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5
15. 버스킹 (Busking, 거리 공연)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속의 ‘반주자’ 찾기는 실패했다.
김기택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강세를 줘야 하는 부분을 악보에 표시해두고 그곳에서 더 힘차게 건반을 눌러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그다지 감미롭지 못한 거센 음뿐.
‘좀 과했나?’
그렇다고 음이 삐져나가지 않도록 다시 힘을 빼면 이전까지의 연주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솔리스트 김민호는 홀로 무대에서 관중을 압도했었다.
묵직한 음색, 음 하나하나에 담긴 큰 에너지가 연주자인 그의 마음을 폭발적으로 표현해주던 연주.
그는 짧은 음 하나마저도 선명하게 들리도록 피아노를 연주했었다.
반면 반주자로서의 나는 주선율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베이스를 맡았다.
밑에서 위로,
나의 음을 딛고 일어선 사람을 위한 든든한 받침대가 되어서 말이다.
그 덕분에 나는 솔리스트라면 자연스럽게 가지는 면모들을 아직도 완전히 터득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는 뭐가 솔리스트이고, 반주자인지 명확한 구분이 잘 떠오르지 않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음은 쌓아나가는 것.
그리고 피아노는 혼자서 주선율과 베이스를 함께 만들 수 있는 악기 중 하나였다.
이를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나였기에 손의 힘도, 타건도 열심히 조절한다고 한 것인데···.
어떤 면이 아직도 나를 반주자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흠.”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답답해 그냥 다시 연주를 시작하기로 했다.
딩-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이번에는 눈앞에 악보로 시선을 올렸다.
두 번째 목표였던 ‘의문의 선율’ 듣기, 그거라도 성공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것도 마냥 고개를 끄덕일 자신이 없었다.
[Chopin – Etude Op. 10 No. 1](쇼팽. 에튀드 1번.)
[Chopin – Waltz Op.64 No.2](쇼팽. 왈츠 7번.)
‘의문의 선율’을 들었던 두 곡.
그 악보를 펼쳐놓고 벌써 3시간을 넘게 연주를 해보았지만, 선율은 무슨 내 손가락이 멈추면 고요한 적막함이 감돌 뿐이었다.
쇼팽의 곡이라 그 선율이 들린 건가 싶어 나는 그의 발라드, 소나타에 즉흥곡까지 악보를 뽑아 왔지만.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아니면, 사람들?
나는 꽤 그럴법한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온 시점은 둘 다 근처에 많은 학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클래식 동아리원들이
두 번째는 44명이나 되는 피아노 전공생들.
그 선율이 들려오는 조건이 듣는 이가 많이 있는 곳에서 연주하는 것이라면, 나는 바로 내일 이 가정을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나는 정석 선배와 이예린을 불러 같이 홍대에 갈 생각이니까.
똑똑똑,
나는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연주를 중단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열리는 문에서 얼굴을 빼꼼 내미는 아이.
긴 흑발을 찰랑거리며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내게 보내는 그녀는 역시나 최지은이었다.
“또 그러고 있었어?”
“또?”
“너 방학 내내 여기 11번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었잖아.”
“아.”
알고 있었구나.
나는 뜻밖의 관심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약속 시각이 떠올랐다.
“벌써 2시야?”
“아니, 지금은 12시.”
“빨리 왔네?”
“민호랑 너 보기 전에 손이나 풀까 해서, 전공실은 좀 답답하기도 하고.”
“그치?”
곧장 나와 똑같은 생각을 말해주는 최지은 덕에 나는 빙긋 웃었다.
다들 전공실에서 잘만 연습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는 아무래도 M스튜디오가 더 마음이 편했다.
괜히 내 연습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혼자 연주에 심취해 있어도 어색함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음악과 전체 수석에 외모도 예쁜 최지은의 1번 연습실은 다른 선생님들까지 수시로 들락거릴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나저나 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한 10분 전에 왔나?”
“헛소리하지 말고.”
주저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최지은.
하긴, 지금 나는 땀까지 흘린 상태인데 이런 거짓말이 먹힐 리가 없지.
“아침 7시?”
“저, 정말?”
“응.”
“으음. 그래 너라면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나와.”
“아직 2시 아니잖아.”
“너 또 점심 안 먹으려고?”
어째서인지 내 끼니까지 애써 챙기려고 하는 최지은. 뭔가 그 선율의 실마리를 잡을 듯 말 듯 하던 순간이라 나는 웃음으로 무마하고자 했다.
“하하.”
“웃어도 안 돼. 나와. 김정석 선생님이 너 밥 똑바로 먹고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하셨다고.”
하지만 단호하게 나오는 최지은.
그래, 정석 선배의 부탁이라 이렇게 완고하게 나오는 거였구나.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 내게 효과적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계속 챙겨주는 사람이 선배이다 보니 그가 시킨 일은 거절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 가자. 뭐 먹을 건데?”
“뭐 먹고 싶은데.”
“치킨.”
“안 질려?”
곧바로 또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는 최지은.
나는 그런 그녀에게 치킨의 위대함을 전파해주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표정은 한껏 찌푸렸으면서도 군말 없이 따라오는 최지은을 보며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M스튜디오의 휴게실.
나와 최지은은 배달된 치킨을 뜯던 중이었다.
“이번 콩쿠르는 준비하고 있어? 계속 쇼팽만 치는 것 같던데.”
최지은은 무관심한 듯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자신이 경쟁자를 염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그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최지은은 자존심이 강하니 말이다.
“이상한 오해 안 하니까 그냥 나 보면서 말해. 그리고 쇼팽은 개인적으로 좀 궁금한 게 있어서”
“이상한 오해? 아, 아니 그건 됐고. 궁금한 게 뭔데?”
잠시 최지은의 어물쩍거리는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 ‘선율’에 대해 알아보려 했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것이 뻔하고,
그녀도 충분히 공감하고 어쩌면 조언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얘기가 좋겠지?
“기택쌤이 내가 강세를 줘야 하는 부분에서 역으로 음이 옅어진다고 말해주셨거든. 근데 아무리 연습해봐도 그 원인을 모르겠어서.”
“콘트라스트(Contrast, 대비) 때문이잖아.”
“응?”
“엉? 뭐야 그 얼굴은, 너 일부러 다른 사람들보다 좀 강하게 치는 편인 거 아니었어?”
너무나 쉽게 나온 말 때문에 내가 잠시 얼이 빠진 얼굴을 하자 이를 마주 보고 있던 최지은도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내 연주가 센 편이야?”
“아니, 몰랐어? 난 당연히 너니까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아, 나 연주가 센 편이었구나.”
연주가 세다는 건,
타건을 강하게 해 음이 크게 낸다는 것을 말했다.
반주로 베이스를 넣어야 할 때는, 음은 들리되 묻히도록 연주해야 했었기에 나는 솔리스트로서 피아노를 연주해야 할 때는 이를 거꾸로 행했었다.
독주회의 김민호가 그랬던 것처럼.
한없이 선명하고 깨끗한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하물며 나는 불과 4개월 전에 근육이 전혀 없는 몸으로 갑자기 돌아와 건반을 누르는 감각에 적응하는 것에 몰두했었다.
“아아”
생각해보니 쉼 없는 연습을 통해 연주를 위한 손과 균형 잡힌 몸을 만들었음에도 계속해서 처음 4개월 전에 느꼈던 손끝 감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음이 강해질 수밖에 없겠지.
즉, 연해야 하는 음들이 미묘하게 강해지니 당연히 강한 음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들렸을 것이다.
솔리스트는 이래야 한다는 강박에다,
몸이 단기간에 두 차례나 급변했던 것 때문에 나 스스로는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 몰랐던 거야? 장난하는 거 아니고?”
멍하니 자기 손을 바라보는 내게 어째서인지 따지듯이 말하는 최지은.
“아, 음. 몰랐어. 아아, 그래서···.”
“너 진짜 이상하다. 무슨 이상한 테크닉에다 음악 지식도 그렇게 많은 애가 왜 기본기에서 흔들리는 건지.”
그녀의 말에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또 알 수 있었다.
나는 예전에 예대를 다니던 시절에도 기본은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이 때문에 다른 솔리스트들에게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이제 모호한 것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의 내게는 그녀가 말하는 ‘기본기’를 확실하게 짚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았다.
“지은아.”
“응?”
그리고 그 사람은 정석 선배처럼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어선 안된다. 정석 선배가 내 타건이 강한 것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 방금 최지은이 말했던 것처럼 나만의 무슨 의도가 있으리라고 생각해 언급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배려심이 없고 눈에 바로 보이는 요소들을 강렬하게 꼬집어줄 사람이 내겐 필요했다.
“혹시 앞으로 나랑 같이 연습할 생각 없어?”
그리고 그 적임자로 눈앞의 최지은을 따라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엉?”
내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녀는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
오후 2시가 되었다.
나와 최지은은 김민호의 도움으로 이번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관한 팁을 알려준다는 마주혁 원장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순간이었지만 나를 날카롭게 쳐다본 마주혁 원장.
아무래도 자신의 애제자인 민호에게만 팁을 알려주려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기분이 언짢아진 것 같았다.
이윽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뒤 5시가 넘자 한참을 함께 수다를 떨던 김민호가 레슨을 위해 자리를 옮겼고,
남겨진 나와 최지은은 함께 정석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정석 선배님께 부탁했다는 게 뭔데?”
“나랑 같이 연습하기로 하면 알려줄게.”
“아 진짜 짜증나게. 다음 주에 한번 하자고 했잖아.”
“한번 말고 계속.”
“그건 싫다니까.”
작은 얼굴에 잔뜩 인상을 있는 힘껏 쓰며 화났음을 표하는 최지은이었지만,
그 곱상한 얼굴을 이리저리 구겨봤자 귀여울 뿐이었다.
그리고 이만한 적임자가 눈앞에 있는데 순순히 포기할 내가 아니다.
“오 얘들아. 왜 나와 있어.”
그때, 정석 선배가 나타났다.
그는 이번 주에 수요일에 있었던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한창 바쁘던 터라 내가 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연락 한 번도 주고받기 힘들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곧바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되어 정석에게 인사를 건네는 지은.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피식 웃으며 정석 선배와 짧게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성현아 네가 말했던 데로 이번 오케에서 같이 있던 바이올리니스트가 내일 홍대에서 버스킹한다더라.”
“아. 역시 그분 거기 계셨군요?”
“나도 아직 인사만 나누는 사인데 너 대체 어떻게 그분을 안거니?”
“아아, 요즘 유행하는 SNS에서 봤거든요. ‘클래식 버스킹’이라는 계정인데 요즘 유명해서요.”
“SNS?”
정석 선배도 아직은 어색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유명세를 얻는 도중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음. 그러니까 성현이 네 말은 그분이 버스킹하는 곳에 직접 가보고 싶다. 그런 거지?”
“예!”
어차피 앞으로도 SNS는 미향예고 생활을 하며 자주 엮이게 된다.
이예린의 일도 그렇고, 실기 고사의 점수도 그렇고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주고받게 될 예정이라면 애초에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보는 게 제일 아닌가.
“그리고 선생님. 내일 저희랑 같이 홍대에 가보고 싶다고 한 애가 있어서요.”
그것도, 함께 실기 고사를 치를 두 명을 데리고 가면 더 좋겠지.
나는 드디어 처음으로 전생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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