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40
40. 셈플리체 (Semplice, 단순하게) -3
김창식은 알고 있었다.
콩쿠르 방식이든, 투표방식이든 교내외를 아우르며 인지도와 실력을 검증받은 그 애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자율적으로, 연주자 본인의 선택으로 곡을 연습하는 M스튜디오와 달리 A스튜디오는 정해진 규정, 규칙에 맞춰 단계를 밟아나가는 식으로 곡을 배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수박 겉핥기일지라도 외우는 악보의 수는 아주 많으며 완성도에 욕심만 내지 않는다면, 남들하고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곡을 알고 있을 수 있다.
김창식은 바로 이 단순한 점에 주목했다.
감정, 기교, 선율의 깊이, 음색의 다채로움처럼 한 곡에서 종합적인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고 단순히 안다, 모른다를 기준으로 탁 나타나면 평소 천재라 불리며 으스대던 놈들은 하나같이 당황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봐라. 최지은의 표정이 격변하지 않았나.
김창식은 이런 식으로 A스튜디오에 소속된 재능있는 후발주자 놈들의 연습을 막았고 A스튜디오 1군에 들어 여러 가지 혜택을 독식해왔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본선 진출자들끼리 합숙 비슷한 것을 한다는 소식을 담임에게 먼저 전해 듣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다.
김창식에게 이 상황은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그 연놈들을 제대로 갈궈볼 기회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교장이 주는 혜택도 막아서, 매일 오후마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M스튜디오를 오가도록 만들면 결국 연습량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잘만하면 그렇게 공동 1등 연놈들의 방해함으로써 콩쿠르 본선에서 자신의 순위를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것 봐. 내가 그놈들 받아들인다고 했지?”
“이걸 몇 마디 했다고 진짜 하네.”
“심지어 대결하자고 지들이 먼저 말하던대?”
“빙신들. 내가 그랬잖아. 오만한 새끼들 어떻게 나올지 뻔하다고.”
창식은 자신이 이렇게 모든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즐겼다.
자신만만하던 얼굴이 구겨지고, 자신에게 패배한 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놈들을 앞에서 대놓고 헐뜯는 그 상황.
창식은 드디어 평소 너무 건방지다 여기고 있던 김민호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한 연습실에 모인 그들은 최지은이 가장 먼저 피아노 의자에 앉는 것으로 대결이 시작되었다.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3번.”
창식이 곡의 이름을 읊자 최지은은 한숨을 픽 내쉬며 피아노를 친다.
왼손에는 단순한 리듬이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러시아풍의 음색을 뽐내야 하는 곡이다.
그런데 최지은은 어색하고 느리지만 악흥의 순간을 잘 쳐냈고 차례는 3학년의 김하늘에게 돌아왔다.
“으음, 리스트 풍경이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중에서 상대적으로 유명세가 덜한 곡을 부르는 김민호.
하지만 A스튜디오의 경우 쇼팽의 에튀드나 리스트의 초절기교처럼 다양한 곡에 쓰일 기술을 가르치는 연습곡들은 꼭 배우는 편이다.
물론 연주의 질을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연주들이긴 했지만.
“너무 느린 거 아닌가요.”
바로 이렇게 따지고 드는 김민호였으나. 이런 지적 따위 이미 다 예측하였던 김창식이다.
“우리가 언제 연주 수준 본다고 했어? 그냥 악보 암기만 본다고 했잖아. 문제없어.”
“하. 네.”
김민호는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지들이 어쩌겠는가. 룰을 정한 건 이쪽인데.
그렇게 김하늘이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음표 하나하나를 표하자 다시 최지은의 차례가 되었다.
“구스타프 말러 피아노 4중주 A단조.”
“응?”
역시 암보하지 못한 곡인지 눈썹을 찌푸리는 최지은.
이 곡은 애초에 1악장만 완성된 미완성 곡이라 누가 시키지 않는 한 자기 손으로 연습하지는 않는 곡이다.
“뭐해. 얼른 하라니까.”
“하아.”
최지은은 한숨을 픽 내쉬더니 건반은 건들지도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몰라요.”
“그래. 모르시겠지. 푸하하하!”
예상이 적중한 김창식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고작 2곡 만에 탈락한 최지은.
이어서 김민호가 배턴을 이어받아 연주했으나 애초에 개떡같이 연주해도 음표만 맞으면 상관없다는 이 규칙에서 그들 같은 훈련을 해온 애들이 이길 리가 없지 않나.
“아니, 그게 무슨 연주가 무슨···. 하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의 김민호. 딱 봐도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김창식이 보기에 김민호는 나름 선방했다. 7곡이나 쳐냈으며 김하늘이 모르는 악보를 제시해 그녀를 탈락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3학년은 아직 둘이나 남았고 1학년에는 딱 한 명이 남았다.
이성현.
대체 굴러다니던 말 뼈다귀인지도 모를 놈이 자신에게 대들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어처구니없는 도발까지 날려대는데 창식은 진심으로 열 받아 주먹을 날릴 뻔했다.
최지은도, 김민호도 아니고 웬 이상한 놈이 공동 1등을 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진짜 반짝하고 사라질 것 같은 놈이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자신을 무시하다니.
김창식은 혼자 남아 피아노 앞에 앉는 그 녀석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레슨을 받은 지 이제 반년 조금 되었다는 놈이 악보를 뭘 알겠나.
제대로 연습해본 곡이 열 곡은 있겠어?
창식은 같잖다는 듯 성현을 바라보며 한 번에 끝내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비발디 조화의 영감.”
보통 비발디하면 떠올리는 곡이 ‘사계’. 때문에 그 외의 곡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창식은 김민호가 한 곡만 더 완곡을 쳐내면 이 곡으로 끝을 내려고 했었다.
조화의 영감이라는 곡명에 멈칫하는 이성현. 김창식은 고개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모르지? 이 곡은 말이야···.”
딩-
그러나, 창식의 말을 무시하고 시작되는 성현의 연주는 지금까지 들려왔던 꽉꽉 막힌 연주와는 전혀 달랐다.
시원하게 치솟는 음계와 들려오는 선율.
창식은 자신이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의 영감’을 쳐낸 성현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운이겠지······.”
운 좋게 어디서 들어봤다거나 그런 거겠지!
창식은 서둘러 놀란 심신을 진정시키고는 3학년의 유정은을 피아노로 보냈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둘하고 사이도 좋아 보이던데, 애초부터 승부를 제안한 것이 이성현이었으니 그걸로 1학년들끼리 서로 헐뜯게 만들 수 있진 않을까?’
이내 침착해진 그는 막상 연주에 집중하지도 않고 다시 어떻게 성현을 괴롭히면 좋을지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 창식아.”
어째서인지 피아노 쪽에서 돌아와 자신을 부르는 유정은.
“뭐야.”
“못 들었어? 방금···.”
의기양양한 표정의 이성현. 그리고 의기소침한 유정은 그 상황이 말해주는 건 딱 하나였다.
“너 탈락이야?”
확 짜증이 올라온 창식이 묻자 유정은은 그의 눈을 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탈락인 듯 했다.
“와 이거 골때리는 새끼네.”
“연주에 집중도 안하더니 말도 참 이쁘게 하시네.”
당당하게 창식을 올려다보는 성현.
“이 새끼가 선배가 말하는데”
“선배다워야 선배라는 말 못 들어봤어?”
한 마디를 안 지는 성현. 창식은 화는 났지만 애써 말없이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애초에 자신이 이기면 그만이다.
이겨서, 말 잘 듣게 만들어서 나중에 보는 눈 없는 곳으로 불러내서 아주 먼지 나도록 패야지.
창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승부에 임했는데···.
그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도 못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리스트 라 캄파넬라.”
“리스트 파가니니 카프리스 9번.”
“고도프스키 파사칼리아”
계속해서 알아도 치기 힘든 어려운 곡만 제시하는 이성현.
게다가 그는 창식이 지금껏 A스튜디오 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다양한 곡들을 다 쳐냈다.
그것도 아주 우습다는 듯이 쉽게.
“미친 새끼···.”
처음에는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내뱉었던 욕이 이제는 거의 감탄사에 가깝게 변했다.
“음, 다음은 뭘 할까요. 발라키레프? 아니면 쇼팽으로 한 곡 더 하실래요?”
심지어 성현은 이미 이 시설에서 나가라는 조건이 걸린 승부에 임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러 김창식이 알만한 하면서도 연주가 격렬한 곡만 제시하는 이성현. 마치 창식의 손가락이 너무 격한 연주에 고통을 느끼게끔 유도하는 모습이었다.
“미친! 너 피아노 배운지 반년밖에 안 됐다고 속였어?!”
“내가 속였나요. 선배가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헛소문이라고.”
허,
창식은 허파에 구멍이라도 뚫린 사람처럼 말을 잃었다.
성현은 유정은과 김창식을 모두 꺾으면서 총 스무 곡을 쳤지만,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손이 아파서 더는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된 창식의 기권패.
“아 그리고 혹시, 나중에 딴소리할까 봐 먼저 말씀드리는데요.”
성현이 그의 핸드폰에서 재생 버튼을 누르자 어떤 음성이 흘러나왔다.
-승부 같은 개소리하지 말고, 처맞고 싶지 않으면 그냥 너희 발로 걸어 나가라. 알겠어?
“그쪽에서 먼저 위협하셨던 부분부터 다 녹음되어 있으니까. 이상한 짓 생각하지 말고 나가세요.”
나중에 교직원에게 사건을 다르게 말해서라도 끝까지 성현을 방해하려고 했던 김창식은 그의 준비성에 입을 다물질 못했다.
그렇게 군말 없이 구 본관이자 콩쿠르 연습장을 나가는 세 학생.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성현은 금세 뒤를 돌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지은과 김민호에게 말했다.
“자. 그럼 잘 놀았으니까. 이제 연습 시작할까?”
지치지도 않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
“성현, 너무해요오. 실기고사만 끝나면요. 그러면 같이 저녁 먹자고 했어요. 맞죠?”
“아, 미, 미안···.”
3학년들이 구 본관을 나간 지 3일이 지났다.
나는 엘리나와 현재 식당에 앉아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는 중이었다.
“실기고사 끝났어요! 근데 성현 나한테 말도 안 걸었어요! 너무해요!”
아무래도 내가 다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그냥 말했던 걸 많이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항상 웃는 그녀가 이렇게 입술 쭉 내밀고 아이처럼 삐쳐있으니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았지만, 오늘도 금방 구 본관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꾹 참았다.
금발의 포니테일을 휙휙 흔들며 불만을 표하는 엘리나.
“다음에 꼭 같이 먹자.”
“다음에 싫어요. 날짜 정하는 게 좋아요.”
이번에도 내가 적당히 둘러대고 넘기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엘리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확실하게 말했다.
“으음. 그럼 이번 주 일요일 어때?”
“이번 주! 정말요? 연습에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나는 그녀에게 도움만 받은 처지에 더 엘리나를 심통 나게 만들 수는 없으니 확실한 날짜를 말했고, 삐쳐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표정이 확 밝아지며 미소를 지었다.
“응. 당연하지. 아직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는데. 그리고 연습에 방해도 아니야. 나도 사람인데 좀 쉬면서 해야지.”
“나 너무 좋아요. 헤헤헤.”
다시 애처럼 밝아진 엘리나. 나는 그녀가 다시 미소짓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며 식판에 받아온 점심을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성현. 피아노는 실기 고사 점수 나왔어요?”
“그거 SNS에 2주나 공개해둘 거라고 하던데?”
“아니, 아니 그거 말고요. 선생님들 평가요. 바이올린은 먼저 그것부터 나왔어요.”
“오오. 잘 나왔어?”
내가 흥미를 보이며 묻자 씰룩거리는 엘리나의 입술.
딱 봐도 만족스러운 점수가 나온 듯 했다.
“80점 만점에서 72점이에요!”
“와. 진짜 잘 나왔네?”
그리고 엘리나가 공개한 점수는 내가 봐도 최상급으로 보일 만큼 높은 평가 점수였다.
이 실기는 애초에 만점을 받을 수가 없으므로 사실상 75점이 만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한데.
엘리나는 딱 감점을 3점 받고 통과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점수가 아닐 수 없다.
“축하해.”
“히히.”
내 축하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는 구 본관으로 향하기 전에 피아노 역시 교원 평가가 먼저 공지되어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숙사에 들렀다.
천천히 컴퓨터를 켜고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간 나는 1차 평가라는 항목을 클릭하자마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헐.”
교원 평가 점수가 너무 예상외였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