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4
14. 아다지오 (Adagio, 천천히) -2
새삼 김민호의 말에 달라진 내 위치가 실감이 되었다.
비록 최지은과 한팀이 된 다음이지만 김민호가 나를 향해 ‘벽’이라는 말을 사용하다니,
본래 내게 있어 ‘벽’이었던 그 김민호가 말이다.
아쉽지만 나는 김민호와 함께 연습하고 싶었던 내 욕심을 바로 버렸다.
김민호는 언제나 순둥순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엄청난 황소고집이라 자신이 한번 정한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도 수석 입학생인 지은과 한팀이 되었다는 사실은 꽤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솔직히 최지은마저 김민호처럼 개인전을 하겠다고 말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거든.
“그럼 성현아 지은아 주말에 M스튜디오에서 보자? 이번 주는 성현이도 나오는 거지?”
“응. 정석 선생님이 보자고 하셔서.”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김민호는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더 신난 얼굴이 되어서는 교무실을 나갔다.
그 후 천천히 과제곡을 확인하고 신청서 작성을 마친 최지은과 나는 함께 교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자 기숙사로 가려는데 지은이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너 미향예고 첫 실기고사가 팀별인 거 어떻게 알았어?”
“어? 아아. 그냥저냥 주워들은 게 있어서. 우리 조에 한승우라고 미향중 출신 애가 있거든.”
“한승우가 너희 조였어?”
“알아?”
“대충은, 말이 너무 많은 거만 빼면 착한 애야.”
누군가를 칭찬할 때 착하다, 공부 잘 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건 별로 안 친하다는 말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자 최지은은 갑자기 내게 말했다.
“기왕 같은 팀 된 김에 알려주는 건데, 올해부터는 선배들 앞에서 연주하고 평가받는 실기고사 방식, 바뀐대.”
“오오. 그래?”
“응.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다고 하더라고”
한 배를 타게 되자마자 바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이야기를 해주는 최지은.
아니, 애초에 그녀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갈피를 못 잡는 학생이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피 같은 조언도 내게는 크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럼 그 방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아?”
“그건 모르지? 올해부터 갑자기 바뀌는 거라 팀별 평가라는 것만 알아.”
내가 능청스럽게 묻자.
정성 들여 대답해주는 최지은.
하지만 나는 그 비밀스러운 변형된 실기 고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파격적인 방식이라 기억에 남았었거든.
변화한 실기고사는 무려 SNS를 이용해 진행된다.
2010년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한창 SNS가 국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머리가 비상한 미향예고의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혹여나 평가에서 놓칠지 모를 대중성을 검토하기 위해 연주 영상의 조회수와 좋아요의 개수 등을 평가 항목에 추가시켰었다.
이 획기적인 발상은 엄청난 선견지명이 되어, 훗날 미향예고가 세계적으로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곤 했다.
뭐, 당장 내가 생각해 봐도 이 시기로서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걸 해내는 게 미향예고이니 할 말은 없다.
“그럼 고생하고 나중에 M스튜디오에서 보자.”
“그래. 오늘은 하나하나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한팀이 된 최지은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애써 그렇게 힘차게 말했고, 그녀는 슬쩍 뒤돌아 나를 보았다가 말없이 그대로 여자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SNS라···. 계정이라도 미리 파둘까?”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내가 기숙사로 향하려던 찰나,
갑자기 엄청난 것이 내 머리에서 번뜩였다.
SNS에다가 유명세?
학창 시절의 수행평가를 계기로 SNS 활동을 시작해 나중에 대중적인 크리에이터로 유명해지는 사람.
뛰어난 작곡 능력과 수준급의 피아노 실력, 거기에 예쁜 얼굴이 더해져 유명해진 200만 너튜버.
이예린.
“아아아아아!”
3조의 조원. 이예린의 이름이 계속 기억에 남던 이유가 드디어 떠올랐다.
***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비유겠지만,
클래식만 계속 듣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처럼 천천히 씹어 육즙을 맛보고 곁들임 채소로 풍미를 끌어올리는 식사만 계속하다 보니 도리어 자극적인 분식이 끌릴 때가.
즉, 종일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 반주를 넣다가 집에 돌아와 김민호, 최지은의 연주를 듣다 보면 갑자기 귀를 앵앵 울리고 중독성이 있는 대중음악이 듣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에 일편단심이던 나는 아이돌이니 뭐니 하는 건 문외한이었고 그 대책으로 찾아낸 것이 함께 고교시절을 보냈던 유명 너튜버 이예린의 자작곡들이었다.
클래식이면서도 대중성을 중시하며, 실제 대중가요를 작사·작곡하기도 한 다재다능의 그녀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피아노를 선보이면서도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이 이예린이었다.
“성현아? 왜, 왜 그래? 혹시 내 연주 이상해···?”
분명 내가 서른을 넘긴 시점에 보았던 너튜버 이예린은 이렇지 않았는데,
리액션도 크고, 웃음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예쁜 얼굴을 최대한 숨기려고 하는 듯한 이런 몸짓은 특히 괴리감이 컸다.
“저, 저기 미안해 성현아···. 너무 형편없었지?”
내가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보고만 있자 예린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갈 것처럼 실시간으로 의기소침해져 갔다.
“아니야.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연주 잘했어. 이제 박은호한테 피아노 잠깐 맡기고 잠깐 얘기 좀 할래?”
“얘, 얘기?!”
“왜 그렇게 놀라.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 말어.”
“아니, 그으, 혼나는 건가 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비비 꼬며 시선을 내리는 예린.
음, 잠깐 얘기하자고 했을 뿐인데 바로 혼이 난다고 생각하다니, 내 예상보다 더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
이 성격만 어떻게 고쳐도 당장 피아노 실력은 물론, 다양한 방면으로 재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널 왜 혼내. 걱정하지 말고 거기 앉아봐. 박은호, 승우야. 너희 차례야.”
무슨 인형처럼 수동적으로 내가 가리킨 의자에 앉는 예린.
박은호와 한승우를 보낸 나는 그녀의 앞에 앉아 지그시 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피아노는 독학 한 거야?”
“응? 응. 어떻게 알았어?”
“혼자 피아노를 치면 잘 배는 나쁜 습관이 많았거든, 선생님도 첫 주에 짚어주셨잖아?”
“나, 나쁜 습관이, 많아···.”
곧바로 사색이 되어 울상을 짓는 예린.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짓곤 했던 정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쁜 습관이 많다는 건 좋은 거야. 앞으로 어딜 어떻게 고쳐 나갈지가 명확하다는 거잖아?”
“그렇지만, 기초도 안 되는데 어떻게 미향예고에 왔냐는 말도 들어서···.”
나는 그녀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내가 전생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이 아이가 듣고 있다니,
하여간 연습할 시간을 남 흉보는데 쓰는 5반 학생들다웠다.
“그래도 나는 좋았는데? 차분하게 한음, 한음 더듬으면서 곡을 치는 것도 좋았고, 다른 애들하고 달리 연주 자체가 좋아서 피아노를 친다는 그 느낌도 좋았어.”
“좋았다고? 내 연주가?”
“그럼. 그냥 무감각하게 연습만 하면서 곡을 손에 익히려는 애들보다 훨씬 좋았어. 건반을 누를 때 강약도 잘 주고.”
“저, 정말?”
예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칭찬에 놀란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직설적인 칭찬을 들어본 적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순박한 반응을 보여주는 이예린.
꽤 칭찬이 고픈 아이인 것 같았다.
“정말이고 말고.”
내가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녀는 수줍어하는 것도 잊어버린 듯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잠재력이 확인된 보증 수표나 다름없는 존재다.
현재 그녀의 성장을 저해하는 ‘자기 불신’만 덜어줘도 그녀의 실력은 일취월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주말에 시간 되니?”
“으응?”
지금껏 내 칭찬 공세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그녀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 반응에, 뒤늦게 자신이 어쭙잖은 작업멘트나 던지는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을 느낀 나는 서둘러 본론을 덧붙였다.
“아, 이번주 일요일에 M스튜디오에 김정석 선생님이 어디를 좀 견학시켜준다고 하셨거든! 왠지 같이 가면 너한테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아아, 견학, 이구나. 어. 응! 알겠어. 나야 어차피 친구도 없어서 저번 주에도 기숙사에만 있었는걸.”
오해를 풀자 바로 마냥 웃기 힘든 말을 해버리는 예린.
“근데, 어디 가는데?”
“홍대”
“홍대? 견학? 응?”
알쏭달쏭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린.
아마 당일이 되면 깜짝 놀랄 것이다.
***
이윽고 토요일이 되었다.
이른 아침,
민호나 지은이를 만나기 전에 연습을 좀 하고 싶었던 나는 불 꺼진 M스튜디오의 문을 익숙하게 열고 들어갔다.
방학 내내 거의 내 개인 연습실이나 다름없었던 방을 찾아 들어간 나는 바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띵-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
이내 스퍼트를 올린 나는 쇼팽의 에튀드를 연달아 치며 굳어있던 손을 풀었다.
넓은 음계를 넘나드는 쇼팽의 에튀드.
가히 피아노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의 에튀드를 순서대로 연주하다 보니 손끝을 찌릿하게 울리는 감각을 맛보았다.
“후우.”
그제야 한숨 돌리며 손을 주물럭거리는 나.
아무래도 미향예고에서의 연습은 좀 제한적이다 보니 갑갑한 면이 있었다.
-자! 성현씨 조금만 소리를 죽여볼까? 으음, 그래요! 그렇지. 자 다시 가볼게요?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마에스트로의 목소리.
나는 온종일 피아노를 연주하며 내 손에 깊이 스며든 ‘반주자’를 찾아보고자 했다.
학교에서는 아무래도 잡음이 많았고, 같이 연습하는 예린이 눈에 밟혀 온전히 내 연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문인 악보에서 절로 들려오는 선율.
오늘, 나는 끝장을 보고서라도 그 선율의 정체를 파헤쳐보고자 마음먹었다.
“앞으로 7시간.”
정작 만나기로 약속한 정석 선배와 다른 아이들이 오기로 한 시간은 오후 2시.
그리고 지금 시각은 아침 7시 반.
나는 오랜만에 미친 듯이 연주에 몰두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잡생각 금지. 연습이다.”
이젠 눈에 보일 만큼 굵직한 굳은살이 박힌 내 손은 빠르게 건반을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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