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36
36. 세레노 (Sereno, 쾌활하게) -2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의 정체는 바로,
“정답 노트라는 거야.”
“정답 노트?”
이예린이 흥미를 보이는 걸 확인한 나는 연습 의욕이 바닥난 그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답 노트가 뭔지는 알지?”
“으, 응.”
“그걸 반대로 적용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왜 틀렸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 해냈는가.’로 작성해나가는 노트.
연주에 집중했던 최지은과 달리, 내 눈에는 지은의 표정변화, 입술의 떨림 하나하나에 반응해 점점 더 작아지는 이예린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알 수 있었던 것이 있었는데, 이예린은 의욕만땅이었던 어제, 그것도 본격적으로 연습이 시작되던 순간에 가장 연습 효율이 높았다.
그리고 연습의 효율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최지은이 본격적으로 예린이의 연주에서 틀린 부분을 꼬집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물론 최지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던 것이고, 대부분의 피아노 연습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곤 했으니, 그녀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예린은 꽤나 자기 자신의 연주에 자신감이 없는 편인 학생이었다. 오죽하면 버스킹을 성공적으로 끝낸 직후 내게 가장 처음으로 했던 말이 ‘나 잘 쳤어?’였겠는가.
그러니 여기서는 학생의 특징에 맞춰 레슨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것이 바로 이 정답 노트였다.
“오답 노트의 반대?”
“응. 이 종이에 내가 듣기에 네 연주에서 좋았던 점을 다 적어놨어.”
“어, 음. 페달, 강도, 깊이, 속도?”
“좀 막연하게 적어놔서 잘 모르겠지? 내가 하나하나 짚어줄게, 다시 한번 연주해볼까?”
‘이 부분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연주하자는 말에서, ‘잘했던 지점을 짚어줄 테니’ 다시 해보자는 말로 뉘앙스만 바꿨을 뿐이었는데, 조금 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건반을 누르는 이예린.
“응. 좋네.”
예린이 연주를 하는 동안 나는 특별히 어디가 좋았다는 말을 하기보다는, 그녀의 연주가 만들어내는 선율이 듣기 좋은 음색을 자아낼 때마다 그 부분을 칭찬해주려 짧지만 확실한 호응을 해주었다.
“오.”
그러자 이예린의 악상은 유려한 선율을 뽐내면서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변화해갔다.
어느새 최지은도 이 변화를 감지했는지 감탄하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좋네. 방금 그 느낌으로.”
연주가 멈추지 않도록 간결하게 잘한 부분을 확실하게 칭찬해주자, 이예린은 언제 의기소침해져 있었냐는 듯이 확연히 밝아진 표정으로 연주를 이어나갔다.
마치 버스킹 때와 같이 말이다.
한 달 정도 예린이와 같은 3조로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전생의 나와 이예린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일반계 중학교에 다니며 취미로만 피아노를 치다가 덜컥 미향예고에 붙은 것도 그렇고, 5반의 아이들에게 막말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도 그랬다.
그러다 보니 이예린이 200만 너튜버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이전부터 나는 그녀를 돌봐주고 싶었고, 그녀가 자신의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도록 당장 필요한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게 되었다.
과거의 나와 너무나도 닮은 그녀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대리만족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이예린이 꼭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으니까.
“좋아. 잘했어. 감이 좀 잡혀?”
나는 2악장을 성공적으로 연주해낸 예린을 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응! 그,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은 알겠어.”
자신이 듣기에도 그리 나쁜 연주가 아니었는지 미소를 되찾은 이예린.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감이 사라지지 않게 바로 한 번 더 연주해보자. 할 수 있겠어?”
“응!”
낮아졌던 자신감이 돌아오니 이예린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단점을 고쳐 나가기보단 장점을 키워나가는, 예린을 위한 특별 레슨은 자정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빡빡하게 짜여진 연습 일정이었지만 이예린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따라와 주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 실기 고사 제출용 영상을 촬영해야 하는 목요일이 되었다.
이전에 연습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달리 팀원 당 한 개의 악절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연습했기에 빠듯한 연습기한이었지만, 연습에 연습을 거치니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갖출 수준은 되었다.
“간다.”
나는 홍진태에게서 빌려온 카메라를 들고 피아노 앞에 앉은 최지은을 촬영했다.
1악장의 셈여림은 Allegro Maestoso.
직역하면 ‘빠르고 웅장하게’라는 뜻이다.
2악장과 3악장을 통틀어도 1악장의 시작점만큼 웅장함을 잘 표현해야 하는 부분은 없다.
즉, 초장에 관객을 압도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다.
“휴우우.”
이를 잘 아는 최지은인 만큼 곧바로 연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느릿한 심호흡을 거듭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의 긴장하듯 떨리는 손가락이 천천히 건반에 닿는 순간.
뜬-!
악센트를 강하게 준 도입부의 웅장하고 두꺼운 음색이 1번 연습실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분명 커다란 관현악 부분을 잘라낸 시작점일 텐데도 최지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묵직한 무게감을 잘 표현해냈다.
“좋았어.”
이어지는 완성도 높은 연주에 나는 씩 웃으며 1악장의 성공을 확신했다.
정적이면서도 탄탄한 최지은의 연주법에 이예린의 주변의 반응을 반영하는 독특한 주법이 더해지니 연주가 전보다 다채롭게 변화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어지는 2악장.
그 짧은 연습 동안 우리 팀에서 실력이 가장 비약적으로 상승한 이예린이 쇼팽의 예민한 감수성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음표들 사이의 통통 튀는 음률을 잘 살릴 수 있도록 연주해냈다.
그 결과, 곡의 느낌은 그대로지만, 해당 곡이 삽입되었던 영화, 드라마를 더욱 풍부한 감성과 함께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도록 연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은 나.
연주의 난이도 자체는 높은 편인 3악장이었지만, 앞선 연주자들이 쌓아놓은 감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엇나감 없이 안정적으로 연주하면 되었기에 크게 무리 없이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었다.
“오오.”
“왜? 이번에도 다시 해?”
“성현아?”
내가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며 탄성을 내뱉자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이예린과 최지은.
하지만 두 사람의 염려와는 달리 나는 그제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괜찮은 거 같아.”
“진짜?!”
“와! 끝났다!”
이어진 총 4번의 촬영.
악장들 사이의 조율이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중간에 끊지 않고 무편집으로 촬영한 제출용 영상.
그리고 드디어 지금껏 촬영했던 것 중에서 가장 풍부한 소리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휴우우우. 진짜 고생 많았어.”
아무래도 영상을 통해 들리는 피아노 소리와 직접 내 귀로 듣는 소리는 차이가 있다 보니, 제출용 영상은 계속해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3번이나 재촬영을 해야 했다.
기껏 이예린의 연주법으로 특색을 잡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는데, 일반적인 협주곡 1번과 별반 차이가 없게 들리게 된 것이다.
위험을 좀 감수하더라도 그냥 편곡해버릴 걸 그랬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얼마나 어렵게 준비했는데, 그걸 홀라당 날려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촬영 기기의 위치를 바꿔보거나 피아노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면서 내 몸을 굴렸고, 드디어 내가 원하던 악센트와 곡 자체의 맛이 살아있는 소리를 녹음해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홍진태에게서 받은 고급 장비와 음이 선명하게 울리는 1번 연습실 피아노가 아니었다면 앞으로 두 번은 더 재촬영을 할 뻔했다.
“하아, 진이 다 빠지네.”
최지은이 드물게 약한 소리를 하며 의자에 축 늘어질 정도로, 이번 연주는 정말 힘들었다.
실전에서 연습 때보다 힘을 팍 주는 게 그녀의 스타일이었던 만큼, 예기치 못한 네 번 연속의 강행군에 직격탄을 맞은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실전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연습을 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이예린.
처음에는 둘 다 긴장으로 인해 실전에 약한 모습을 보였었는데, 지금은 앉은 자세부터 극명하게 다르다.
그만큼 실전파 이예린이 성장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어렵게 완성한 제출용 영상을 백업하고 USB에 옮겨 담은 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이거 제출하고 올게. 둘 다 고생 많았어. 이따가 치킨 먹을래?”
“난 치킨 말고 딴 거. 넌 치킨 말고 다른 건 안 먹니?”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최지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린아, 지은이는 치킨무만 먹는대.”
“아, 그렇구나. 알겠어!”
“뭐?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
지은이의 열 받는다는 듯한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1번 연습실을 나와버렸다. 이러고 나가면 나중에는 분명 최지은이 또 잔뜩 삐질 테지만, 그냥 못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치킨을 거절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교무실로 향했다.
이번 실기 고사를 심사하는 교사는 총 세 명,
원래 피아노 담당인 김기택 선생님과 처음으로 시행하는 실기 방식에 관심이 많으신 교감 선생님.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1반의 담임인 정혜선 선생님이 참가했다.
“선생님. 여기요.”
그중에서 나는 가장 친근한 김기택 선생님에게 다가가 USB를 건넸다.
“오. 생각보다 빨리 끝냈구나?”
“준비에 신경을 좀 많이 썼거든요.”
“그래. 저번 주에 기대하라고 말했던 이예린 학생의 아주 특별한 연주도 잘 담았고?”
아주 특별하다고까지는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기택 선생님이 싱글싱글 웃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장난이 치고 싶으신 것 같았다.
“네! 물론이죠.”
나는 그래서 장난을 받아 줄 겸 마주 웃으며 확신하는 태도로 말했다. 나의 단언에 기택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하핫! 재미있겠구나. 그나저나 무편집으로 찍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도 2등으로 제출하다니, 정말 고생했다.”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두드리는 선생님. 그러나 선생님의 말 속에서 언급된 ‘2등’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2등이요?”
당황스러워 내가 되묻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해주는 기택 선생님.
“아, 민호네 팀 있잖니. 거기는 아무래도 팀원이 두 명이다 보니까, 제일 먼저 영상을 제출하고 갔단다.”
“민호 팀이 두 명이라고요?”
이번 실기 고사의 한 팀은 보통 세 명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두 명이라니. 대체 왜?
“세 명씩 팀을 꾸리다 보면 한 자리가 비잖니. 그런데 민호가 자처해서 두 명인 조를 하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었지. 왜? 무슨 문제 있니?”
무, 무슨 문제가 있냐니···.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잠시 굳어있다 재차 질문했다.
“선생님, 혹시 두 명인 팀의 채점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한 학생이 두 번 연주하는 것 말고는 별 차이 없단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가 얼어붙은 이유이기도 했다.
팀원이 하나 부족한 조는 팀원 한 명이 두 번 연주해서 그걸로 점수를 받는다.
그래서 보통 더 뛰어난 연주자에게 두 번 연속으로 연주를 맡기게 되는데, 그 연주자가 김민호가 되면 단순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나와 최지은은 두 명의 김민호를 이겨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문득 학기 초에 김민호가 나와 최지은을 모두 이겨보고 싶다,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이런 뜻이었다니.’
실기 1등을 거의 확실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김민호가 두 명이라니···.
지금까지 평온하던 내 심장이 그제야 긴장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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