
내게 들켜선 안 되는 필살기 같은 연주라도 있는 걸까···?
저런 반응을 보니 괜히 관심이 샘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