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27
27. 브릴란테 (Brillante, 화려하게)
마에스트로 마주혁의 레슨을 듣는다는 건, 단순히 M스튜디오에 있을 자격증명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대사건이었다.
앞서 말했듯 마주혁은 자신이 진행하는 레슨에 딱 두 가지 경우의 수강생을 부른다.
자신이 수제자로 삼고자 하는 학생.
M스튜디오에 있을 자질이 의심되는 학생.
그런데 김민호나 지금의 나처럼 ‘계속해서’ 레슨을 듣게 되는 경우는 오직 전자뿐이었다.
이는 즉, 피아노 교육이 제대로 체계화를 이루지 못했던 20세기의 거장, 마주혁이 나를 키워보고 싶다고 대놓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스튜디오 대표의 제자가 되다니···.”
이전 생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사건이었다.
그렇게 ‘마’레슨의 초대를 받은 지 일주일, 저번 주 일요일과 이번 주말까지 이틀. 도합 삼일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열흘은 배운 듯한 효과가 있었다.
나는 민호에게서 탄탄한 기본기를 쉽게 갖추기 위한 요령 따위를 배웠고, 민호는 나에게서 더 쉽게 ‘칸타빌레’에 도달하는 힌트 같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전체적인 레슨의 방향만 짚어주는 마주혁 원장님.
“오오.”
분명 레슨 중인데도 이상하리만큼 감탄사가 수시로 터져 나오다 보니, 이게 피아노로 놀고 있는 건지 레슨을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만큼 김민호와의 합동 레슨은 즐거웠다.
또한, 귀가 예민한 마원장님과 민호가 바로 옆에서 내 연주를 수시로 짚어주다 보니,
‘반주자’ 같이 감정이 모자라지도, ‘감정 과잉’이 되어 감성이 차고 넘치지도 않는 그 모호한 지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이제 콩쿠르의 예선을 딱 이틀 앞둔 일요일이 되었다.
“내가 클래식계에서 살아온 지 이제 40년이 다 되어가는데, 너희 둘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처음 보는구나.”
이번 콩쿠르에 대한 팁을 달라고 김민호가 장난스레 부탁하니 영 이상한 대답을 내놓는 마원장님.
“원장님. 한 쌍이라고 하니까 뭔가 커플 같아서 징그러운데요. 너도 그렇지 성현아?”
“어? 응.”
내심 좋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간 김민호가 이상하게 볼까 봐,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니, 솔직히 20년간 쫓아다닌 스타랑 한 묶음으로 취급해주는데 안 좋아할 팬 있나?
“원장님. 이번 예선에서 저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뭐가 있을까요.”
“주의해야 할 점이라···.”
내 질문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되는 마원장님.
한참을 더 그렇게 고민하던 그는 과연 한 시대를 대표했던 거장답게 그런 말을 했다.
“누구의 어떤 연주를 듣게 되던 너희에게 없는 뭔가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으면 좋겠구나.”
과연, 자신보다 한참 모자란 나에게 진지한 태도로 배움을 청했던 김민호.
그 멋진 마음가짐을 누구에게서 배웠던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렇게 콩쿠르 예선 전 마지막 레슨을 끝내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기숙사가 아닌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어어?! 이게 다 뭐니?”
집에 도착한 나는 양손 가득 들고 온 A급 한우 세트를 내려놓으며 깜짝 놀라는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나보다 내 걱정을 해주시던 엄마의 그런 표정을 보니 자연스레 내 입가에서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냥 오는 길에 보이길래 사 왔어요.”
“아니,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걸 사와?”
“요전에 선생님 친구분 공연을 돕다가 용돈 같은 걸 받았거든요.”
서글서글 웃으며 놀란 엄마에게 홍대 ‘버스킹’을 했던 날의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 빈손으로 오는 것보다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한우를 사 오길 잘했다.
마음은 가볍게, 손은 무겁게 사회인의 기본 아닌가.
그걸 다시 학생이 되어서야 하고 있다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오기에는 가슴속에 묘한 불안감이 사라지질 않았다.
이전 생에서 무려 20년간, 내 피아노를 반대하셨던 아버지와 담을 쌓고 지냈던 나.
다시 그때와 똑같이 서먹한 관계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피아노와 예고 일정에 치여 사느라 근래 본가에 통 얼굴을 비추질 못했었다.
“여보, 이거 봐요. 성현이가 소고기를 글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부엌으로 향하는 엄마. 집안은 이미 향긋한 집밥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서둘러 양팔을 걷어 올린 나는 알아서 척척 버너와 불판을 준비했고, 서둘러 소고기를 구웠다.
“야유, 위험해! 엄마가 한다니까?”
“아니에요. 제가 구워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아이고, 우리 아들 다 컸네. 여보도 무슨 말 좀 해줘요. 애가 이렇게 의젓해졌는데.”
“…”
그러나 끝내 입을 떼지 않고 묵묵히 식사만 하시는 아버지.
M스튜디오에서 마주혁 원장님을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억지로 몰아붙이듯 미향예고에 원서 작성을 허락받았던 그 날부터 아버지는 나와 직접 대화를 나눠주시질 않았다.
두려움이 있었다.
이전 생에서 끝내 바로잡지 못한 그 어긋난 관계를 이번에도 똑같이 답습하게 될까 봐.
지난 겨울 방학 내내 아침 일찍 M스튜디오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던 것도 실은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억지 미소로 무마하려 했으나, 사실 나는 지금도 너무나 두려웠다.
“성현아.”
그때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여셨다.
정말 오랜만에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시면서 아주 무겁게.
아버지의 그 서글픈 빛을 담은 눈동자가, 내가 두려워하던 그 눈빛이 나를 주시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었다.
이 시기에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아버지는 한 학기마다 내야 하는 등록금 3백을 아주 큰 부담으로 느끼셨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일반고로 재입학하기를 권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생에 처음으로 큰 성공을 이뤄본 나는 고집적으로 미향예고에서 나오는 것을 거부했다.
현실을 보라는 아버지에게 나는 표정을 구기며 장학금을 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도 결국, 1학기에 내가 받은 등수는 202등. 장학금은 고사하고 한없이 밑바닥을 치던 자신의 등수도 지켜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집에 돌아가기를 어려워했고,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 생활하면서도 그 상황이 너무 싫었다.
후회했다.
차라리 처음 아버지가 점잖게 자퇴를 부탁해주셨을 때, 그냥 그 말을 들을걸.
고립된 인간관계와 끊어진 가족관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아노에 미쳐버리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아버지.”
나는 화를 내지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고 딱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이번 콩쿠르 예선 티켓이에요.”
작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그것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꼭 와서 들어주세요.”
몸은 고작 고등학생의 모습일지 몰라도 전생을 포함하면 나는 이미 마흔을 눈앞에 둔 사람이었다.
많은 말은 되려 신뢰도를 떨어뜨린다는 것도, 장황하고 추상적인 것들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드렸을 때 그 말의 무게가 더 실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두 장의 티켓을 내밀뿐.
“들려드리고 싶어요.”
말문이 막힌 아버지는 내가 내민 티켓을 받으셨고, 나는 그 모습에 씩 미소를 지으며 허겁지겁 저녁을 먹었다.
무슨 맛이었는지 똑바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태연한 척했었으나, 그만큼 나는 많이 긴장했었던 것 같다.
이윽고,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 당일이 밝아왔다.
***
서울시와 미향예고가 합동으로 주최하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
사실 많은 혜택과 언론의 이목을 끄는 콩쿠르의 규모에 비교해 프로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연, 이 콩쿠르가 만들어진 취지이자 목적 자체인 ‘신인 발굴’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이 콩쿠르는 이미 자리를 잡은 프로를 보다 엄격하게 평가하기로 유명했다.
괜히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등용문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아트홀.
총 좌석 수가 200석이 조금 안 되는 규모의 이 공간에서, 지금껏 수많은 신인이 발굴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었다.
“야.”
그런 장소에서 나 홀로 대기실에 앉아 있다 보니, 왠지 모를 위압감이나 녹진한 긴장감이 나를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야, 이성현!”
“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 옆을 보니,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최지은이 꾸깃꾸깃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긴장했어?”
“긴장? 잘 모르겠어.”
그런데 모르겠다 대답하는 내 입과는 정반대로 머리는 최지은의 질문을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 나 긴장하고 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오늘 이 연주회에 오시기로 한 부모님 때문이 아닐까.
“무슨 일 있어?”
이럴 때만 순한 목소리를 내며 찡그린 얼굴까지 풀고 걱정스럽게 묻는 최지은.
정작 그녀 자신도 긴장에 취약하면서,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새삼 고마웠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그런 얼굴로 잘도 아무 일 없겠다.”
삐뚤게 나를 일갈하면서도 옆자리를 지켜주는 최지은.
사실은 너무너무 무서웠다.
자신은 변했다고 믿으면서도, 실제 등수도 실력도 모든 것이 변했으면서도, 오늘의 작은 실수 하나가 다시 나와 부모님과 멀어지게 만들진 않을까.
아무리 피아노를 열심히 쳐도 부모님에게 내 열의가 닿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아니, 애초에 부모님은 날 믿어주지 않으셨고, 오늘도 이 아트홀에 나타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둥둥 부유해 나를 괴롭힌다.
뭐가 좋은 연주인지, 어떻게 치는 게 나를 쏟아내는 피아노인지가 영문도 없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야. 이거 받아.”
바로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최지은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어?”
내가 엉겁결에 손을 내밀자, 내 손에 쥐어지는 작은 알사탕.
“사탕?”
“그냥 알사탕이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오늘을 위해서 직접 만들어주신 특제 알사탕이지. 먹으면 그냥 달달한데 마음이 좀 진정되는 그런 효과가 있을 거야.”
자신도 한껏 긴장한 상황일 텐데도 나를 위해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하는 지은이.
나는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그런 말을 하는 지은이를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입시 고사 날 내가 줬던 초콜릿처럼?”
“그, 그래. 이 거짓말쟁이야.”
“풉!”
“왜, 왜 웃어! 사람이 기껏···!”
내가 대놓고 웃자 부끄러움이 한계에 달했는지 화를 내려는 지은이.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로.”
“흥, 알면 됐고. 네 차례 거의 다 됐으니까. 슬슬 나가서 대기해.”
“응.”
나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내 긴장을 풀어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대기실을 나왔다.
제대로 앞을 바라보자, 두 눈에 담기는 풍경.
순번을 체크하는 스태프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이름 모를 연주자들.
익숙하지는 않은 광경이었지만, 그렇게 낯선 기분도 아니었다.
“61번 이성현 참가자 맞죠?”
“예.”
“1악장을 연주하시면 됩니다.”
“네!”
나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최지은과 장난치느라 잡다한 것들로 꽉 차 있던 머리가 말끔해졌다.
“서, 성현아. 화이팅!”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63번 번호표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이예린이 보였다.
얘도 참가했었구나···.
“응. 고마워.”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하고는 드디어 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밝은 스포트라이트를 지나, 정적과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한 대만이 나를 맞이하는 그곳에 오르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다시 돌아왔구나.’
실기 우수자니 그런 것 말고, 정말 그냥 순수한 참가자로서 나는 이번 생에 처음 맞이하는 광경을 충분히 음미했다.
관객석에 않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연주자의 등장에 집중하질 않았다.
그야 본선도 아니고, 예선이니까. 흔한 광경이었다.
매너 없이 핸드폰을 하는 사람도 있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리고 나를 예사롭지 않게 노려보는 심사위원들까지.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대, 의심, 무관심 등의 각양각색인 마음들.
그리고 쭉 훑어본 관객석의 구석,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연주자인 나보다 긴장한 표정의 엄마와 묵묵히 입을 꾹 닫고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
부모님을 마주한 순간.
나는 어떤 욕심이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다.
저 사람들의 입이 모두 떡 벌어지게 해주고 싶다.
꾹 다물고, 쭉 벌려 하품하고, 끝만 올라간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저 사람들을 모두 나의 피아노에 감동하도록,
연주하고 싶다.
그런 욕심은 차분해졌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지폈고, 그 마음은 삽시간에 활활 타오르는 열의가 되어 나를 뜨겁게 달궜다.
객석을 향해 힘찬 인사를 건넨 나는 거침없이 피아노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손을 든다.
악보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그 의문의 선율은 들려오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어떤 연주를 해야 할지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랐다.
[Beethoven Sonata for Piano and Violin No.5 in F Major Op.24 ‘Spring’](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엘리나와
최지은과
김민호와 함께 연습했던 순간들이 머리를 스친다.
이윽고, 나의 손은 건반을 향해 날아들었고,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이는 푸름을 짙게 머금은 ‘봄’이 피어올랐다.
나의 화려한 ‘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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