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28
28. 브릴란테 (Brillante, 화려하게) -2
오늘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예선이 치러질 이곳 종로구의 아트홀,
김백찬은 저녁에나 밀려들 인파를 피하고자 이른 시간부터 자리를 잡았다.
위치는 심사위원들이 앉는 정중앙에서 조금 오른쪽, 연주자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연줄까지 써서 티켓 발부 전부터 잡아놨던 자리다.
‘뭐, 예선에서 그런 부탁까지 하신데요? 민호랑 지은이는 어차피 본선에 나올 텐대’
김백찬에 부탁에 황당하다는 듯 말하던 스태프, 백찬은 그런 그를 향해 말했었다.
‘첫 독무대거든.’
‘예? 아··· 어디 재벌가 애라도 나와요? 누군데요.’
‘그런 게 아니야. 자식아.’
‘그럼 뭔데요. 진짜 친척?’
‘아니, 딱 한 번의 연주만으로 나를 팬으로 만들 만큼 대단한 사람이 있어.’
‘예에?! 형을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높이던 그는 성인의 나이를 먹은 참가자 명단을 보여주며 자신을 닦달했고 백찬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딱 한 마디를 내던졌다.
‘이성현. 분명 거물이 될 친구야.’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준비한다.
할 수만 있다면 인터뷰까지 따고 싶은 게 백찬의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예선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자 슬슬 다른 신문사의 음악 기자들이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짬밥도 얼마 먹지 않은 막내들이라 베테랑인 백찬의 얼굴을 보고는 적잖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얼핏 들리는 말소리에서 김민호, 최지은의 이름과 함께 이성현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역시나 이미 많은 곳에서 성현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주최자에 미향예고가 들어가 있는 만큼 언제나 1위에서 5위까지의 예선 통과자들의 등수를 공개한다.
그리고 차갑게 갈리는 순위는 그 자체로 기자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김기자님? 기자님이 이런 예선에는 무슨 일이세요?”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허스키한 보이스. 이에 백찬이 뒤를 돌아보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숨김없이 드러낸 중년의 여성이 보였다.
“문교수님? 이야, 이거 오랜만이네요. 입국하신 지 얼마 안 되셨다고 들었는데요. 시차 적응은 괜찮으신 겁니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일명 ‘한예종’의 교수이자 동시에 이번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역할을 맡은 문영화 피아니스트.
“프랑스야 뭐,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김기자님은 특종만 쫓아다니시는 거 아니셨나요? 저랑 같이 입국한 카를로스 쪽은 어쩌시고요.”
“제 걱정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가 또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카를로스보다 큰 게 여기 있다. 뭐 그런 건가요? 지은이랑 민호 말씀하시는 건가?”
의아한 얼굴의 문영화 교수. 백찬은 그런 그녀의 표정이 자신에게 성현에 관해 묻던 스태프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예선은 좀 재미있을 겁니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다시 수첩에 집중하는 김백찬 기자. 문영화 교수는 백찬의 언행을 이해할 수가 없어 조용히 자릴 떠났다.
그렇게 1시간쯤 더 지나자 드디어 예선이 시작되었다.
이번 예선에서 연주해야 할 과제곡은 바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총 26분 정도의 연주 시간이 걸리는 이 곡에서 한 악장씩 차례로 부여해 참가자에게 연주시키는 방식으로 이번 예선은 진행된다.
첫 연주자부터 거의 서른 번째까지 별다른 특색이 없는 연주가 반복되니 기자건 일반인이건 가리지 않고 점점 더 주의가 산만해져 간다.
어쩔 수가 없다. 원래 무료로 객석을 주는 예선은 대게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허나, 32번. 김민호의 차례가 되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올 것이 왔다는 얼굴의 기자들과 무표정을 풀고 서서히 미소를 짓는 심사위원들.
확정된 보증 수표.
검증된 천재.
실제 김민호의 연주 역시 아주 대단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한 표정의 아니, 긴장감 넘치는 이 공기를 오히려 자신이 압도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얼굴로 주저 없이 피아노로 걸어가는 민호.
이어지는 연주 역시 탁월했다.
이전 연주자들과는 다르다.
안정성 넘치는 기반을 두고, 따스하게 터트리는 봄꽃 향기. 그야말로 눈을 감아도 화사한 그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정말이지 백 점짜리 연주였다.
가뿐하게 연주를 마친 김민호가 무대에서 내려간다.
밝게 드리워졌던 빛이 사라지듯 금방 다시 열기가 식는 객석.
한참을 더 그렇게 지루한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 보니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61번 참가자, 고등학교 1학년에 이번이 첫 콩쿠르인 학생. 이성현.
‘드디어?’
김백찬은 흥분하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차례대로라면 이번 성현이가 연주할 악장은 1악장.
그는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신입생 연주회’에서 그 악장을 반주자의 자세로 연습했던 경력이 있다.
‘여기서 반주를 넣던 버릇이 나오면 끝이다!’
아무리 이성현 학생이 뛰어난 자질을 가졌건, 머리가 비상하건. 한번 손에 배인 반주자로서의 연주를 흔적도 없이 지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콩쿠르.
솔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이지 못한다면 그 순간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무대 위에 선 성현은 그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천천히 객석을 둘러보았다.
인사도 없는 돌발행동에 당황하는 심사위원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객석의 좌측 끝에 닿자 씩 지어지는 미소.
성현은 그 순간 고개를 푹 숙이더니 힘찬 발걸음으로 피아노로 향했다.
‘저기 누가 있는 건가?’
좋은 기삿거리라는 생각에 김백찬 기자가 한눈을 판 사이, 성현은 천천히 양팔을 들었고,
아주 느긋하고 편안한 얼굴로 그는 건반에 손을 얹었다.
‘봄’.
그윽한 푸름이 피아노에서부터 쏟아져 나온다.
“하.”
또다시 김백찬 기자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전체를 좌우한다는 그 도입부를 이렇게나 가볍게 쳐내는 모습을 보자 백찬은 성현을 향하던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내가 누굴 걱정한 거냐.’
백찬의 걱정이 무색해질 만큼 하늘 위 구름에 사뿐히 앉은 새처럼, 성현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 작은 날갯짓에도 짙게 풍기는 숲의 내음. 돋아나는 새싹.
수많은 형태의 봄이 객석을 가득 감싼다.
‘역시 천재에게 이런 일은 난관조차 될 수 없는 거지!’
백찬은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예감했다. 바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다른 기자들도 이성현의 가치를 알아볼 것을.
***
무대에서 내려온 나는 옥죄어 오는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빈자리를 찾았다.
객석에 있던 모든 이들이, 심사위원이 똑같은 얼굴이 되었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도 놀란 눈빛으로, 그리고 감동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성공했다.
나의 첫 무대.
솔리스트로서의 생에 첫 연주는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하아아아아.”
뒤늦게 긴장이 풀리자 경직되어있던 팔다리가 쑤셨다.
그것을 천천히 주무르고 있자 옆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
“고생했어.”
최근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김민호였다.
그의 격려에 웃으며 무슨 대답이라도 하려 했는데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진짜 잘했어. 내가 첫 콩쿠르 나갔을 때보다 훨씬 잘하던데?”
“너 그때 몇 살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이놈이?
“하. 하하핫.”
민호의 장난에 화를 내려 했던 내 입에서 어째서인지 긴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로 고생했어. 아 근데 성현아 너, 나가봐야겠던데? 밖에서 정석 선배님이 너 찾던데.”
“선생님이?”
나는 곧장 놀란 눈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명, 일정이 생겨서 못 온다고 하셨었는데?
“성현아! 여기야.”
놀랍게도 정말 참가자 대기실을 나가 로비로 향하자 멋지게 선글라스를 쓴 정석 선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마원장님이 맡아주시기로 했다면서. 이제는 선생님이 아니라 선배라고 불러.”
“서, 선배?”
“그래. 이젠 M스튜디오 선후배지. 나도 마원장님한테 배웠으니까.”
정석 선배가 나를 정식으로 후배 취급해준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준 사람에게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보다 성현아. 저기 소파 있는 곳에 모셔드리고 왔으니까. 얼른 가봐.”
“모셔드렸다니 누구를요?”
“누구긴 네 부모님이시지. 어젯밤에 나한테 전화해서 네가 그랬잖아.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고 한다고.”
그냥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정석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인데, 그는 이렇게 직접 달려와 주었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몇 번이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아직 콩쿠르 도중이라 사람도 한산하니까. 지금 가봐.”
“고,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심정이 돋아나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토닥여주면서 등을 밀어주는 정석 선배.
기쁜 마음을 품고 달려간 그곳은 이 아트홀에 마련된 작은 카페였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미소를 짓고 있는 부모님들,
지난 생에는 결코 미소로 마주할 수 없었던 나의 부모님이었다.
“아버지, 엄마.”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부모님을 부르자, 엄마는 활짝 피어난 봄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꽉 안아주었다.
“성현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보다 더 긴장했고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진정한 엄마를 앉히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나.
장학금을 따낼 것이다.
입시 우수자가 힘들다면 종합 성적 1등을 노려서라도 해내겠다.
이미 입시 1등과도 조를 짰고, 벌써 실기 고사 준비까지 하고 있다.
나를 믿어달라고.
꼭 부담되지 않도록 힘내겠다고
나는 부모님 앞에서 당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전생과는 사뭇 다른 밝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
나로 인해 골병들고, 나 때문에 하루도 쉬질 못하셨던 그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겠구나. 정말 잘했다.”
아버지는 말해주셨다.
장학금을 따지 못해도 된다고, 내가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정말 열심히 힘내고 있는 것 다 안다고.
내게 고맙다고까지 말씀해주셨다.
절그럭,
그 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언제나 내 발목에서 사라지지 않던 녹슨 족쇄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드는 나.
언제나 안된다고만 말씀하시던 아버지에게 장장 22년 만에 들어본 칭찬이었다.
나는 드디어 부모님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
그로부터 이틀 뒤,
‘신입생 연주회’를 잘 들었다며 누군가 내게 후원을 보냈다는 소식도 있었고, 이번 콩쿠르 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이 나를 매우 좋게 보았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나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수학과 씨름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중간고사가 딱 2주 남았거든.
입학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교과목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아직도 휴식을 취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와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고 어울려주는 엘리나.
“나는 좋아요. 성현이 내가 모르는 걸 알려 주잖아요.”
곤란하지 않으냐 묻자 그런 대답을 돌려주는 그녀. 게다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나와 방과 후 공부를 할 때마다 싱글벙글 웃는다.
정말로 수학이 재미있나?
만약 이 가정이 옳다면 나는 아마 평생 엘리나를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야! 예선 결과 떴대!”
그때, 복도를 힘차게 달려가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빨리 공개된 콩쿠르 예선 결과에 멍하게 있자 오히려 엘리나가 나를 잡아당겼다.
“성현, 성현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바글바글한 피아노 전공생들이 미향예고 중앙 복도 게시판 앞에 모여있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았던 심장이 뛴다.
아무리 20년을 굴러먹던 나라도 이 순간은 정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애초에 이런 적이 있었나?”
“야, 이 콩쿠르 사상 최초 아냐?”
그때 앞에서 경악으로 물든 학생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터져 나왔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싶어 내가 더 다가가자.
“이성현?”
“성현이다.”
“와. 축하한다!”
“대단하다. 너 진짜.”
나는 아직 결과도 못 봤는데, 사방에서 벌써 나를 향해 이런저런 찬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게시판 앞에 도달한 나는 보았다.
전생에는 예선 통과는커녕 그냥 떨어졌던 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통과명단에 들지 못했던 최지은.
그리고 예선 통과자 순번에서도 마지막쯤 이름이 올라와 있던 김민호.
이 셋의 이름이 모두 나열되어 있던 것이다.
[1등 – 김민호, 최지은, 이성현.] [4등···]공동 1등으로.
“성현! 와. 대단해요! 성현! 우와아! 공동 1등이에요! 그것도 셋이서!”
나보다 더 좋아하면서 내 교복을 잡고 방방 뛰는 엘리나.
예선에서의 등수는 본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단순한 사전채점이자, 밑 등수의 사람들을 채찍질하기 위한 자극제.
그게 이 예선 통과명단의 모든 의의라는 걸 아는데,
그걸 분명 알고 있는 나인데···.
그래도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그 두 천재와 나란히 섰다는 사실 하나가 날 미소 짓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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