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4
4. 아르페지오 (Arpeggio, 펼침 화음)
[Chopin – Etude Op. 10 No. 1](쇼팽. 에튀드 1번.)
나는 처음 그 악보를 엿본 순간 나는 느꼈다.
‘역시 교장은 내게 지원금을 줄 마음이 없구나.’
그야 교장의 기억에는 분명 형편없는 실력의 학생이었을 태고, 중학생 때의 나는 상당한 기분파였기에 성실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학생에게 사실상 교장의 사비나 다름없는 지원금을 주어야 한다니, 나라도 꺼림칙하긴 했을 것이다.
원래 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을 꺼내게 만드는 건 힘든 일 아닌가.
오케스트라에 입단하기까지 서른둘을 먹도록 달에 백만 원도 벌지 못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기에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제대로 하기로 다짐했다.
저 교장이 진심으로 나를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화끈하게.
그런 의미에서 ‘쇼팽 에튀드 1번’은 오히려 내게 득이 되는 곡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아예 다르게 움직여야 하는 난이도 있는 곡.
심지어 오른손은 10도 화음을 넘는 넓은 음역을 숨 가쁘게 넘나들어야 한다.
보통은 입시 곡이나 아르페지오를 훈련하기 위해 연주하는 곡으로 결코 쉬운 곡이 아니라는 것.
“스으으읍”
나는 악보대에 악보를 올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분명히 이 상황은 꽤 불합리한 상황일 텐데 이상하게도 손가락이 건반으로 향하자 곧장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나는 마른 잉크와 종이에 불과한 악보에게서 생생한 에튀드의 음색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건반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둥-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Arpeggio.
음계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음표들이 파도친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손이기에 더 정밀하게 나는 자신의 오른손만을 바라보며 건반을 눌렀다.
악보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이 내게 어떤 연주를 해야 할지 그 방향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선율에 손을 얹자 알아서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손.
덕분에 나는 어제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하면서 실수했던 그 지점.
이틀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손 크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누르는 힘도,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 나는 온몸으로 연주했다.
페달을 밟은 방향과 함께 몸을 기울여 무게를 주어 건반을 누른다.
곳곳에 놓인 스타카토에서 충분히 포인트를 주면서, 부드럽게 넘실대는 파도가 끊이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도입부와 같이 묵직한 음을 Forte(세게)로 치며 곡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들자.
음악실 모두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나를 쳐다보며 움직이질 않았다.
짝, 짝.
그러자 혼자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정석 선배가 손뼉을 쳤고, 클래식 동아리원들 모두와 교장이 내게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연주는 내 예상보다도 더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낸 것 같았다.
***
일주일이 흘렀다.
그 후 교장의 태도는 격변해 방과 후에도 밤 9시까지 나 혼자 연습을 할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다행히도 등록금과 연습실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덕분에 나는 피아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몸을 갑자기 연주자의 몸으로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 앉은 피딱지.
마디마디에 근육이 쌓이려는지 움직일 때마다 뻐근한 느낌이 났다.
또한, 이전 생의 근육이 잡힌 몸은 힘을 풀어도 정자세로 앉아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본적인 것까지 신경 쓰며 바로 잡아야 했다.
그렇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모두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나의 7일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없었다.
똑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정석 선배가 문 앞에 서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출출하지? 뭐 좀 먹고 하자.”
그는 선물이라는 듯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내밀었고 그곳에는 양념치킨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정석 선배가 앉을 만한 의자와 치킨님을 놓을 만한 테이블을 준비했다.
“요즘 매일 9시까지 연습한다면서 힘들진 않아?”
“음, 솔직히 힘든 것보다 아예 학교도 빠지고 연습만 하고 싶어요.”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치킨 다리를 뜯으며 말했다.
벌써 10월 중순이다.
곧 예고 입시 원서를 작성해야 할 시기이며 가장 중요한 실기 고사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연주자로서의 몸이 다 준비되지도 않았으며 예고 입시를 반대하실 아버지께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솔직히 입시보다도 아버지 문제가 더 마음에 걸렸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2030년까지 척을 진 적이 있다 보니 더 마음이 심란했다.
“오호. 왜? 막히는 곡이라도 있어?”
근데 정석 선배에게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렸나 보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음, 이번 미향예고 입시 과제 곡은 드뷔시, 쇼팽, 리스트잖아요. 근데 아무리 들어봐도 감이 안 잡혀서요.”
괜히 선배 앞에서 가정사를 꺼내고픈 마음은 애초에 없었으니, 입시 상담이나 받을 심산으로 그리 답했다.
“감? 감이라, 쇼팽 에튀드는 잘 치지 않았니?”
“그건 우연히 아는 곡을 받았던 거라, 진짜 운이었어요.”
“그래, 쇼팽 에튀드 1번을 알고 있었단 말이지.”
그러자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정석 선배.
“성현아. 너 지금까지 독학으로 피아노를 연주한 거지?”
“좋아하니까요.”
“쇼팽 에튀드 1번이 보통 입시 곡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내가 확신하듯 말하자 정석 선배는 눈가에 주름이 잡히며 큰 미소를 지었다.
이건 좋은 신호다.
호랑이라고 불리던 정석 선배는 예전에도 가끔 이렇게 신기한 미소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그가 이런 대화를 예상하고 뭔가 선물을 준비해 왔을 때뿐이었다.
“크흠.”
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한 건지. 아예 목을 가다듬는 정석 선배.
“성현아. 혼자서 자기 연주에 문제가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능력이야. 네가 말하는 감이라는 게 어떤 건지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만, 아마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다 보면 어느 정도 잡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성현이는 어떻게 생각하니?”
음, 그러니까 정석 선배가 좋은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건가?
나는 그의 말에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정석 선배만큼의 실력자는 드무니까.
“그럼 교장 선생님에게는 내가 잘 말해둘 테니 내일은 학교가 아니라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리렴.”
“예? 왜요?”
“내가 소속된 M스튜디오에 성현이처럼 미향예고를 준비하는 애들이 몇 명 있거든.”
“에, 엠 스튜디오요?”
그런데 정석 선배의 선물은 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말았다.
“오오. 혹시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고 있니?”
내 격한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는 정석 선배.
알고 있냐니, 그게 말인가 싶다.
오히려 내가 M스튜디오를 모르는 게 더 말이 안 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내 귀를 뜨게 만들어주었던 천재 피아니스트 김민호, 그가 소속되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정석은 이른 아침부터 차를 몰아 성현의 집으로 향했다.
명목상으로는 현장체험 학습이지만 사실상 성현이는 오늘 자신과 함께 입시 고사를 치를 라이벌들을 만나러 가는 셈이었다.
그것도 재능있는 학생만 받아주는 M스튜디오 소속의 라이벌들을.
정석은 어제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알고 있었죠.’
에튀드 1번에 관해 묻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성현.
교장 앞에서 연주했던 일로 혹시나 하기는 했는데 역시 성현은 혼자서 이미 예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 분명해졌다.
좋아하는 음악가는 드뷔시.
미리 연습하고 있던 곡은 쇼팽.
아무리 봐도 올해의 과제 곡들을 파악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정석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나 연주자로서 준비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던 걸까.
그 의문은 성현이 교장 앞에서의 연주를 완벽하게 끝내고 나서부터 지금껏 정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장 흔한 경우는 가정의 반대.
상당히 보수적인 부모님들이 계신 집안이라면 음악을 공부하는 걸 일부러 막았을 수도 있다.
그로 인해 늦은 시각이나 되어서야 혼자 음악실에 숨어들어 피아노를 연습한다.
“음.”
동아리에 명단을 올리는 것쯤이야 그냥 친구를 따라왔다고 핑계 대면 그만일 것이고.
처음 만났던 날을 회상해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물지만 큰 병을 앓아 병원 신세를 지느라 몸이 망가지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그 노련한 솜씨에 어울리지 않는 기본기.
어쩌면 정말 드문 일이지만 솔직히 이쪽의 경우가 그 천재적인 재능의 아이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어볼 수도 없고, 흐음.”
그렇게 고민을 하는 사이 정석의 차는 성현의 집 앞에 도착했다.
군청색 코트를 입고 기다리고 있는 성현.
“잘 잤니?”
정석은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들을 애써 지우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런데 성현은 방과 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렇게 힘이 들어갔어. 혹시 긴장했니?”
“예? 긴장한 건 아니고요. 그냥 기뻐서요.”
“기쁘다고?”
“네. 저 정식으로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들을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중학생들을?
표현이 좀 이상했지만, 또래 아이들과 동떨어져 홀로 입시를 준비했던 성현이에게는 확실히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그래? 다행이네.”
정석은 성현이 좋아하는 얼굴을 보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입시까지 하루하루가 급한 지금,
단순한 효율성만 따진다면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고 기계처럼 곡을 연습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성현이에게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뭔가가 있다.
이 아이는 천재다.
그런 성현이를 자신의 연주라는 틀로 가둬도 되는 걸까.
차라리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다양한 아이들을 보고, 그 아이들의 연주를 듣는 것이 천재에게는 더 영양가 있는 경험이 아닐까.
다행히도 정석이 고심 끝에 내놓은 결론은 성현이에게 엄청난 호응을 끌어냈다.
그리고 성현이는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만 M스튜디오에는 성현이 만큼의 재능으로 무장한 천재가 둘이나 있다.
언제나 당차고 용감하게 피아노를 치며 벌써 수많은 주니어 콩쿠르의 1등 자리를 휩쓴 아이와,
그리고 그의 그늘에 가려져 잘 조명을 받진 못하지만, 매번 2등 자리를 놓치지 않는 아이.
그 사이에 성현이라는 세 번째 천재를 끼워놓는다면 과연 이 세 천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석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조수석에 앉아 차분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는 성현이를 보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
정석은 두 천재의 등장에 성현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하며 홀로 더 크게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되는 심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생각했다.
‘김민호, 분명 김민호가 거기 있을 거다.’
벌써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과거로 돌아온 순간부터 지금껏,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정석의 차는 부드럽게 강남구의 어떤 거대한 건물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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