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163
163. 파이널 (Final, 결승) -4
생애 처음으로 파이널 무대의 인터미션을 길다고 느끼던 찰나, 무대는 다시금 옅은 임시 조명이 아닌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의 빛으로 치장했고 무대에 오르는 한 남자가 보였다.
경쾌한 발걸음과는 상반되는 김민호의 비장한 얼굴.
당장 그에게 총 한 자루를 쥐여주기만 해도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다르다는 것은 이미 그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대에 올라왔던 참가자들과는 다르다.
포문을 열었던 알렉시스부터 프리츠, 박의범으로 흘러 연주회장 전체에 벚꽃을 만개시켰던 경이로운 연주의 주역, 최지은까지.
놀랍게도 그들이 무대에서 평온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치열하게 무언가를 준비한 사람이라기보단 무언가를 깨닫고, 이미 마음을 놓은 사람의 그것 말이다.
허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요셉은 그러한 수긍과 체념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경이로운 연주를 선보이고, 요셉 데커의 눈에서 추억을 한 움큼 눈물로 흘러내리게 했을지라도, 지금 이곳은 세계 3대 콩쿠르에서도 세계 1위를 가리는 퀸 엘리자베스의 파이널 무대였으니까.
본래,
파이널 무대에 오르는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다.
그 미소란 어디까지나 가만히 있어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압박과 떨림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짓게 되는 표정, 허나, 억지일지라도 요셉 데커라는 심사위원은 그 얼굴을 진지하게 무대를 마주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표정으로 여겨왔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그 표정’을 짓고 있는 연주자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연주자가 세미 파이널에서 이성현을 꺾고 당당히 1번을 부여받은 김민호라면,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처음은 조금 의아한 감이 있었다.
앞선 여섯 명의 연주자가 모두 하나의 거대한 흐름에 따라 일관된 연주를 선보였다면, 딩-김민호의 연주는 사뭇 달랐으니까.
건반을 그저 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려치기라도 한 듯 큰 울림을 일으키는 김민호의 타건.
그의 연주는 부드럽지 않았고,
그의 선율은 차분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왈츠’에서 들려야 하는 음색 위에 자신만의 색을 덧씌운 앞선 연주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부드럽게 짜인 비단길 위로 안전하고 평온하게 이미지를 전달하던 앞선 연주자들.
그러나 김민호의 연주는 마치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 거대한 불도저를 끌고 나타난 것 같았다.
부드럽지는 않았으나, 그 둔탁함은 힘이 있었고.
차분하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발랄함은 그 누구보다 ‘왈츠’라는 단어 본연의 의미를 잘 살려내고 있었다.
두근,
다르다는 것.
그 다름에서 오는 신선하고도 파격적인 감각이 어느샌가 요셉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울림으로 변모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감각이 새롭다.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그걸 내쉬자 귓가를 스치는 선율이 마치 요셉의 심장 박동에 맞춰 두근거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새롭게.
김민호의 연주는 단연, 지금까지 연주를 선보인 여섯 연주자와도 달랐으나 ‘왈츠’라는 곡을 작곡한 요셉 데커 본인의 의도와도 또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음색을 선보였다.
“하아···!”
그저 듣는 것만으로, 어느새 숨이 차오르던 요셉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폐로 들어가는 브뤼셀의 따스한 온기.
그것이 연상하게 하는 먼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들.
이윽고, 그것들에 요셉이 심취해 있던 와중.
거대한 감각의 소용돌이는 바로 눈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바로, 2악장의 중간부.
모든 것이 뒤집히는 전율의 지점.
[Joseph Decker – Waltz auf der Klippe](요셉 데커 – 절벽 위의 왈츠)
둔하고,
무뚝뚝하게 사랑을 논하던 곡이 본격적으로 녹아들었던 슬픔의 선율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수수,
소름이 돋는다.
급격하게 변하는 선율은 지금까지 김민호가 스스로 쌓아온 이미지를 단번에 깨부수며 날아들었고, 창백한 파랑과 서슬 퍼런 검정이 손을 맞잡고 추는 아찔한 왈츠.
그 깊고, 또 깊어지는 비탄에 요셉은 지금 들려오는 곡이 자신의 곡이 아닌 줄 알았다.
처음부터 자신이 작곡했고, 또 연주했으며 이미 백번에 가깝게 타인이 연주하는 선율을 들어보았던 바로 그 곡임에도 말이다.
“…하.”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이 곡은 분명 메리의 곡일진대.
앞선 최지은도 그렇고, 지금의 김민호도 그렇고···.
어찌 이리도 요셉의 추억 속 메리보다도 더 이 곡을 아름답고, 무겁게 연주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이에 요셉은 차라리 심사를 포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 정말 진지하게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던 찰나, 그 정말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들려오는 선율.
퍼져나오는 비애.
슬픈 사랑이 노래하는 울음소리.
그 사이, 아주 작은 틈에서 느껴진 것이다.
본래의 선율을 해치지 않으려 치밀하게 조정을 거듭하면서도, 그 틈에 자아낸 아주 선명한 이미지.
그것은 그저 즐겁게 바이올린을 켜던 한 청년인 것도 같았고, 사랑을 하면서도 숫기가 없던 한 남자인 것도 같았다.
아주 좁은 틈새를 파고든 그 감각은 분명하게 울려 퍼지는 음형 속에서도 더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뽐낸다.
그렇게 일구어낸 하나의 메시지 속에, 선명하게 엿보이는 두 사람의 그림자.
한 남자는 피아노를 쳤으며,
다른 한 남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참으로 바보 같게도, 아무런 장비 없이 절벽을 오르는 과감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
허나, 그러한 불가능을 향해 과감히 도전한다는 그 바보 같고, 멍청하며, 자칫 비웃음을 살 것만 같은 행위가 요셉에게 거대한 전율로 다가오는 것은 필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양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무언가.
참가자 김민호는 노래하고 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요셉 데커는 듣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속, 사무치게 느껴지던 그 지독한 외로움을 덜어준 한 신비로운 고등학생의 그 목소리를 말이다.
***
민호는, 놀랍게도 나의 조언을 모두 거꾸로 행하고 있었다.
타건을 가볍게 하자는 지점에서는 소리를 뭉툭하게 내어 무게를 실었고, 피아노와의 거리를 좁혀 보다 자연스럽게 음형을 가다듬자고 의견을 모은 지점에서는 거꾸로 피아노와 몸을 떨어뜨려 인위적으로 음을 내는 느낌을 강조해버렸다.
허나, 12명의 참가자가 모두 머리를 모아 도달한 그 ‘궁극의 연주’를 전혀 따르지 않고도, 김민호라는 남자는 증명해냈다.
순수한 자신만의 능력으로도 ‘경지’에 도달해낼 수 있음을.
참, 경이로운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12명이 머리를 모았다는 건 다시 말해,
김민호 본인도 공유된 ‘궁극의 연주’를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꺼내놓았으면서도 그는 또 다른 자신만의 주법을 독자적으로 검증했고 연습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역시,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직 충분히 성숙해지지 못했을지라도 김민호는 김민호인 걸까.
대체 그의 한계는 어디인 걸까.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을······.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 슬슬 다음 연주자의 출발을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새삼 모두가 넋을 놓고 공용 대기실의 모니터를 바라보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이만큼 파이널리스트들에게 파급력을 일으킨 앞선 연주자는 오직 지은이뿐이었다.
정상급에서도 다시 이 자리에 모인 최정상급 연주자들의 혼까지 쏙 빼놓는 연주자.
어디를 가서 논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이 거대한 업적이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민호와 지은이는 17살의 나이에 그걸 해낸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바로 이 시점에,
정말, 내가 두 번째 생이 아니었다면 이런 최정상급의 연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나 있었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
그러나 그러면서도, 새삼 내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지은이도, 민호도 결국 20대 중반을 넘긴 뒤에야 제대로 꽃을 피운 연주자들이었을진대, 이 시점에,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낸 것 역시 나의 업적 아니던가.
“노래해.”
그런 생각을 하니, 그가 아무리 나의 라이벌일 지라도 응원의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음껏 노래하고 와. 민호야.”
지은이가 그리고 당장 무대 위에 있는 그가 훌륭한 연주자가 되면 될수록 그건, 다시금 내게 흡족함을 불러일으키게 했으니까.
나의 홍채에 가득 찬 무대 위의 민호.
이러한 비유가 이럴 때 어울리는지는 정말 모르겠다만, 그는 정말 청개구리 같은 남자였다.
장난스럽게 혹은 아무렇지 않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척척 해내고 버리는, 상식을 해체하는 천재.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자 심장은 쿵쿵 뛴다.
두근거린다.
분명 이렇게, 모니터로 민호를 들여다보던 나는,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지 못했던 반주자였을 텐데, 지금의 나는 순번을 기다리는, 그와 같은 퀸 엘리자베스의 파이널 리스트다.
그 사실이.
어찌 이리도 가슴을 두드리던지.
드디어, 전생의 아주 먼 옛날부터 간절히 바라왔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내 무대가···.”
기대된다.
너무나도 기대된다.
***
참으로 안타깝게도, 김민호의 바로 뒷 순번으로 선택된 라이코프의 무대는 아쉬운 면이 많았다.
그의 연주 역시, 세미 파이널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발전해 있었고, 여타 다른 연주자들과 같이 ‘황홀함’을 잘 담아내고 있었으나, 순번이 아쉽다.
하필이면 지금까지의 연주 형태를 정면으로 깨부순, 김민호의 뒤라니.
그의 선율은 분명 매혹적이었으나, 그것으로는 요셉을 눈물짓게 한 김민호의 연주를 뛰어넘기에 다소 무리한 감이 있었다.
이어지는 니엘, 베네르의 연주 역시, 비슷했다.
두 사람은 라이코프와는 달리 이성현 외 김민호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는지 더 역동적이고 과감한 연주를 선보였지만, 두 사람의 연주에는 김민호와 같이 9명분의 채점 권한을 가진 요셉의 심금을 울리는 강인한 이미지가 결여되어 있던 것이다.
결과, 충분히 성현의 조언을 따른 앞선 여섯 연주자보다 모호한 연주가 되었고 요셉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역시,
천재가 일구어낸 지평선을 뒤집는 존재는 또 다른 천재뿐인 걸까.
앞선 여섯 연주자가 마치 한 사람의 의지대로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던 건, 까놓고 이성현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허나, 김민호의 그 대단했던 연주 역시, 니엘과 베네르의 연주를 변모시킬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지 않았던가.
역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존재는 멜리아 펠리스와 같은 천재뿐이리라.
“결국, 김민호와 이성현인가. 아니···.”
최지은 역시 다소 짙게 성현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런 성현의 조언을 자신만의 아름다운 해석을 통해 벚꽃을 만개시키지 않았던가.
김민호, 최지은 그리고 이성현.
역시, 파올라 왕비가 언급했던 대로 아시아의 세 별에는 뭔가가 있던 것일까.
그런 갖은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요셉이 한차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이미 무대 위에는 마지막 두 파이널 리스트 중 한 명인 김정석이 올라와 객석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천재는 아니지만, 언제나 천재 준하는 실력을 매 순간 이룩해낸 것으로 유명해진 ‘수재들의 정점’.
그게 요셉이 바라보는 김정석이라는 인간의 표상이었다.
‘어찌 보면 이번 참가자 중, 그 누구보다도 나를 닮은 피아니스트.’
결코, 천재는 될 수 없었으나 메리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는 실력을 갖추어낸 요셉 데커와 닮은꼴의 연주자.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요셉은 정석의 연주가 그리 기대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세계를 들썩이게 하는 연주자 이성현의 스승이었던 남자였으나, 결국, 실력으로도, 능력으로도 조금씩 그의 열화 판이 되어버린 비운의 피아니스트가 아니던가.
당장 요셉이 듣고 싶은 연주는 그가 아닌 아시아의 세 별 중 하나인, 이성현의 연주.
참으로 미안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요셉은 그의 연주가 어서 끝내고 빨리 성현이 무대에 올랐으면 했다.
그렇게 가만히, 차분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정석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놓고서, 어서 연주를 시작하지 않고 그저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이다.
“…뭐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짤막한 음성.
다른 심사위원들은 물론 파올라 왕비 역시 그의 기행에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고, 들려왔다.
“쓰으으읍.”
이상한 소음이,
“후우우우.”
그 소음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정석의 입.
슬며시 벌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느릿하면서도 깊은 숨소리.
그는 마치 전신으로 호흡하는 사람처럼,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 크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호흡한다.
숨을 쉰다.
깊고, 넓은 대양에 뛰어든 고래처럼 커다랗게.
…호흡한다!
딩-
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기우는 몸.
내려앉는 손이 건반에 닿기까지 한 호흡.
소리는 작았지만, 깊이 울리는 음색을 시작점으로 순식간에 치솟는 아르페지오!
허나, 그 강렬한 음색에도 정석의 호흡은 일정했다.
가벼운 타건,
부드러운 스타트.
“이, 이건···!?”
호흡이 들려왔다.
미끄러지듯 도약하는 화음과 찬란하게 흩뿌려지는 아르페지오가 1악장에 생기를 더한다.
그건 마치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와 같았고,
그건 계속해서 언급하던 앞선 여섯 연주자의 통일된 주법 즉, 성현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물이 분명했다.
허나, 당장 김정석의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강렬한 음색은 분명, 성현의 조언과 자신의 색을 적절히 섞었던 앞선 연주자들의 것과는 달랐다.
정석의 주법은···. 말 그대로, 이성현이라는 사람을 빼다 박아놓은 듯 그와 완벽하게 동일한 것이었다!
단번에 넓은 음역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며, 장엄한 감각이 드넓은 연주회장을 가득 채웠다.
아직, 1악장이다.
2악장의 그 부분에 도달하기까지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있을진대, 놀랍게도 정석의 연주에는 이미 그 ‘황홀한’ 감각이 맴돌기 시작했다.
호흡이, 들려온다.
무대 위의 연주자는 이미, 피아니스트 김정석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이성현. 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 이성현의 연주가 김정석의 손끝에서 건반을 타고 흘러나오는 것 같다.
이변은 없으리라 단정 짓고 있던 요셉에게 김정석의 이런 돌발적인 질주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세 번 때린 것과 같았다.
“이, 이러면···. 위험하다.”
성현의 바로 앞 순번 연주자인 김정석이, 눈을 감고 들으면 곧장 이성현의 연주로 착각할 법한 이런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건, 정작 기대의 중심인 이성현에겐 위기로 작용할 것이 분명한 상황!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열한 명이나 되는 연주자의 연주를 들은 뒤다.
12시간 동안 쌓인 피로감은 장난이 아니었고, 이젠 귀에 닿는 황홀함보다도 휴식을 원하던 이 시점에.
성현을 완벽하게 복제해낸 듯한 연주를 들려주다니···.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 할지라도, 스승이었던 작자가 제자의 것을 가져오다니···!’
아니, 냉정히 돌이켜보면 타인이 주법을 가져온다는 묘기는 말 그대로 묘기라 불릴 정도로 쉬운 일.
하물며 정석은 노력가들의 끝. 수재들의 정점이라 불리우는 존재.
그런 그가 성현의 주법을 따라 하는 건, 말이 쉽지 절대로 형편 좋은 대로 간단히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재의 감각이 없음에도 묘기를 부리기 위해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요셉 데커는 자신과 닮은꼴인 남자를 보며 차마 그를 타박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성현의 연주를 그대로 빼다 막은 것이라 할지라도···.
수재들의 정점에 선 피아니스트 김정석의 연주에는 매분, 매초 객석을, 심사위원석을 그리고 아마도 카메라 저편에 있을 시청자들까지 소스라치도록 놀라게 할 만큼의 힘이 있었으니까.
“후으읍!”
단숨에, 정석이 연주하는 흐름에 맞춰 숨을 들이켜니 당장 무대 위에서 손끝을 곤두세우는 그와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호흡이, 점점 느려진다.
느릿하게 그러나 굵직하게, 폐를 넘어 몸 전체로 호흡하는 것만 같은 감각이 요셉을 감싼다.
호흡한다.
들이쉬고, 내쉰다.
다시 들이쉬고···내쉬고···.
요셉이 아득해져만 가던 정신을 간신히 붙들자.
들려오는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박수갈채 소리.
같은 심사위원단, 객석 그리고 스테프로서 카메라를 만지던 이들마저 본분을 망각하고 양손으로 힘차게 만들어내는 박수 소리였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요셉을 놀라게 한 것은···.
요셉 데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이미 손뼉을 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박수를 친다.
가슴이 시키고, 지금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시킨다.
그러니 감히 의식적으로 거절할 수 없는 찬사의 나래.
그런데, 불현듯 드는 생각은···.
사실 이 찬사와 박수는 모두, 마지막 연주자인 성현을 향해야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 그리고 이 무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성현에 대한 걱정이었다.
“큰일이군···.”
이대로라면, 성현은 앞선 정석의 연주를 되풀이할 뿐인 아무것도 아닌 연주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정말, 큰일이야···!”
그런데, 그러한 요셉 데커의 염려를 비웃듯 또 한 번의 이변은 일어난다.
바로 그토록 그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마지막 아시아의 별이자 끝의 연주자.
이성현의 손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