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26
26. 에스프레시보 (Espressivo, 표정을 풍부하게) -3
나는 연주를 마친 민호에게 첫 한마디를 내던진 그 순간부터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마주혁 원장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초견이다 보니 민호의 연주에는 빈틈이 너무나도 많았다.
초반부터 감정으로 확 밀고 들어가야 하는 도입부, 그는 아주 정직한 박자와 세기로 그 맛을 살리지 못했고 밋밋한 시작점을 가지니 곡 자체가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자, 민호야. 같이 상상해볼까? 네가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는 거야. 기숙서는 텅 비어있고 학교도 아무도 없어. 저기 창밖에서 무슨 사람 비명 같은 바람 소리만 휭휭 부는 거지.”
그래서 나는 ‘상황’을 주기로 했다.
곡에 감정을 싣는다는 건, 연주자가 곡에서 자신의 기억과 연관된 포인트를 찾아 몰입해냈을 때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줄줄 나고, 팔다리가 막 너무 아픈 거야. 바로 그때 저어어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온 거야. 편안하고 따듯한 그런 웃음소리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오른손은 건반을 향해 나아갔다.
아주 작게, 그러면서도 음은 선명하도록 건반을 연주했다.
“오오.”
그러자 김민호가 바로 옆에서 감탄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고 나는 그런 민호의 반응에 더 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응! 그러니까 성현이 네 말대로라면 그 뒷부분은···.”
내 확인 질문에 신난 아이처럼 미소를 만개하며 양손을 다시 피아노에 올리는 민호.
내가 연주했던 느낌 그대로, 그 뒷부분 역시 여리고 따스하게 연주하는 김민호. 내가 한번 감을 딱 잡아준 것만으로 그는 첫 소절뿐만이 아니라 악보 1페이지를 그대로 연주해 버렸다.
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깊은 감정을 담아서 말이다.
‘이걸 한 번에?’
하나를 알려주니, 둘을 넘어서 넷을 터득한 민호.
“와.”
이번에는 내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곧바로 의아하다는 듯 연주를 멈추는 김민호.
“음, 여기가 이게 맞나? 뭔가 좀···.”
와, 나는 자연스럽게 입이 더 벌어지고 말았다.
민호가 멈춘 지점은 바로 앞선 연주가 다시 반복되면서도 그 분위기가 변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계속 따듯한 느낌으로 가니까 뭔가 이상하지?”
“오오. 어떻게 알았어?”
“거기가 딱 분위기가 뒤집히는 전환점이거든”
“아, 그렇구나!”
내가 놀란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묻자 그런 나를 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민호.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상상을 해보는 거야. 아까 들려왔던 웃음소리를 네가 쫓아갔더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춤을 추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그게 아니었던 거지. 이상하게 웃고 있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거야.”
“으음. 그러니까 놀라는 건가, 아니면 슬픈 느낌?”
“그건 민호 네가 그 순간을 상상하면서 느껴봐야지.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서 해볼까?”
“좋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곡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곡.
쇼팽 발라드 4번.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 곡의 분위기를 민호가 느낄 수 있게 작은 퍼즐 조각을 던졌을 뿐.
“그러면 거기서···.”
“아아, 그러니까 이걸 놓을 듯 놓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가면,”
“그렇지. 그 바로 앞부분부터 가볼까?”
그런데 민호는 내가 던진 퍼즐 조각 하나만으로 완성된 그림을 떠올리며 올바른 방향으로 연주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이해력, 적응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지난 20년간 본적이 없었다.
거기에 이미 거대한 성벽이라 칭해도 좋을 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가졌고, 심지어 센스까지 있다.
‘이, 이런 만능캐가 있다니···.’
솔직히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과연, 그 최지은을 5년이나 압도해버린 데에는 이유가 있던 것이다.
“와. 성현아 너도 이 곡 연주해본 적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아차,
내 레슨을 두려울 수준으로 쭉쭉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민호에게 놀라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나 발라드 4번 연주해본 적 없다고 했었지?
순수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대하는 표정의 민호. 사실, 미래의 김민호가 인터뷰했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이것저것 살을 붙였을 뿐인데···.
이렇게나 깨끗한 눈으로 날 바라보니 좀, 많이 부담스러웠다.
“어? 아아. 으음. 그냥 악보를 보고 있다 보니까. 그냥 감이 와서?”
그래서 내가 눈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리자 김민호는 오히려 그런 내 발언에 더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넌 천재야.”
아니, 천재는 너고 이놈아.
으, 미래의 김민호를 따라 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참, 상황이 난감해졌다.
짝짝짝,
그때, 근처에 앉아있던 마주혁이 손뼉을 쳤다.
“기대 이상이에요. 정말로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민호 그리고 이성현 학생 둘 다. 대단하네요. 역시 대단해.”
긴 감탄을 내지르며 흥분한 기색을 그대로 보여주는 마주혁. 얼굴은 평온했고 말하는 어조 역시 평탄했으나 그는 분명 크게 흥분해 있었다.
“그럼 이제, 성현 학생의 연주를 들어볼까요? 사실 내가 줬던 30분은 진작 지났답니다.”
아, 시간제한이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그래도 마주혁 원장의 표정을 보니 내가 제적당할 위기는 이미 넘긴 모양이었다.
“자, 성현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는 민호. 나는 그가 앉아있던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악보를 주시했다.
음, 큰일인데.
사실, 발라드 4번을 연주해본 적 없다는 말은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담이었다.
곡에 대한 지식은 넘쳐나도, 직접 내 손으로 그 곡을 쳐본 적은 20년간 단 한 번도 없던 것이다.
옆을 돌아보니 기대하는 얼굴의 민호.
반대쪽을 보니 빙긋 웃고 있는 마원장님.
여기서 기본도 안되는 연주를 했다간 말짱 도루묵인데···.
그렇게 혼자 식은땀을 흘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낯선 듯하면서도 친숙한, 방금까지 민호가 연주하고 내가 감을 잡아주던 바로 그 곡.
내가 놀라 슬쩍 고개를 들자 악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다섯 가닥의 선.
그 ‘의문의 선율’이 들려온 것이다.
이전에 혼자서 어떻게든 이 선율이 들리는 조건을 찾아내려고 발악을 할 때는 들릴 기미도 안 보이더니,
게다가 ‘버스킹’을 할 때 역시 선율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왜 지금?
지금 이 상황이, 클래식 동아리 때와 피아노 전공생들 앞에서 연주했던 때랑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거지.
“성현아?”
그때 나는 나를 부르는 민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우선 중요한 건 ‘선율’이 아니다.
집중하자.
난 지금 피아노 앞에 있다.
피아노와 악보 그리고 선율.
그것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나는 거리낌 없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Chopin – Ballade No. 4 in F minor, Op. 52](쇼팽. 발라드 4번)
나의 손은 건반을 헤엄치듯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성현의 연주를 듣자, 마주혁은 자신의 심장이 크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천재의 합동 연습에서 감동하고 감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현의 ‘발라드 4번’은 이미 그런 영역을 초월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옛 추억.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자신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본선으로 올려주었던 아름다운 발라드 4번.
그때, 마주혁은 평소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뛰어넘었었다.
돌이켜보아도 감미로운 감각.
아무리 연습해도 다시는 연주해내지 못한 그 완벽한 음색.
그때의 기억이,
당시의 감각이.
지금 피아노를 연주하는 성현이의 손끝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바람이 마주혁을 머나먼 추억의 장소로 날려 보내고 그는 젊고 열의 넘치던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너무 긴장해서 연주장으로 올라가다 발을 헛디딜 뻔했던 일.
슬쩍 자애로운 미소를 보여준 심사위원에게 감사하며 암보해둔 악보를 천천히 톺아보던 순간.
마른 바람이 자신의 손을 스친다.
어째서인지 그윽한 향수가 긴장했던 자신의 코를 자극했다.
두근거림이 천천히 가라앉고 이제는 거대한 연주 소리가 자신의 귀를 자극하는 환청을 들었다.
그리고 마주혁은 그 아름다운 음색에 맞춰 건반을 두드렸었다.
“성현 학생.”
연주를 끝낸 성현이 한껏 거칠게 숨을 쉬던 와중. 마주혁은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일부터 내 레슨에 나오세요.”
그런 그를 보며 마주혁은 확신했다. 성현이는 세계급 연주자가 될 자질이 있다는 것을.
성현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란 얼굴이 되었다.
***
휘휘-
유명 언론사에서 10년 넘게 흔들림 없이 메인 기자의 자리를 지키는 남자, 김백찬은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까지 불며 수첩에 다양한 메모를 적고 있었다.
새로운 천재, 드디어 첫 콩쿠르에 나선다.
“아니, 조금만 더 음.”
피아노계의 혜성, 대중 앞에 서다.
“흐음. 뭔가 좀 그런데.”
펜을 입에 물고 고심하는 표정의 김백찬. 그의 책상 모니터에는 오직 ‘이성현’을 키워드로 쓰인 기사들이 쫙 펼쳐져 있었다.
“선배님? 편집장님이 찾으시는데요.”
“어? 어. 금방 갈게.”
그때 뒤에서 김백찬을 찾아온 젊은 기자 하나, 백찬은 그의 말에 수첩을 접고 편집장실로 향했다.
“백찬이! 내일모레 프랑스의 피아니스트가 내한하는 거 알고 있겠지?”
김백찬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시원하게 큰 소리로 물어보는 편집장.
“카를로스요?”
“그래! 듣자 하니 꽤 거물인 것 같던데, 아무래도 클래식 쪽에 잔뼈가 굵은 네가 가야 하지 않겠어?”
“예? 안됩니다. 다른 애 보내세요. 저는 못갑니다.”
“뭐? 다른 특종이라도 잡은 거야?”
백찬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확 구겨졌던 편집장의 얼굴은 다시 순식간에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클래식에 관해서 만큼은 이 신문사에서 최고라 부를 수 있는 백찬이다.
어련히 알아서 더 큰 걸 물고 왔겠지, 생각하는 편집장이었다.
“예. 아마 편집장님도 들으면 놀라실 겁니다.”
“뭐?! 뭔데! 어디 시원하게 말해봐!”
“저번 미향예고 신입생 연주회 때 메인으로 썼던 학생 있잖습니까. 이성현이라고.”
“오오, 그래! 왜! 걔가 국무총리의 숨겨둔 아들이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사흘 뒤에 그 아이가 첫 콩쿠르를 나가거든요.”
“뭐?”
편집장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구겼다.
“그게 다야?”
“그게 다라뇨 편집장님, 그 애는 김민호 최지은보다 더 뜰 천잽니다. 제가 확신해요.”
“아니, 천재고 자시고 아직 고등학생이잖아. 그게 프랑스 피아니스트의 내한 공연보다 중요하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편집장의 얼굴. 그런데 김백찬은 거기서 한술 더 떠서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훨씬 중요하죠.”
“아니! 하아. 내가 그래도 너 때문에 클래식 10년 들어봤다 새꺄. 고등학생이 프로보다 중요하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말이 되더라고요.”
“하, 새끼, 웬일로 내가 너랑 의견이 갈리냐.”
“편집장님, 제 감, 못 믿으십니까? 저 아시잖아요. 하루 쉬면 후배한테 밀린다는 ‘가온일보’에서 지난 10년간 메인 자리 먹고 있는 저예요.”
“알지, 아는데, 상식적으로 말이야.”
자신감 넘치는 김백찬의 확신에 좀 누그러지는 편집장. 그는 그래도 김백찬을 회유해보려는 듯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으나,
김백찬은 말했다.
“저 믿어보세요. 또 한 건 할 테니까요.”
성현의 첫 콩쿠르가 딱 사흘 남았다.
그리고 이를 주목하는 이들의 숫자는 아마도 당사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배는 많을 것이다.
새로운 혜성.
이성현.
정말 다양한 이들이 그의 콩쿠르 출전에 주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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