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3
3. 지오이오소 (Gioioso, 즐겁게) -2
식탁에서 보이는 브라운관 TV.
압력밥솥이 내는 소리와 보글거리는 찌개까지.
20년 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은 정말 젊었다. 아직 쉰도 넘기시지 않은 정정한 나이의 아버지.
엄마를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내게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주시는 아버지를 보자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는 내 예고 입학을 반대하셨었다.
2009년의 여느 아버지들이 그렇듯 펜대나 굴리는 공무원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부보다 피아노를 좋아했기에 예고에 들어갔고, 그 후 무려 21년간 아버지와 나는 화해를 하지 못했었다.
“다녀왔어요.”
아주 당연한 인사를 나는 몇 번이나 입속에서 곱씹은 뒤에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 몸은 괜찮고?”
그 서툰 걱정에, 괜히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예. 그냥 현기증이었어요.”
“그러니까 평소에 잘 좀 먹고 다니라니까.”
그리고 20년 만에 듣는 그리운 잔소리에 나는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나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고요한 나의 방.
나는 그곳에서 소리 없이 엉엉 울었다.
***
솔직히 긴가민가했는데 아무래도 정말로 과거에 돌아온 것 같다.
만약 주마등이나 꿈이었다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시 아저씨가 되었을 각오까지 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실이다.
진짜 중학교 3학년의 겨울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를 확실하게 직시하자 좀 두려웠다.
피아노를 만질 때의 즐거움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현실적인 문제들이 마구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우선 등록비.”
예술고는 일반고와 달리 등록금이 어마어마하다. 무슨 대학 등록금 수준.
이번에는 나 때문에 부모님들의 등골이 휘는 건 절대로 볼 마음이 없었기에 목표를 다짐했다.
실기 우수자로 선출된 2명.
혹은 교과 점수에 실기 고사 점수까지 합산한 합산성적 1등.
“그래. 그 세 명 안에 들자.”
그 셋만이 미향예고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
솔직히 실기 우수자는 그 김민호와 만년 2등이라 불리던 그녀를 내가 넘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 목표로 해야 할 건 합산성적 1등.
다행히도 나는 미향예고에서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실기 고사에서 말아먹어서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그다지 좋은 이유는 아니었다.
‘기본도 잡히지 않은 놈.’
‘음악에 진지하지 않은 학생.’
‘대체 어떻게 미향예고에 합격한 거야?’
당시 나를 괴롭히던 말들이었다.
그리고 꼬리표나 다름없이 3년간 날 따라다니던 조롱이기도 했다.
그렇게 피아노를 칠 때마다 욕을 들으니 도피하듯 공부를 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뭘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었나 싶다.
기본이 잡히지 않았으면 더 연습하면 되는 것이고,
음악을 진지하게 마주 보는 일은 남들보다 2배로 듣고 3배로 연주하면 되는 것일 뿐.
안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는 입학하는 첫 학기의 등록금인데.”
이제는 잘 안다.
290만 원이라는 돈이 옆집 누렁이 이름도 아니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부모님이 아끼고 아껴가며 간신히 마련해주셨었다는 걸.
그러니 이번에는 첫 등록금을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비트코인과 같은 것들은 나중의 일이고 주식 같은 건 더 모른다.
“그리고 더 그보다 중요한 게 피아노인데···.”
막상 나는 예고 입시를 준비할 장소가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미사를 드리던 성당에 간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성당에서 연주하는 건 너무 제한적이다.
남는 것은 클래식 동아리에서 쓰는 그 그랜드 피아노인데, 동아리가 끝나면 5시. 학생은 무조건 하교해야 하는 시간은 7시.
하루에 고작 2시간 치는 것으로는 예고 합격은 택도 없을 것이다.
“아침이야! 이제 일어나!”
“네~”
나는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첫 학기 등록금과 연습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계속 고민하며 나는 아침을 먹고 학교로 향했다.
-음악실
방과 후가 되어 잠깐이라도 피아노를 만져보기 위해 클래식 동아리의 협주를 들으며 앉아있던 중이었다.
“야, 이성현! 대머리 독수리가 너 찾아”
같은 클래식 동아리원이 내게 말했다.
“교장이?”
클래식 동아리에 관심이 많은 교장이지만 나처럼 뜨문뜨문 동아리에 고개를 들이미는 학생은 싫어했을 것이다.
“어. 얼른 가봐. 개 급한 거 같던데.”
나는 의아한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장실로 향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간 교장실.
벗겨진 머리가 반짝이는 교장이 중앙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정석 선, 생님?”
습관적으로 선배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길래 바로 바꿨다.
“이성현 학생. 여기 앉아 볼래?”
곧바로 젠틀하게 내가 앉을 자리를 가르쳐 주는 정석 선배.
나는 감사하다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내가 앉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여는 교장 선생님.
“두 달쯤 전에 나와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나?”
교장이 대뜸 그런 말을 내뱉는 바람에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인상을 조금 찡그리는 교장.
“일반고에 진학할 생각이라고 진로 상담 때 나와 이야기했었잖니.”
그러고 보니, 클래식 동아리 명단에 올라간 사람은 담임선생님뿐만이 아니라 교장과도 면담했었다.
“아니, 고작 두 달이 조금 넘은 일인데 벌써 잊어버렸다고?”
음, 21년하고도 두 달이라고 말하면 교장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솔직히 아주 궁금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크흠, 각설하고 말하자면 여기 계신 피아니스트 선생님이 너를 꼭 미향예고 입시에 도전해볼 수 있게 설득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단다.”
나는 교장의 말에 놀라 고개를 홱 돌려 정석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 엉망진창이었던 연주를 듣고도 나를 추천해주시다니, 나 스스로는 잘 이해되질 않았다.
그래도 그 호랑이 선배가 좋게 봐주셨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김정석 피아니스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나는 이성현 학생의 실력이 그 정도라고 생각이 되진 않아서 말이야.”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 말씀은 네 연주를 들어보고 싶다. 그런 말이야.”
괜히 말이 많은 교장을 대신해 간단하게 정리해주는 정석 선배.
교장도 나름 듣는 귀가 뜨인 사람이다.
30년간 클래식 연주회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피아니스트와 친분을 만들었을 정도로.
실제로 눈앞에 있는 현직 피아니스트 정석 선배가 그 증거다.
“흠.”
사실 굳이 교장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연습을 더 하고 첫 등록금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하면 했지.
그 때문에 내가 교장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찰나, 교장이 말을 덧붙였다.
“매년 내 추천을 받아 미향예고에 합격한 학생에게 내가 등록금의 반을 지원해주는 건 알고 있겠지?”
등록금의 반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오르는 기억에 손가락을 튕길 뻔했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이 클래식 중독자인 교장이 어떻게 해서든 미향예고 입학생을 만들려고 내놓은 지원금.
그게 있다면 우리 부모님이 느낄 부담은 확 줄어들 것이다.
290만 원과 145만 원.
그냥 글자를 읽어만 봐도 느낌이 확 다른데 심지어 2009년 당시의 삼백만 원에 달하는 돈은 그렇게 가벼운 액수가 아니었다.
“자신 있지?”
내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정석 선배가 내가 신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엄한 호랑이 선배가 이런 눈빛을 하니 매우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그 교장 선생님은 무섭게 생긴 외모에 반해 허당끼가 있다.
그리고 유치할 만큼 클래식 동아리를 편애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대머리독수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
사실 클래식 감상에 30년이란 기나긴 시간을 쏟은 만큼 듣는 귀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교장이 내 피아노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래 이 시기의 나는 몸 상태나 기분에 따라 연주가 확확 변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교장은 컨디션이 바닥을 기어 다니던 내 연주를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성현아. 정말 괜찮겠어?”
바로 옆까지 다가와 걱정을 내비쳐주는 정석 선배.
아마 교장이 내건 터무니 없는 조건 때문에 저렇게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나는 음악실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총 스무 명의 클래식 동아리원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심지어 연주해야 하는 곡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장이 들고 온 무작위 곡.
무서웠을 것이다.
일반 중학교에 다니고 무대 경험이 전무하며 혼자서 연주하기를 좋아하던 16살의 아이를,
뜬금없이 스무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곳에서 초견으로 연주를 시키다니.
심지어 무슨 오케스트라 입단 심사도 아니고, 그냥 중학생이 감당하기에는 조건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틀려도 침착하게, 알겠지?”
내 어깨를 토닥여주며 아직도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한 정석 선배.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진심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침 동아리원 한 명이 교장과 함께 음악실에 들어왔다.
[Chopin – Etude Op. 10 No. 1](쇼팽. 에튀드 1번.)
나는 동아리원이 든 악보를 엿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
“쇼팽 에튀드 1번이라니 일반 중학생에게는 너무 허들이 높습니다.”
정석은 성현에게 전해주는 클래식 동아리원을 보며 작게 말했다.
그 옆에 서서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교장.
“어차피 예고에 입학하게 된다면 일반 중학교니 예술 중학교니 하는 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처음부터 기를 확 죽이려고 하면 더 클 수 있는 싹도 말라버릴 겁니다.”
“김 선생님이 왜 그렇게 싸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이런 일로 그만둘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관두는 게 저 학생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정석은 답답했다.
애들을 이렇게 스파르타식으로 키우니 다들 연주에 그렇게나 자신감이 없는 것 아닌가.
자신감이 없으니 음은 옅어지기만 하고, 그러니 클래식 동아리원 모두가 정석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던 것인데.
이제 보니 그 원인은 바로 교장이었다.
만약 성현이 이번 연주로 기가 죽어 피아노를 놓으려 하면 어떻게 하지.
심지어 현재 음악실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갑자기 연습을 중단당해 잔뜩 화가 난 아이,
아예 엎드려서 자려는 아이,
심지어 옆자리 아이와 잡담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연주를 한다는 말인가.
하물며 성현은 무거운 분위기의 연주장에서 먼저 경험을 쌓아온 것도 아니다 보니 더 집중이 힘들 것이다.
거기에 쇼팽 에튀드 1번이라는 난이도 있는 곡을 초견으로.
“어차피 완벽한 연주를 할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틀리더라도 끝까지 연주하는 것. 그것만 해낸다면 저는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정석이 영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자 입을 여는 교장.
하지만 정석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취미로 피아노를 쳐왔을 아이에게 관객이 있는 장소에서 초견 연주를 요구하다니.
속이 너무 뻔히 보이지 않는가.
‘제발 이런 일로 기죽지 마라.’
정석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랜드 피아노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 순간 낮고 굵직한 음이 울려 퍼지며 사방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둥-
이윽고 왼손의 베이스를 받고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오른손의 아르페지오!
음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연주해야 하는 아르페지오를 성현은 당연하다는 듯 해내고 있었다.
성현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찬란한 음색은 말하고 있었다.
역시 천재에게 무대 경험이나 음악 지식 따위는 문제가 되지 못한다고.
기쁜 마음에 정석이 눈을 크게 뜨며 성현을 바라보자.
그는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현은 악보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건반만을 보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에튀드 1번까지 암보하고 있었다는 건가?!’
정석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성현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연주자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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