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42
42. 콘 아르도레 (Con ardore, 열정적으로) -2
“처음 내가 성현이를 중학교 음악실에서 만났을 때, 네 연주는 정말 얇고 부드러운 실처럼 연약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을 가지고 있었단다.”
과거로 돌아온 직후, 나는 홀린 듯이 음악실을 찾아가 언젠가 내가 독주회를 열게 된다면 꼭 첫 곡으로 연주하고 싶었던 달빛을 쳤었다.
“그때의 연주는 황홀하다고 해야 하나, 고독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꺼질 듯 말 듯 한 촛불 하나를 보는 것 같았었지.”
정석 선배의 말마따나 당시의 내가 달빛에 담아낸 감정은 호소였다.
내가 이곳에 살아 있다는 걸 누군가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연주했던 피아노.
“그런데 미향예고에 들어와서 성현이 너의 연주는 조금 변했었단다. 스스로도 잘 알지?”
내게 질문을 건네며 슬쩍 미소를 짓는 정석 선배.
그래. 잘 안다. 알 수밖에 없지 연약한 연주법을 변화시키고자 너무 강하게 건반을 누르던 시기가 분명 있었으니까.
“그때는 타건이 무겁고 힘차서 곡의 이미지는 확확 와닿았지만 처음 널 만났을 때 들었던 그 황홀함은 조금 줄어들었었지. 그게 당시에는 좀 아쉽기도 했지만, 네가 여러 가지 도전을 해보는 것 같아서 나는 정말 좋았단다.”
즉, 반주자로서의 연하지만 다채롭게 변화하는 연주법과 솔리스트답게 자신을 바꾸기 위해 힘을 주어 연주했던 연주법.
“힘든 일이었을 텐데 과감하게, 정말 잘했구나.”
정석 선배는 그 두 연주법을 모두 체화해낸 내가 대견하다는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 피아니스트들도 여러 개의 연주법을 가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배웠건, 스스로 터득했건 자신만의 연주법을 하나 완벽하게 익히고 곡에 따라 조금씩 그 숙련된 연주법에 변화를 주며 연주하는 것이 보통의 피아니스트이다.
하지만 나는 두 개의 미완성된 연주법을 가졌다.
나 스스로는 하루빨리 솔리스트적인 연주와 반주자적인 연주의 적절한 중간지점을 찾아내, 두 연주법의 장점만을 쏙 뽑아내 그것을 완성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정석 선배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해주었다.
“보통 건반 악기인 피아노는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곡을 쳐낼 수 있기에 정말 좋은 악기라는 말을 듣지.”
하지만,
정석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사실은 아니란다. 어떤 피아니스트는 저음부에 강점을 둔 곡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어떤 피아니스트는 아찔한 기교가 뒤엉킨 곡을 칠 때 정말 자기 실력의 백퍼센트를 드러낼 수 있지.”
게임에 비교하자면 누군가는 방패를 든 캐릭터들 더 잘하고, 또 누군가는 원거리 딜러를 잡았을 때 훨씬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 피아노 역시 자신 경험, 연습해본 곡, 완성한 연주법의 성향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연주자마다 각각의 강점과 단점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성현이 너는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연주법을 소화해낼 수 있지. 심지어 두 가지의 연주법 모두 상당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선생님의 말씀은 다시 말하면, 그 두 개의 연주법을 한 연주회에서 보여주자 그런 말씀이신 건가요?”
“그렇지! 아 그리고 이제 선생님 아니라니까.”
반주자로서의 나와 솔리스트로서의 나.
이 성향이 전혀 다른 두 가지를 한 무대에서 다 보여주자니.
내게는 미완성된 연주법 두 개에 불과한 것들이었는데, 머리가 비상한 정석 선배의 눈에는 그마저 나만의 특기로 비친 것 같았다.
“일종의 스킬 같은 거지. 그것도 세계에 둘이나 될까 말까 한 피아니스트들만의 희귀한 유니크 스킬.”
“유니크 스킬이요···.”
“그래. 상상만 해도 설레지 않니? 그 어떤 곡을 부탁받아도 알맞은 연주법으로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는 피아니스트라니.”
“그, 그러네요.”
정석 선배는 나보다 더 흥분한 사람처럼 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내 미완성 연주들을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정석 선배 덕분에 막막하던 장벽이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감미롭고 다채로운 연주.
통통 튀며 임팩트가 강한 연주.
두 연주법에 알맞은 곡이 대체 뭐가 있을까.
“그렇지. 그 표정이야.”
한창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뭔가를 중얼거리는 정석 선배. 하지만 나는 턱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머리를 회전시키기 바빴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연주법.
상반된 분위기의 곡.
반전이 일어났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시킬 수 있는 연주를 위해선···.
그래.
그 곡이 좋겠다.
정말, 자신을 지금껏 바라봐준 정석이 아니라면 누구도 해줄 수 없는 피 같은 조언들이었다.
“선배, 정말 감사해요.”
고민으로 구겨져 있던 나의 얼굴은 어느 새부턴가 미소로 채워져 있었다.
***
꽉 막혀있던 성현에게 멋지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준 정석은 바로 다음 날, 오케스트라 연습을 위해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협주홀을 찾았다.
정석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는 마에스트로의 지시에 따라 완벽하게 반주와 주선율을 오가는 연주.
단원들의 불평불만을 정면에서 막아버릴 만큼 정말 뛰어난 연주 실력이었다.
“좋아. 정석씨. 오늘도 아주 좋았어요.”
그리고 정석을 편애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 공세를 아끼지 않는 마에스트로 덕분에 그는 기분 좋게 세 시간 논스톱 연습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쉬는 시간을 가지며 하나, 둘 숨을 돌리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그 사이에서 정석은 유독 마에스트로와 길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외부인이 눈에 밟혔다.
나이는 이제 막 서른을 넘겼을까 싶은 미모의 여성분. 바이올린 가방이 옆에 있는 걸 보니 연주자인 것 같은데···.
그런데 단원 면접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기에는 마에스트로의 태도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정석씨. 누굴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그렇게 정석이 한쪽을 멍하니 보고 있자, 성현이로 인한 인연으로 예전보다 많이 친해진 홍진태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진태씨. 지금 지휘자님하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 아시나요?”
“아아, 저분 그 일본에서 유명하신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씨잖아요. 그 왜요. 16살부터 프로로 데뷔한 천재 중의 천재요.”
“저분이 그분이셨군요.”
“나이는 우리보다 조금 많은 정도인데 경력은 대선배니까요. 진짜 대단한 분이죠.”
언제나 가벼운 태도를 고수하는 그 홍진태가 드물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끼리이기에 그녀를 존경하는 듯했다.
“그런데 저분이 서울시향 오케스트라는 무슨 일로 오신 걸까요?”
“어? 정석씨 아직 못 들었어요? 아 바이올리니스트끼리만 아는 거였구나.”
“뭐가요?”
“저분이 이번에 성현이랑 민호, 지은이가 출전하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자원하셨잖아요.”
“심사위원으로 자원하셨다고요? 저분이?”
“그래요. 심지어 성현이한테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아직 못 들으셨었구나.”
정석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당황하는 홍진태.
정석은 그런 그를 보며 뭐라 하면 좋을지 몰라 한창 당황하고 있는데 멀찍이서 굵은 목소리의 마에스트로가 그를 불렀다.
“정석씨. 이리 좀 와보세요.”
이에 정석이 빠른 걸음으로 마에스트로에게 향하자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씨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드리세요.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정석입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악수로 하면 돼요.”
정석은 고개를 푹 숙이며 업계에서 대선배로 통하는 그녀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그런 정석의 모습에 눈웃음을 보이면서도 손사래를 쳤다.
“당신이 그 이성현 군을 데리고 오셨다는 김정석씨 맞으시죠?”
“성현이는 어떻게···?”
“제 한국에 사는 제 친구가 금발의 예쁜 아이와 협주하는 영상을 보내줬어요. 그때 보고 나서 바로 일정을 비우고 이렇게 날아왔죠.”
한국말을 상당히 잘하는 유키에씨.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신의 일정까지 바꿔가며 아마추어의 등용문이라 불리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자원하다.
정석은 인사에 이어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누면서도 유키에씨 정도의 인물이 어째서? 라는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키에씨는 처음에는 M스튜디오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가 점점 학생관리나 인재 양성에 대한 것들로 화제를 발전시켜나갔고,
“성현군 말이에요···.”
이내 노골적으로 성현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떼기까지 했다.
“혹시 일본 유학에 흥미가 있을까요?”
초면인 정석의 눈에도 대놓고 성현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표하는 유키에씨.
“그건 어떤 의미로 물어보시는 거죠?”
“제가 나이는 어린 편이라도 교수 경력은 좀 있어서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그 아이는 재능이 있어요. 솔리스트가 아니라 반주자로요!”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당장 뛰어난 현악기 연주자들에게 붙여주면 금방 세계급 반주자로서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아이다.
성현이는 반주자로 키워야 한다.
자신은 그렇게 키워낼 수 있다.
아주 확신하며 말하는 모습에, 정석은 솔직히 좀 화가 났지만 점잖은 태도를 잃지 않고 답했다.
“그건 제가 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미안해요. 내가 또 흥분했네요.”
정석의 단호한 목소리를 듣자 뭔가 아차 싶은 표정이 되는 유키에씨는 곧바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마 평소에도 이렇게 금방 흥분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성현이에게 직접 말씀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무리 정식 스승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석의 앞에서 ‘자신은 성현을 잘 키워낼 수 있다’고 하는 건 좀 예의에서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례를 범한 유키에에게 오히려 좋은 제안을 해주는 정석.
“고마워요.”
유키에는 미안하고 고마운, 복합적인 마음을 담아 고개를 푹 숙여 가며 정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반면 정석은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정말 복잡한 심경이었다.
지금껏 자신이 정성스레 돌봐준 아이를 초면인 사람이 홀라당 데려가려 하는데, 안 그런 사람이 있겠는가.
만약에라도 성현이가 유키에의 제안에 기뻐하며 일본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걱정을 하나, 둘 떠올리던 정석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그다음 날, 유키에를 데리고 미향예고를 방문한 정석은 정말 사이다 1.5L를 단숨에 들이킨 것처럼 시원한 청량감에 휩싸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고 싶어요.”
다름 아닌 성현이가 대놓고 유키에씨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 좋은 제안을 거절했는지 정석이 알 도리는 없었지만, 우선은 성현이 멀리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로 정석은 안심했다.
그는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그나저나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인 유키에씨의 유학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솔직히 정석도 궁금했기 때문에 성현에게 점잖게 질문을 해보았는데···.
그 아이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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