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39
39. 셈플리체 (Semplice, 단순하게) -2
서열.
회사나 군대는 물론이고 학교와 작은 학원까지, 어디에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어떻게든 상하를 구분하고 대접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얼핏 보면 실력 지상주의로 모든 것이 돌아갈 것만 같은 이 음악계 역시 선후배 간의 엄격한 서열이나 갑질 따위가 존재한다.
본래라면 하늘 같은 3학년이라는 말과 겸손해야 하는 1학년이라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그걸 예선에서 공동 1등을 달성한 우리에게 요구한다는 상황이 좀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말이다.
김하늘이라 불린 학생이 구겨진 인상 그대로 입을 벌리자 예상대로 상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진짜 미쳤냐? 내가 예전에 했던 말 벌써 까먹었냐?”
“아아,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천재 소리 듣는 애들 다 잠깐이더라 뭐 그런 말이었었죠. 그래서요?”
욕지거리를 들었음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반박하는 민호.
이미 5년간 1위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는 민호에게 그런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너도 최지은도 잠깐이야. 아직도 몰라?”
“네.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선배들이 좀 알려주시겠어요?”
어쭙잖게 서열 정리나 하려던 3학년들을 정면에서 반박해버리는 김민호.
경쟁자라고 여기는 동안에는 정말 무서운 상대였는데, 이렇게 같은 편인 상태로 그의 뒤에 서 있으니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야.”
그때였다.
지금껏 두 여학생이 왈가왈부 떠드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3학년의 남학생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다.
“재상이도 유학 가고 콩쿠르마다 우승하니까 아주 선배가 우습냐?”
언행부터가 매우 위협적인 남학생.
아마 저 학생도 A스튜디오 출신인 것 같았다.
“설치고 다니는 거 좀 내버려 두니까 선배가 네 친구 같다 보다 그치?”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M스튜디오의 자유로운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A스튜디오는 빡빡한 일정과 엄한 선후배 관계를 중시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저 3학년들 입장에서는 나와 최지은 그리고 김민호가 알아서 조심하지 않았으니 저런 상소리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나는 이미 전생에서부터 서열이니, 선후배니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김민호는 나이건 뭐건, 인성과 실력을 최우선시하므로 다짜고짜 시비조인 저 애들에게 굽히고 들어갈 리가 없었다.
뭐 최지은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저나 콩쿠르 본선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서열 정리 같은 거로 시간 낭비하고 싶진 않은데, 참 보면 볼수록 전생에 봤던 1학년 5반 친구들 같은 선배들이다.
“하아. 선배님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 둘을 중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2학년들은 분위기가 묘해지자 벌써 연습실로 사라져 버렸고, 금방이라도 주먹을 들 것 같은 남학생과 서서히 미소가 사라져가는 김민호를 보고 있으니 정말 무슨 사단이라도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희 1학년들하고 선배님들이 같이 붙어 있으면 어차피 계속 삐걱거릴 것 같은데···. 아예 승부라도 해서 한쪽이 여기서 나가는 거로 하시죠? 깔끔하게.”
물론 내 성격도 성격인지라 굽히고 들어갈 마음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아휴, 내 나이가 사실상 마흔이 다 돼가는데 2살 차이로 뻗대는 애들을 두고 볼 수 있겠나.
“저건 또 뭔데.”
“저거 그 새끼 아냐? 운만 더럽게 좋은 놈.”
그런데 내가 나서자 곧바로 신원확인부터 들어가는 두 여학생.
아마 나를 제외한 다섯은 모두 면식이 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 3학년들 사이에서는 운만 좋은 놈으로 통하는구나···. 좀 섭섭하네.
“승부라고?”
그런데 가장 좋은 반응을 보여줄 줄 알았던 김민호보다 먼저 내 말에 관심을 보이는 3학년 남학생. 가까이서 보니 김창식이라는 명찰이 보였다.
“네. 좋잖아요. 안 그래도 서로 못 볼 꼴 안 보고”
“네가 걔지? 이성현이라고 요새 헛소문 돌던 놈.”
“헛소문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이성현인 건 맞아요.”
“말투도 씨발 김민호랑 똑같아서는 지랄하는 것까지 판박이네.”
김창식은 금방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욕을 툭툭 내뱉었고 그가 가까이 오자 어째서인지 최지은이 내 옆에 나타나서 건달 같은 언행의 그를 쏘아보았다.
“야.”
하지만 그런 최지은도 무시하고 완전히 다가와서 나를 노려보는 김창식.
“승부 같은 개소리하지 말고, 쳐맞고 싶지 않으면 그냥 너희 발로 걸어 나가라. 알겠어?”
음,
솔직히 그는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워낙 낮은 편이라 확실히 위협적인 말이긴 했다. 그렇긴 했는데,
내 정신연령이 이 애들과 비교하면 너무 다른 탓인가 내게는 그런 행동, 말이 전부 같잖게만 여겨졌다.
정말 하는 짓 하나, 하나가 전생에 나를 씹고 욕하던 애들이랑 어찌나 비슷한지 없던 화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콩쿠르 준비하려고 모인 것 아닌가?
그냥 깔끔하게 잡음이 일어날 구석 없이 연습이나 좀 하면 안 되나?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나는 점잖은 말투를 고집하며 대화로 풀어나가려는 게 시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저놈이 피아노 승부를 받아들이도록 만들 방법이 뭐가 있을까.
딱 보니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친 망나니 스타일 같은데···.
아 그래.
“왜? 피아노로 승부보면 또 예선처럼 깨질까 봐 무서워?”
“뭐라고? 이 새끼가 돌았나!”
역시 이런 타입은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는 게 답이다. 그것도 정중한 분위기를 쫙 뺀 반말이 더 효과적이지.
“무서워서 그러는 거 아니면 얼른 대결이나 하자. 진 쪽이 여기 구 본관에서 아예 나가는 조건으로.”
“오냐 이 새끼야. 해봐. 기왕 이렇게 된 거,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봐야겠다.”
역시, 발끈하며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내 예상대로 움직여주는 김창식.
나는 그 단순한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
김창식은 승부를 받아주는 대신 그 방식은 자신이 정하겠다고 말하고는 3학년들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승부를 치르게 돼도 별로 상관이 없는 게, 관중을 불러 투표를 진행하건, 선생님들 모셔와 연주의 격을 판가름내던 이미 1학년 우리 셋은 콩쿠르 예선에서 검증을 받은 상황이다.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런 내기를 멋대로 진행해버린 것 때문에 최지은과 김민호에게 미움을 산 것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괜히 전생 5반 학생들이 떠올라버려서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행동해버렸다.
그 때문에 내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아! 와. 뭐야. 이런 반전 매력이 있었어?!”
“바, 반전 매력?”
“갑자기 반말할 때 깜짝 놀랐잖아. 진짜 시원하게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말 그대로 하던데!”
내심 긴장하고 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김민호는 아주 감탄했다는 듯 그리 말했다.
“내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괜찮아?”
“괜찮냐니 무슨 말이 그래. 나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너무 좋은데?”
하긴,
걸어오는 싸움은 절대 마다하지 않는 김민호에게 한두 번 저런 식으로 갑질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성격상 붙어도 진작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갑자기 옆에 온 거야?”
나는 김창식이 내게 뚜벅뚜벅 걸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내 옆에 지금까지 서 있는 최지은을 보며 물었다.
보통은 그렇게 덩치도 크고 사나워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면 물러나는 게 정상 아닌가.
“너 진짜 맞을까 봐.”
내 뜬금없는 물음에 내 눈을 피하며 대답하는 최지은.
“걱정해준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 인간이 워낙 소문이 나쁘니까.”
“그게 걱정해준 거잖아.”
“아 몰라 짜증 나. 말 걸지 마.”
최지은은 괜히 어색해하며 말을 돌리려다가 이내 화를 내며 무마했다.
참, 같이 지내며 친해질수록 더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나를 신경 써주는 아이였다.
그렇게 나와 최지은 그리고 김민호가 3학년 아이들의 방해로 아까 못했던 인사나 안부 같은 것을 물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멀리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야. 딱 한 번 말해줄 테니까. 귓구멍 열고 잘 들어.”
뭐 비장의 한 수라도 준비해온 사람처럼 거들먹거리는 그들이 고안해온 승부 방법은 바로 ‘얼마나 많은 악보를 외우고 있는가.’였다.
즉, 암보한 곡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한 규칙을 찾아온 것이다.
“아.”
“머리 좀 쓰셨네. 이건 선배들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지.”
규칙을 듣자마자 허를 찔린 사람처럼 굳어버린 최지은과 3학년들의 아이디어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김민호.
확실히 이 규칙은 연주의 완성도나 곡에 대한 분석력같이 다소 주관적일 수 있는 평가 기준을 허물고 외웠냐, 외우지 못했느냐만을 따지기 때문에 어찌 보면 이만큼 공평한 방식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 제대로 따지고 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최지은과 김민호는 매년 많은 콩쿠르에 출전해왔기 때문에 많은 곡을 암보하는 게 아니라 적은 곡을 완벽히 연주하는 쪽으로 지금껏 실력을 키우며 발전해왔다.
그리고 아마 실실 웃는 3학년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들은 A스튜디오에서든 같은 학년에서든 많은 악보를 알고 있는 것으로 이미 이런 승부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단순하게 놓고 보면 이 상황은 3학년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곡은 바로크, 고전, 낭만. 이 시대들에서 아무거나 상대 팀이 제시한다. 모르면 그대로 탈락. 연주는 번갈아 가면서 진행하는 거로 하고 먼저 세 사람이 탈락한 쪽이 패배. 어떠냐 헛소리 나올 부분 없이 깔끔하지?”
역시나 이런 상황과 비슷한 일을 이미 겪어본 듯 간결한 설명을 들려주는 유정은이라 불린 3학년 여학생.
바로크, 고전, 낭만이라니 사실상 곡 선택의 범위 제한이 없다시피 할 만큼 넓지 않은가.
역시 좁고 깊게 곡을 연마한 최지은과 김민호를 저격하는 승부 방식인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까 헛소문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한 걸 보면 내가 음악을 진지하게 배운지 이제 반년 되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모양인데···.
3학년들은 승부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나를 대상 외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근데 이를 어찌하나···.
나는 지난 20여 년간 안 쳐본 곡이 없다시피 한, 연습실 지박령이었는데.
나는 절로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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