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45
145. 시드 (Seed) -2
성현을 비롯해 리프만 오케스트라와 함께 움직이던 시드권자 셋의 보호자를 자처해 이곳까지 자동차를 운전했던 남준필.
그는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훈훈하면서도 따스한 분위기의 ‘과제곡 발표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텁텁한 무언가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
어딘가 섭섭하면서도 그리운 향취를 느끼며 준필은 자신의 5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할 경지에 오른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시드권을 받았었고,
‘시드권을 받아 영광이다.’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겠다.’ 같은, 판에 막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벨기에의 국영 방송사 카메라 뒤에는 항상, 벨기에의 왕비가 계신다고 여겨 몸과 마음을 겸손히 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상식과 같은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한 줌의 변화 없이 5년 전에도 보았고, 오늘도 보고 있는 이 풍경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되리라.
그렇게 남준필이 남몰래 작은 하품을 숨기던 찰나,
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1등을 할 겁니다.”
한 줌의 주저도 없이 단호하게 내뱉은 한마디에, 뻔하지만 그럼에도 어여쁜 개나리 꽃잎과 같은 빛깔로 물들어 있던 공기는 요동쳤다.
얼어붙는 무대,
발표회에 참석했던 왕실 대변인마저 예상 밖의 사태에는 느긋하게 풀려있던 입꼬리가 경직되었다.
“저는, 최고를 가리는 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다시 최고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좌중은 시간이 멈춘 듯 입만 떡 벌리고 그대로 굳었고 카메라 밖에 있던 이들마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성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달려온 시간이, 제가 지금껏 피아노와 쌓아 올린 믿음이, 모두 이곳에 이렇게 서 있기 위해서였다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한 달이 넘는 시간, 성현과 함께했던 준필이다.
당차고 힘있게 말하는 성현이 그 어떤 때보다 진심이라는 걸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라이벌이 있습니다. 저를 가르쳐주셨고 이젠 같은 무대에서 경쟁할 선생님이 계십니다. 친구가, 연인이, 저를 바라봐주고 있습니다.”
성현의 연설과도 같은 각오가 이어진다.
예의를 차린 것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니었지만 성현의 ‘말’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순간에 얼어붙어 벙찐 표정만 짓고 있던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이토록 숨을 죽이고 성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겠는가.
준필은 자신을 포함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하게 그저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고, 어쩌면 호소와도 같이 들려오는 성현의 마지막 한마디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지금껏, 저를 믿어주시던 그분들이 있기에, 저는 계속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최고의 무대를 반드시 선보이겠습니다.”
그건 단순한 각오를 넘어선 어떠한 맹세였다.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비장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진중하고, 진지한 맹세.
당연하지만, 이토록 진정성 있는 성현의 발언에 뒤늦게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어, 어린 나이에 세계 꼭대기를 노리겠다는 패기 있는 포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오히려 사회자가 나서서 성현의 발언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으로, 다소 도발적인 언행으로 시작된 그의 발언은 어린 연주자의 패기가 되었다.
짝짝짝짝-!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린 듯 박수를 보냈고, 그런 그들의 얼굴은 처음 황당해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흥미로운 미소로 물들어 있었다.
다들 비슷했다는 거겠지.
어쩔 수 없는 거다. 개나리 꽃잎과 같이 화사하고 따스한 공기도, 5년, 10년 반복되면 마냥 좋게만 볼 수는 없게 된다.
그러던 중,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곳에서 의외의 존재가, 대놓고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으니 흥분하지 않는 이가 더 적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바람’이 공영 방송을 타고 흘러가 버렸으니 이제 이로 인해 나타나는 파급은 어쩔 수 없이 거대할 수밖에 없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이다.
그런데 혹시라도 성현의 이러한 태도를 문제 삼아 매스컴이 매서운 칼날을 들이밀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남준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매번 사건과 사고 그리고 화제성 있는 일을 일으키고 다니는 청년을 그저 바라볼 따름이었다.
***
에튀드 네 곡과 고전주의의 음악가가 작곡한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해야 하는 본선.
과제곡 자체는 분명 크게 특별할 것 없는 것이었으나, 그 과제를 수행할 연주자들과 그들이 오를 무대가 ‘퀸 엘리자베스’라는 점은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과제를 아주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본선 과제곡 발표회로부터 3일이 흐른 현재.
준필은 자신보다 훨씬 먼 훗날을 꿰뚫어 본 것처럼 행동하는 성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표회 때 있었던 성현의 인터뷰로 그가 공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이미 ‘기부’와 ‘청렴결백’한 천재의 이미지로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온 것이 빛을 발한 듯 사람들은 성현을 대범한 청년이라며 칭찬하기 바빴다.
성현이 만약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동향인 이였다면 쏟아졌을 수많은 억측과 악담이 성현이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온 인지도로 무마되다 못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공영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은, 매번 조심조심하는 태도만을 고수하는 다른 시드권자들과 달리 시원시원한 어투의 성현을 보며 속이 뻥 뚫렸다든지, 다시 봤다든지 하는 칭찬을 쏟아냈다.
다시 말해, 성현이 무대에서 들려준 그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성현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는 소리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맹세 같은 선언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
항상 옆에서 지켜보던 남준필마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착한 이미지에 시원시원한 어투로 현재, 절찬리 그 누구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주목을 받는 인물.
“참, 성현이는 대단하다니까···.”
멍하니, 성현이 틀어박힌 연습실 문 앞에 서서 준필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재능이면 재능,
지식이면 지식,
거기에 끝도 없는 노력까지 겸비한 성현을 보고 있노라면···.
준필은 5년 전, 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신이 놓아버렸던 바이올린을 자꾸만 연주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안 되지. 나 같은 게 이제와서 다시 시작한다고 뭐가 바뀐다고···.”
거무죽죽한 추억이다.
곰팡이 핀 낡은 음악실에서 자신이 내던진 바이올린의 활은 그때, 그곳에서 부러졌다.
성현을 보면 볼수록 실감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이라는 놈의 필요성과 그 가치가··.
“피아노를 배운지. 이제 곧 2년이 된다고 했었지.”
믿기지는 않지만 백건오 명예 이사를 시작으로 마주혁 원장, 김정석 피아니스트까지 같은 말을 하니 믿을 수밖에는 없다.
성현은 음악이란 걸 공부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이 브뤼셀에 서 있다는 사실을.
“후우우···.”
그에 반해 준필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시기부터 바이올린 곁에 두었었다.
그로부터 대략 15년.
갓 성인이 된 나이에 밟은 퀸 엘리자베스 바이올린 콩쿠르는 거대했고,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준필은 바이올린을 놓았었다.
그 후로는 어쭙잖은 강사 흉내나 내며 살았다.
바이올린을 켜지도 않고 아예 놓치도 못하는 치졸한 방식으로 자기 삶의 목적성을 망각했다는 걸 교묘하게 잊으며 말이다..
‘성현이와 있다 보면 너도 느끼는 바가 클게다.’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한 다른 제자들도 제쳐두고 굳이 성현의 보호자로 준필을 택한 백건오 선생님.
준필은 멍하니 성현의 연습실 문을 바라보다 문득, 백건오 선생님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성현이처럼 끈질기게 노력할 자신이 있다면 다시 바이올린을 들고, 그게 아니라면 이만 깨끗이 놓아버리라는 의미셨군요.”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린 그 한마디.
허나, 아쉽게도 그저 깨닫는 것과 결단을 내리는 일은 그리 자연스럽게 이어지진 못했다.
이미 3년간 주저해왔던 고민이다.
어떻게 단번에 결론에 이르겠는가.
고심하고, 갈등할수록 미궁으로 빨려들어 가는 감각을 느낀다.
그렇게 멍하니, 자기 생각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던 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준필 형?”
어느새 연습을 마치고 나온 것인지.
준필의 눈앞에는 샤워라도 한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흥건한 성현이 보였다.
“어, 벌써 6시가 됐니?”
그리 말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손목시계로 시선을 옮기는 준필.
성현은 한번 연습실에 들어가면 잘 나오질 않는 아이였기에 준필은 당연히 5시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허나, 시침이 가리키는 시간은 아직 오후 3시였다.
“아니요. 한창 연습 중인데 영, 감이 안 오는 부분이 있어서요.”
“감?”
“네. 리스트의 파가니니 에튀드 6번을 준비하는 중인데, 이건 원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던 카프리스하고 연관된 지점이잖아요?”
준필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성현의 모습에, 작은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피아노의 악보를 과제로 받았음에도 그 원천이 되는 바이올린의 특징마저 염두에 두려 하다니, 역시 성현은 그 발상부터가 자신과 다르다는 느낌이 강했다.
“혹시 형이 옆에서 바이올린을 좀 연주해줄 수는 없을까요?”
“응? 나?”
갑작스러운 지명에 놀란 준필.
그는 성현이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기에 더욱 놀랐다.
“네. 형. 바이올린 켜셨잖아요.”
“그, 그야 그렇지만, 성현아···. 내가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니?”
“그럼요. 22살에 퀸 엘리자베스 예선을 통과한 사람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분명, 듣기로는 성현이가 음악을 공부한 지는 아직 2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3년도 더 전에 활동했던 준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기묘한 상황···.
준필은 잠시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었는데, 성현은 그런 그를 놔줄 마음이 없는지 다시 말했다.
“부탁드릴게요. 바이올린이 필요해요.”
세계가 주목하는 천재 이성현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이 상황이, 준필은 새삼 웃기게만 느껴졌다.
천천히 내려다보는 자신의 손.
이미 3년간 활도 잡질 않아 굳은살도 다 빠진 형편없는 손이었다.
“그래. 알았다.”
이것도 운명인 걸까.
준필은 차라리 자신의 한심한 바이올린을 들려주고, 아예 냉혹한 평가를 면전에서 들으면 이 지긋지긋한 고민이 끝나겠지 싶어 성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트홀에 마련된 예비 바이올린을 들고, 5분 만에 당장 연주할 카프리스에 맞춰 조율하는 준필.
현은 뻑뻑하고, 활은 손에 맞질 않아 부자연스럽게 쥐어진다.
시작도 전에 엉망진창.
이대로는 결코 좋은 소리가 날 순 없으리라 확신하며, 준필은 성현의 연습실에 입장했다.
“어떻게 돼도 난 모른다···?”
***
남준필,
그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사실 그다지 없다.
22세에 퀸 엘리자베스 예선 통과라는 쾌거를 이루고는 그 후, 완전히 무대를 떠나버린 연주자.
그의 인생은 바이올린으로 시작해 바이올린으로 끝난다고 봐도 좋을 만큼, 그는 오로지 한길만을 바라보며 살았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그가 자취를 감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생의 남준필이 우연한 기회로, 당시에는 이미 완성된 연주자로 성장했던 김민호의 반주를 맡았던 적이 있거든.
내가 다른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반주를 맡던 것과 정반대로 말이다.
딱 한 번이었다.
내가 그의 연주를 들은 횟수 말이다.
그럼에도 당시 숙련된 반주자로서 살아가던 난 느꼈다.
남준필에게 재능은 없지만, 연주 자체를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당시 내게 연주를 즐긴다는 건 그 무엇보다 간절한 일이었기에 더 잘 알 수 있던 것 같다.
재능의 벽에 가로막혀 자포자기했지만, 그런데도 바이올린을 좋아하기에 완전히 놓지는 못한 연주자.
그게 남준필이라는 사람의 초상이었다.
지난 한 달간, 준필은 나를 많이도 도와주었다.
복잡한 일정을 정리해 간략하게 전달해주었고, 내게 필요한 악보를 제시간에 척척, 준비해주는 건 물론이고 내 식사, 이동과 같은 자잘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었다.
돈을 받지도 않았고,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은 그가 날 이토록 도와준 이유는 오직 하나.
백건오 선생님에게 부탁을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살신성인 나를 위해 움직여주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도 자연스럽게 그를 돕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향후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방황하고, 갈등하기만을 반복하게 될 남준필을.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이미 본선 과제곡은 발표되었지만, 그건 이미 내게 있어 은혜 갚기를 미룰 이유가 되진 못했다.
나는 이미 이번 본선에서 어떤 곡을 연주할지.
어떠한 기술과 어떤 주법으로 악보 위, 어디에서 특이점을 잡아야 할지까지 모두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으니까.
“어떻게 돼도 난 모른다···?”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준필은 불안에 찬 모습이었다.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과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저 표정까지.
어디 살던 어떤 반주자를 참, 많이도 빼닮았다.
“괜찮아요.”
울려 퍼지는 현의 악상, 나는 곧바로 건반을 따라붙게 해 그 얇은 선율에 풍부함을 더했다.
그러자 준필은 놀란 듯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단편적인 음색을 내가 그대로 받혀 올려줄 줄은 몰랐던 것이리라.
이후의 과정도 이와 같았다.
나는 준필의 바이올린에서 빈 음색을 채웠고, 동시에 앞서 달려가며 그를 끄집어 당기듯 연주에 탄성을 주었다.
그러자, 점차 발전하는 준필의 바이올린.
그는 정말로 오랜만에 연주한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처음에는 죽은 음을 연주했었는데, 내가 받혀주고 끄집어 당기길 반복하자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듯 그의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
활을 잡은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향해야 할 곳을 찾았고, 정작 준필 본인이 그러한 몸의 반응에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길 반복했다.
“좋아요. 한 번 더 갈게요!”
후끈 달아오른 열기 놓칠 리가 없는 나는, 곧장 다음 파가니니 에튀드를 연달아 연주했고, 비슷한 악상의 바이올린은 금세 치고 나오듯 자신의 음색을 뽐냈다.
그렇게 형성된 우리 두 사람의 화음 속에, 재능이 어떻고, 벽이 어떻고 하는 복잡한 문제는 없었다.
준필은 미소를 지으며 바이올린을 켰고, 나는 그를 위해 피아노를 쳤다.
누가 봐도 ‘연주’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모습.
나는 연주했다.
중요한 건 재능도, 노력도, 실력도 아니라는 걸 무언으로 말해주기 위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느냐라는 것을 말이 아닌 음악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
과거의 나를 이다지도 닮은 바이올리니스트 남준필.
그는 나와 무아지경의 상태로 이어가던 합주를 마친 저녁 8시,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지금껏 한번도 본적 없던 그 의외의 모습에 놀라는 한편, 정작 그가 나와의 연주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단 생각에 불안함을 느끼길 반나절.
늦은 밤이 되어서야 본선 무대의 연습을 끝내고 숙소로 향하던 나는 보았다.
아트홀에서 가장 작은 연습실, 그 발코니에 서서 나와 연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한 낡은 바이올린을 손에 쥔 준필의 모습을 말이다.
“오.”
브뤼셀의 새하얀 달빛 아래서 준필은 몸을 격렬하게 움직여가며 바이올린을 켰다.
명징한 음색과 또렷한 선율.
과거, 너무 일찍 거장을 만나 절망했고 끝내 다신 바이올린을 다시 잡지도, 그런데 정작 포기하지도 못했던 이는 이제가 없다고 선언하듯 결연한 태도로.
남준필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있었다.
늦은 밤의 풀벌레 소리와 함께, 내 귀에 닿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그야말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달빛,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는 연주자도, 강사도 되지 못했던 남준필이란 남자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
이제 본선 무대까지 남은 기한은 단 3일.
내 입가에는 큰 미소가 절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