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48
48. 콩쿠르 (Concours, 경연) -4
김민호의 몰아치는 듯한 연주를 끝으로 콩쿠르 본선을 마치고 나온 나는, 부모님의 자가용을 타고 집에서 소소한 뒤풀이를 즐겼다.
어둑한 시각,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니 고요하게 내려앉은 세상의 소리.
뭔가 드디어 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2주간 쉼 없이 아니, 지난 반년간 빈틈없이 짜여 있던 내 첫 번째 계획이 끝난 것이다.
한숨 돌렸다는 감상과 함께 뭔가 비어있는 듯한 공허함이 내 가슴에 돋아났다.
“후우.”
드르륵,
한숨을 내쉬며 창문을 열고 이젠 여름밤의 따스한 바람을 눈을 감고 느꼈다.
김민호, 정말 대단했지.
진짜로 아트홀 내부에 달빛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김민호의 연주는 뛰어났다.
그만큼 진지한 민호도 처음이었고, 이 나이에 벌써 묵직한 감정을 연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는 게 더 대단했다.
김동혁 이사장이 있었기 때문일까.
평소와는 비교도 못 할 만큼 힘이 들어가 있던 김민호의 연주.
그럼에도 전혀 엇나가거나 과하지 않고, 딱 베토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성공적인 선율을 자아낸 김민호.
대단하다.
정말 대단했다.
팬으로서 뿐만이 아니더라도 같은 연주자로서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20년,
실제 나이와는 전혀 다른 몸이었기에 이만큼 연주할 수 있었던 나와 달리, 그는 정말 고등학교 1학년이다.
경험도 없고, 배움도 그리 깊지 않은 상태인데···.
김민호는 벌써 ‘칸타빌레’의 경지를 향한 도약의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생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가파르게 성장하는 김민호를 보고 있자니 과연, 내가 그의 성장에 촉매가 되어준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일, 전생의 내게 있어 저 하늘의 별이나 다름 없던 김민호의 성장에 내가 영향을 끼친 것이 맞는다면,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한 사람의 팬이자 같은 연주자로서 이토록 뿌듯한 순간은 없으리라.
이제 내일이면 이번 콩쿠르의 결과가 발표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시 정석 선배가 나 자신을 보여주는 연주를 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김민호의 폭발적인 연주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지 못 할 뻔했다.
이번 연주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고, 민호 역시 후회 없을 연주를 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지.”
피식,
이제는 과거 하늘의 별로 여기던 존재와 경합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
간만에 늦잠을 잔 나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거실로 나와 냉수를 마셨다.
그러다 기다란 식탁 위에 놓인 편지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받는 사람이라는 항목에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어서 괜히 신경 쓰였다.
게다가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유키에 모리.
이전의 대차게 거절했던 거로 혹시 따지고 들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가 내 연주를 들은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이거 뭐에요?”
“어제 그 뭐지? 연주회 도중에 쉬는 시간 있었잖니. 그때 웬 예쁘장한 여성분이 엄마한테 주더라. 아들이 아는 분 아니었니?”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계시던 부모님에게 그리 묻자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뭐지?
그런 의문과 함께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온 나.
시간은 오후 1시 20분.
벌써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본선 결과가 공개되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컴퓨터에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검색하자 더 많이 보이는 유키에 모리의 기사들.
-이례적으로 두 번째 인터뷰를 진행한 유키에 모리 한 학생의 이름을 거론하며···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 이성현의 손을 잡다!
-유키에 모리! 스카우트가 아닌 협주를 신청하겠다 밝혀! 그 대상은?
-이성현에게 협주를 신청한 것은 제안이 아닌 부탁임을 밝힌 유키에 모리…
대중과 소통하기를 꺼리는 그녀답지 않게 한국에서 두 번째 인터뷰를 진행한 듯했다.
게다가 협주 대상으로 나를 택했다니, 나를 일본으로 데려가려던 것 아니었나?
게다가 기사가 올라온 시간을 보니 인터뷰는 콩쿠르가 끝난 직후에 진행된 듯했다.
대체 뭐지···.
나만 모르는 내 이야기가 벌써 기사화되어서 떠돌고 있으니 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본선의 결과.
서울 국제 음악 콩쿠르 홈페이지에서 피아노 부문을 누르자 보이는 한 게시글.
[제12회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욕심을 다 버렸다 해도, 제대로 김민호와 경합을 벌인 첫 번째 승부의 결과다.
커서는 그 게시글 위에 안착했지만, 클릭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전 미향예고의 입시 결과를 확인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떨림.
“후우우”
괜히 심호흡까지 길게 하고 나서야 나는 손가락에 힘을 줬고, 화면은 깜빡이며 결과 창을 띄웠다.
[1등: 김민호] [2등: 이성현] [3등: 최지은]…
“…”
잠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역시’, 라는 생각과 함께 ‘어째서’라는 마음이 가슴을 쿵 내려찍는 느낌이었다.
김민호의 연주는 정말 대단했다. 확실히 그랬으나 나 역시 최선을 다했는데···.
아직은 많이 부족했던 걸까.
역시 천재를 뛰어넘는다는 건 생각처럼 잘 풀리지는 않는 걸까.
한순간에 석상이 되어버린 나는 그렇게 드르륵 마우스 휠을 굴려 화면을 내렸는데, 바로 다음에 보이는 항목에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세부 점수.
역시나 주최자에 미향예고가 있는 만큼 피해갈 수 없는 점수 공개.
그런데,
[김민호 – 93] [이성현 – 92] [최지은 – 87]…
딱 1점 차이였다.
그것도 나나 김민호와 다름없이 가장 멋진 연주를 선보였다는 최지은과 5점이나 격차를 벌린 점수로 딱 1점.
싸늘해지려던 가슴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했다.
1점이라···.
고작 1점.
그날의 컨디션, 기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그 작은 간극.
이젠 나와 김민호의 거리가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니!
나는 그 사실 하나로 다시 전신에 활력이 돌았다.
심지어 심사평도 내가 잘 아는 통상적인 형태와는 많이 달랐다.
-1등으로 선정한 김민호의 연주는 원숙한 회화적 기량과 검증된 그 시대의 색채를 완벽하게 재현한 음색이 특히 돋보였다. 그리고···
보통 가장 공을 들여 길게 작성되는 1등 심사평보다 딱 봐도 두 배는 많아 보이는 2등의 심사평.
-2등으로 선정한 이성현의 연주는 그 나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솔한 감정과 신비로운 연주법이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탁월한 쇼맨십과 듣는 이에게 일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그 화려한 주법을 보여준 그를, 이 콩쿠르라는 무대에서 만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 때문에···
이어서, 이 무대가 정적이고 엄숙해야 할 콩쿠르였기에 1등으로 민호를 선정한 것이고 만일 다른 형태의 무대였다면, 이번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을지는 심사위원단 전부 알 수 없다고 말을 했다고 적혀 있다.
심사평을 이런 식으로 적어놔도 되는 건가?
내가 아직 피아노에 몰두하지 않는 시절에는 이런 게 트렌드였던 건가···.
뭐, 나야 검증된 전문가들에게서 이만큼이나 공개적인 덕담을 들으니 좋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에 계속 들었다.
1등보다 2등에게 더 큰 분량을 할애하는 심사평이라니.
참, 의도치 않게 음울했던 심정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다시 내게 전달된 편지와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니, 사람들은 1등을 거머쥔 김민호와 동급으로 갑자기 나타나서 최지은을 꺾은 나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게다가 유키에 모리가 공개적으로 내게 협주를 부탁했다는 인터뷰까지 했으니···.
결과적으로 승자는 김민호였지만, 인터넷 세상에는 내 이야기가 더 많이 보일 지경이었다.
“하,”
첫 승부.
안타까운 패배.
그런데 이상하게도 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
“성현아, 지은아 진짜 축하해!!”
편안한 주말을 보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월요일.
1반에 찾아온 이예린은 화려한 꽃다발 두 개를 각각 나와 최지은에게 건네주며 큰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이쪽으로 이목이 쏠렸으나 예린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제는 그런 시선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이?
“1학년에서 본선에 진출한 것도 대단한데 1, 2, 3등을 싹쓸이하다니 이거 진짜 대단한 거 아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예린이.
대단한 것 아니냐고 물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1학년에 본선 진출자가 나온 것도 지난 2년간 없던 일이었고,
그 1학년이 2등을 차지했던 일화도 미향예고 역사상 딱 1번 있었던 대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 콩쿠르는 아예 1학년 1반의 세 사람이 모든 상을 전부 차지했으니 오죽하겠는가.
“확실히, 이번에 교장이 환장하는 기사가 엄청 많이 나서 지금 자랑하고 난리라고 주말에 교수님이 말씀하시더라.”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최지은.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처럼 건조하게 말했지만, 그녀도 교장을 환장하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였다.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이만큼 노골적인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괜히 평소보다 더 언행을 조심하는 중이었는데, 막상 최지은을 보니 안 그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있잖아. 아직 두 사람은 결과 못 봤지?”
한창 최지은과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묻는 이예린.
“뭐를?”
“우리 실기 고사 최종 점수 있잖아. 오늘 아침에 나왔잖아.”
아! 실기 고사, 콩쿠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 아직 최종 점수는 나오지 않았었지?
이예린은 내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앨범을 보여주었는데, 컴퓨터 모니터를 찍은 그 사진 속에서 우리 팀은 당당히 1차 교원 평가에 나왔던 결과를 역전해냈다.
1위. [팀- 이성현 외2인 (93/100)]
2위. [팀- 김민호 외1인 (89/100)]
1위.
지금 눈앞에 있는 이예린, 최지은, 그리고 나로 이루어진 팀이 1등을 해낸 것이다.
“와!”
그녀답지 않게 높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는 최지은. 그리고 나 역시 머릿속으로 예측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결과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학기 초부터 준비해왔던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나는 밀려오는 뿌듯함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교원 평가에서는 밀렸을지라도 결국 실기 고사에서 나는 처음으로 김민호를 이겼다.
그것도 처음 실행된 실기 고사의 빈틈을 노려 반칙수준의 점수를 얻어낸 그를 말이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나와 최지은에게 축하해주던 이예린은 담임 선생님이 1반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모두 박수!”
이미 받을 축하는 다 받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침 조회시간에 또다시 박수 세례를 받는 김민호와 최지은 그리고 나.
너무 과하다 싶은 마음에 나는 민망함까지 느꼈으나, 미향예고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해낸 것이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는 게 선생님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조회를 마치고 오전 음악사 교과서를 책상에 올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무슨 일인지 가장 앞자리에 앉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성현아, 너는 잠깐만 교무실로 따라올래?”
“예?”
웬일인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담임 선생님. 나는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 교실을 나섰지만, 생각해보니 왜 나만 불려 나온 건지 좀 의아했다.
하지만 그런 내 의문은 교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풀리게 되는데,
“아, 찾았다.”
자신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서랍을 뒤적거리던 담임 선생님이 무슨 티켓 두 장을 내게 내민 것이다.
“이게 뭐예요?”
쓱 보니 뮤지컬 티켓 같이 생겼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이런 걸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다.
“전에 신입생 실기 우수자 연주회에서 너랑 엘리나가 고생했잖니. 교장 선생님이 무리한 부탁에 고생 많았다고 주신 거래.”
“음, 그래도 갑자기 뮤지컬이라니 좀 뜬금없지 않아요?”
“너도 교장 선생님 스타일 알잖니. 보통 사람들하고는 사고방식이 좀 다른 거.”
“아아, 그건 그렇죠.”
교내의 여덟 명을 위해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당연한데도 학사 일정을 엎어버리는 사람이다.
“아무튼,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너 주말에 스트레스 좀 풀고 오라고 주셨어. 이번 콩쿠르 기간도 신경 써서 이번 주말에 맞췄고.”
전생에도 가끔 생각했지만, 참 무식할 정도로 막무가내인 교장 선생님이다. 그런데 또 웃긴 점은 그 교장이 무능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특출난 천재를 편애하기로 유명한데, 전생에서도 김민호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힘을 많이 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성현아 누구랑 갈 거야?”
내가 잠시 전생의 교장을 떠올리며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갑자기 눈을 빛내며 그렇게 묻는 정혜선 선생님.
“누구랑 갈거냐고요?”
당연히 신입생 연주회로 같이 고생한 엘리나랑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엘리나는 지금 바쁘잖니. 다음 주가 바이올린 콩쿠르 예선이야. 아, 그리고 엘리나한테 줄 티켓은 따로 두 장 있으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책상에 가방은 걸려 있는 건 봤으니 막상 얼굴을 보지는 못했었다.
곧 바이올린 콩쿠르라서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성현이는 과연 누구랑 뮤지컬을 보러 가려나?”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질문하는 선생님.
내가 누구랑 휴일을 보낼지를 왜 선생님이 궁금해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상 주변을 훑어보니 내 대답을 듣기 위해 귀를 곤두세운 사람은 비단 우리 담임 선생님뿐만이 아닌 거 같았다.
뭔, 이런 일에 관심들이 그렇게 많으신지.
그나저나 같이 고생한 엘리나가 아니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셋이나 있었으나,
“그러게요···. 누구랑 갈까요?”
갑작스러운 일이다 보니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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