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50
50. 레스트 (Rest, 쉼표) -2
“아니야.”
슬슬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밤. 나는 최지은의 진짜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어디서 내가 뮤지컬 티켓을 받은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생각보다 선생님들의 입이 가볍다는 것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뮤지컬 티켓을 받은 건 맞는데, 아직 누구랑 갈지 정하지는 못했거든.”
“티켓을 받은 건 맞아?”
미심쩍다는 표정의 최지은에게 나는 아예 신입생 연주회에 관한 이야기부터 콩쿠르 준비로 바쁜 엘리나 얘기까지 전부 털어놓아 버렸다.
“그럼 예린이 얘기는?”
“그러니까···. 그건 나도 금시초문이야.”
“한승우 이 새······.”
“승우가 왜 거기서 나와?”
“아, 그건 몰라도 돼. 내가 반쯤 죽여놓을 테니까.”
“주, 죽여? 왜?”
“몰라도 돼.”
내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최지은. 그러나 누구를 죽여버리겠다는 그녀의 과격한 표현과는 반대로 계속 찡그리고 있던 표정은 한결 풀렸다.
“야.”
한참을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최지은은 문득 나를 불렀다.
“어쨌든 너, 뮤지컬 보러 갈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헛소문 말고 진짜로는 누구랑 갈 건데.”
“글쎄?”
혹시 뮤지컬에 흥미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가 누구랑 가는지가 많이 신경 쓰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좀 아리송한 느낌에 그리 말하자.
최지은은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한숨만 픽 내쉬더니 말했다.
“너 똑바로 생각도 안 해봤지?”
정곡이었다.
이에 내가 뜨끔 하는 반응을 보이자 최지은은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다시 여자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나는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등을 돌리려는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모차르트 좋아해?”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자 내 이러한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최지은은 툭 끊긴 필름처럼 동작을 멈췄다.
나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뮤지컬 ‘모차르트’ 티켓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같이 갈래?”
최지은은 놀란 심정과 미심쩍다는 표정이 공존하는 얼굴을 하더니 말없이 티켓을 받았다.
***
“지난번에는 정말 미안했어요.”
뮤지컬의 동행자가 정해진 지 이틀 뒤. 나는 공개적으로 학교를 방문해 특별 강연을 진행해주신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와 그 응접실에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성현군의 기량을 제가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했던 일 사과드릴게요.”
내게 일방적으로 유학 제안을 했던 일을 고개 숙여 사과하는 유키에.
사실 그녀의 제안은 예술고의 일반 학생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혜택을 약속해주기도 했기 때문에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내게 이렇게 착실한 사과를 해준다는 건, 유키에라는 연주자가 이미 나를 ‘예술고의 일반 학생’이 아닌 같은 연주자로서 인정해주었다는 뜻이리라.
나는 속으로 나의 연주가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수준의 연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편지, 잘 받으셨나요?”
그녀가 엄마를 통해 내게 준 편지의 내용은 방금 그녀가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것과 비슷했다.
일방적인 제안과 더불어 보여준 오만한 모습에 대한 사과와 기사에서도 신나게 떠들던 ‘협주 제안’.
그리고 눈앞의 유키에가 지금 나와 말하고 싶은 화제가 아마 그 협주에 관한 이야기겠지.
“좋아요.”
“에, 들어보지도 않고요?”
“협주 말씀하시려는 거잖아요? 저는 방학 기간이라면 언제든지 상관없어요.”
“오, 오오.”
아마 나와 긴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고 왔던 것 같은 유키에. 오히려 내가 단박에 제안을 승낙하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대신, 딱 한 가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어제, 담임 선생님에게 오늘 유키에가 학교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귀띔을 듣고, 그녀와 담임 선생님이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항상 내가 부탁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받아주고, 매번 수고스러운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주는 엘리나에게 어떻게 하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나는 저녁을 사준 것만으로 괜찮다고 했으나, 내가 도움을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고작 그걸로 끝을 내겠나.
학생의 정신머리라면 그럴지 몰라도 내 서른 후반의 정신머리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콩쿠르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했던 것인데, 막상 제대로 연습에 참여해보니 내 수박 겉핥기 지식으로는 이미 한 달 가까이 곡을 연마해온 엘리나에게 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홍진태를 어떻게든 모셔와서 그녀의 코치를 부탁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세계급 바이올리니스트가 알아서 나를 찾아와준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콩쿠르에 참가하는 친구가 있어서요.”
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유키에를 엘리나가 있을 3번 연습실로 안내해주었다.
“아, 협주 영상의 예쁜 학생!”
유키에가 먼저 엘리나를 알아보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던 엘리나도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인상을 날카롭게 찡그렸다가 뒤따라 연습실에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표정이 확 풀렸다.
“아아, 그러니까 성현군이 연습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학생이, 성현군과 협주를 했던 그 학생이었군요?”
그러고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에.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와 엘리나의 협주 영상을 본 적이 있는지, 그렇게 말하는 유키에씨.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으나, 우선 한쪽은 바쁜 프로 바이올리니스트이고 다른 한쪽은 콩쿠르를 이틀 앞둔 학생이니 시간을 아끼고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연습을 진행하자고 말했다.
“서, 성현!?”
유키에의 정체를 알아본 것인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놀라며 나를 쳐다보는 엘리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싱긋 웃고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힘차게 말했다.
“화이팅!”
엘리나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분명 유의미한 경험이 되리라. 나는 그런 피 같은 레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연습실을 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
유키에가 엘리나의 연습을 봐준 지 벌써 이틀, 엘리나를 비롯한 바이올린 콩쿠르의 출전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런데도 금요일의 종례시간 내가 속한 1반에서는 힘찬 연주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는데, 다름 아닌 플루트와 첼로를 전공하는 학생들의 연주 소리였다.
교탁 옆으로 불려 나간 두 학생이 작곡과 졸업생들이 남긴 악보를 연주한다.
이는 실기 우수자 선정에 성실성, 발전도, 분석력 등 꽤나 다양한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동기 피드백 시간이었다.
1반은 특히나 콩쿠르참가자가 많아 다른 반들과 비교해 아직 절반가량 피드백을 진행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신입생에게 가장 중대한 사건인 실기 고사도 무사히 끝나고 기말고사도 한 달 넘게 남아 상대적으로 비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정혜선 선생님이 아예 작정하고 조회 시간과 종례시간에 최대한 많은 동기 피드백을 강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대충 휘갈겨 쓰려고 하거나, 지루하다는 얼굴의 학생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공개적으로는 아무 점수도 반영되지 않는다고 알려진 동기 피드백이었지만, 엘리트만 모여있는 이 1반의 학생들은 이 시점에 모두 눈치챈 것이다.
동기 피드백의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과연 1반이네.’
전생에는 중간고사 이후에 서서히 알려지고 1학기가 끝나고서야 대부분 학생이 눈치채기 때문에 이렇게 진중한 분위기는 2학기에나 볼 수 있었다.
모든 정보를 공유받고 온다는 미향중 출신의 학생들이 사전에 동기 피드백의 중요성을 모른 이유는 단순하다.
1학기가 끝나도 끝내 동기 피드백이 어디에 어떤 점수로 반영되는지는 결국 명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한 정보만 주고받는 걸 선호하는 미향중의 완벽주의가 되레 독이 된 것이다.
“휴우.”
이번에도 나는 뒷면까지 가득 채운 동기 피드백 용지를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제출했는데, 뒷자리에서부터 이런저런 말이 쏟아져나왔다.
“와. 또 가득 채웠어!”
“나는 이제 손 아파서 못하겠던데.”
“방금 그거 네 번째 제출 아냐?”
“성악에 비올라랑 플루트, 첼로였으니까 네 번째 맞네.”
“와. 미쳤다 진짜.”
“지은이도 성현이한테는 안 되네.”
“야, 지은이 들으면 너 죽어.”
뭐가 그리 관심이 많은지 내가 답안지를 제출할 때마다 아이들은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성현.”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고 나가시자마자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내일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한 최지은이었다.
“응?”
“내일 우리 몇 시에 어디서 만나?”
주변에 학생들이 아직 자리를 비우지 않았음에도 남의 눈치를 절대 보지 않는 최지은은 당당하게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음, 서초에 있는 예술의 전당 저녁 6시니까. 4시 반에는 만나서 저녁 먹자.”
“그래. 괜찮네. 저녁은 뭐 먹으려고?”
내가 이미 정해둔 일정을 이야기하자 새침한 목소리로 계속 말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최지은.
그때, 뜬금없이 옆에서 다른 사람이 나와 최지은 사이에 들어와 말을 꺼냈다.
“저녁은 파스타 어때? 서초면 저번에 빠네 맛있게 하는 집 가봤거든.”
“엉?”
갑자기 나타난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김민호. 최지은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하는 소리를 내다가 말했다.
“갑자기 뭐야. 우리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라 모차르트 보러 가는 거거든?”
“응 알아, 승우한테 들었거든. 근데 마침 티켓을 운 좋게 구해서 나도 같이 가려고.”
“네가? 왜?”
민호의 참가 소식에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보였던 지은이가 다시 인상을 팍 구겼다.
“에이, 친구들하고 같이 가고 싶은 거지 이유가 어디 있어.”
“아니, 너무 갑자기···.”
“성현아 어때? 괜찮지?”
지은이 반응이 영 좋지 않자 바로 내 쪽을 쳐다보며 말하는 김민호.
나야 뭐, 거절할 이유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아.”
그리고 최지은은 그런 날 보며 평소와 같이 찡그린 표정이 되어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뮤지컬은 셋이서 함께 보러 가게 되었다.
나야 뭐 민호가 온다니 더 좋지만···.
***
다음날 서초구 예술의 전당 앞의 사거리. 나는 멍하니 약속 장소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길을 지나던 행인이 나를 보며 두리번두리번하더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사인 좀 해주세요!”
아무리 행인이 많은 곳일지라도 설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SNS에 그 학생 맞죠?”
“혹시, 클래식 버스킹··· 이요?”
“네네! 맞아요! 너무너무 멋있었어요! 진짜 고등학생 맞아요? 나 바이올린 대 피아노 저장해놓고 심심할 때마다 듣는다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참고로 이번이 두 번째 사인 요청이었다.
처음은 종이 신문으로 내 얼굴을 접하신 클래식에 관심 많은 노신사였는데, 이번에는 홍진태를 통해 홍보된 SNS 영상으로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겉으로는 두 번 모두 침착하게 미소로 대응해드릴 수 있었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사인이라니···.’
지난 생에서는 아무래도 전문가와 엮이는 일만 잔뜩 있었다 보니 누군가에게 사인을 부탁받거나, 그들이 주섬주섬 꺼낸 공책에 이름을 적어줄 일 또한 없었다.
참 폼 안 나게 이름 석 자를 적어드리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가 멋들어진 사인을 만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하나 만들어야겠네.”
이렇게 직접 사인을 요청을 받아보니, 나는 저번의 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광고에 힘을 주는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영향도 컸겠지만, 역시 홍진태와 함께 SNS 영상에 출현했던 것도 나라는 존재를 알리는데 꽤나 큰 공헌을 한 모양이었다.
“와, 성현아 무지 일찍 왔네?”
그리고 약속 시각이 15분 남은 시점에 민호가 나타났다.
매일 쫓겨 살 듯이 살다가 갑자기 태평한 주말을 맞이하니, 할 일이 없어서 일찍 나왔던 것인데 눈을 크게 뜰 만큼 놀라워하는 김민호.
“나는 내가 1등일 줄 알았는데···.”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아, 그래? 아깝네~”
그렇게 도착한 민호와 주거니 받거니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도착한 최지은과 함께 민호가 알아봐 준다고 했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민호야, 혹시 뭔가 중요한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한창 식사를 진행하던 중, 나는 나와 약속 장소에서 만났던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들던 민호에게 그리 물었다.
그러자 망치라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김민호.
“티 났어?”
“아니, 티가 나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그랬어.”
내가 피아노 실력은 그저 그럴지 몰라도 예전부터 감은 좋은 편에 속했다.
그렇게 내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식으로 말하자 김민호는 피식 웃으며 들어 올리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직후의 발언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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