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57
57. 몰토 (Molto, 매우) -3
“후아아아아.”
긴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로 향하는 길.
무대 위에서 담담하게 바이올린을 켜던 이수정은 우리 트리오 외의 다른 사람들이 없을 것을 확인하자마자 깊은 바다에 잠수했던 잠수부처럼 크게 숨을 내쉬었다.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안 그래요?”
이수정은 입을 크게 벌려 숨을 고를 정도로 허물없이 나를 대하며 그리 물었고 그 질문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앞에는 텅 빈 객석뿐이었을지라도 지금껏 내 눈으로 봐왔던 무대와는 그 규모가 달랐다.
1층만 1200석, 그리고 2층에 다시 700석으로 합계 2천에 달하는 객석의 수.
그저 마주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객석을 앞에 두고 연주를 해본 경험은 있으나 그때는 내가 마흔에 달하는 단원중 하나였다.
허나, 지금은 고작 셋.
그것도 전문가단 앞에서 연주해야 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내가 메인이나 다름없는 곡을 고작 한 달 연습한 트리오에서 연주해야 한다.
“리, 리허설 가지고 오바하기는···. 본무대에서는 눈 딱 감고 연습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았니 꼬맹아?”
“아저씨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요.”
“아니 꼬맹아, 같은 트리오로서 하는 말이잖아. 어른 말씀에는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면 되는 거야.”
“네네. 그렇습니까.”
이제는 은연중에도 낯을 가리는 모습이 사라진 이수정.
지금도 이렇게 입만 열면 으르렁대는 사이지만, 바이올린과 첼로를 맡은 두 사람은 그래도 요 2주간 꽤 친근해졌다.
“그런데 성현아,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 이제 리허설을 진행할 오케스트라만 셋이고 도중에 네 학교 친구들도 한 20분씩 연주한다면서, 그럼 우리는 4시간을 계속 대기실에 갇혀 있는 거야?”
“아, 그건 나도 좀 싫은데······.”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그의 의문에 답을 해주었다.
“아마 여기 문화회관 옆에 있는 대극장이나 반대로 가면 있는 연습실도 다 비어있을 테니까요. 혹시 손이 근질근질하신 거면 연습을 다녀오셔도 되고요.”
“여, 연습? 음, 대기실에서 명상이라도 좀 할까···?”
이미 2주 하고도 나흘을 내 고함과 호통 속에서 보내다 보니 연습이라는 단어에 진절머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스파르타식 연습의 마지막 날, 김 이사장의 눈앞에서 우리 트리오의 결실을 들려드렸고,
‘급조한 트리오가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솔직히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런 과찬을 듣게 되자 그간 혼자서 불평불만을 쌓고 있는 것 같았던 강남준은 입을 쓱 다물었다.
아니, 오히려 이사장님의 놀란 얼굴을 보자 나를 향한 시선이 제대로 격변하기까지 했다.
그전까지는 내 말을 따라주면서도 ‘참아준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사장님의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정말 대단하다’는 등의 칭찬을 아낌없이 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기실에 도착한 뒤, 잠깐의 고요한 휴식시간을 맛본 다음 나는 홀로 대기실을 빠져나와 거대한 연주홀 건물 입구에 있던 카페로 향했다.
그래도 나름 트리오의 리더인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커피 한 잔이라도 돌리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카라멜 마끼아또,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리고 민트초코라떼를 주문한 나는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당탕!
입구에서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니 유리문에 쿵 들이박는 전동 휠체어가 보였고 곧바로 웬 고함이 들려왔다.
“문은 왜 안 열어주는 게냐! 나 같은 늙은이는 들어오지도 말라는 게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은 흰 백발에 연배가 꽤나 있어 보이는 서양인이었고 그 뒤에서 지금의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한 동양인 남자아이가 다가와 유리문에 네모 버튼을 눌렀다.
“버튼를 눌러야 열리죠. 어르신.”
“흐음! 손님을 불렀으면 알아서 마중을 나와야지! 쯧!”
“재단에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는데도 4시간이나 일찍 온건 저희입니다. 어르신.”
“4시간이나, 10시간이나 거기서 거기지. 그렇지 않냐?”
“예. 그렇지가 않죠.”
아주 유창한 한국어를 들려주는 서양인 할아버지도 신기했지만, 그의 불평불만을 물 흐르듯 넘기며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소년의 조합은 괜히 더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상아.”
“네. 어르신.”
“목마르니까 아무거나 가져와라.”
“예.”
그러자 터벅터벅 걸어 내게 다가오는 큰 키의 소년, 아니 가까이서 보니 소년이라 칭하기에는 좀 많이 큰 덩치였다.
고3이나 대학생쯤 돼 보일까?
“학생 음료 석 잔 나왔어요.”
그때, 마침 카페 아저씨가 내가 주문했던 커피 세 잔을 준비해준 덕에 나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재상이라는 아이와 엮이는 일 없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엇갈리는 나와 재상.
연주 직전에 괜한 일로 이상한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저기, 혹시 너 민호 친구니?”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다름 아닌 김민호.
민호가 아무리 사방에 이름을 알렸다 해도 이렇게 친근한 어조로 그를 부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그 의아한 상황에 멈춰 서자 휠체어의 할아버지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젠틀한 미소를 보여주는 재상.
“맞지? 오늘 같은 자리에 너만 한 애가 나온다면 아마 이번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그 셋 중 한 명일 줄 알았어.”
“민호랑 아는 사이세요?”
“응? 당연하지. 연령대가 좀 갈려서 같은 콩쿠르는 못 나갔어도 A스튜디오 다닐 때 많이 봤었어.”
“A스튜디오요?”
그렇게 말하며 내 뇌리에 떠오르는 세 사람. 미향예고에서 구 본관을 이용하게 해줬을 때 괜히 악보 암기로 덤벼들었다가 대판 깨지고 쫓겨났던 3학년의 세 사람.
그 선배 같지도 않던 선배들이 아마 A스튜디오 소속이었을 것이다.
“어렵게 얻은 특별 공연일 텐데 힘내고, 알겠지?”
“네? 아. 네.”
A스튜디오라고 하면 학교에서 만난 그 사람들만 떠올라 영 이상한 사람들만 모이는 아카데미인가 했었는데, 이렇게 덕담도 들으니 꼭 그렇지만도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초기 목적이었던 음료를 들고 다시금 대기실로 향하는 나.
그런데 멀리서 김 이사장을 비롯한 이번 오케스트라의 경영진이 빠른 걸음으로 그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에게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모···. 모리스 어르신!”
“시끄러워! 나 이 나이 먹고도 아직 쟁쟁하니까 큰 소리로 부르지 마라!”
김 이사장님과 서양인 할아버지가 첫인사를 나눈 덕분에 의도치 않게 내 귀에 어르신이라 불리던 할아버지의 이름이 들리게 되었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리고는 가던 걸음을 멈췄다.
‘모리스라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한국을 좋아해 한국어까지 숙달하고 매번 국내에서 제자로 삼을 만한 아이를 찾는 괴팍한 노인.
그가 만약 진짜 독일의 유명 작곡가 ‘모리스 슈만’이라고 한다면, 전생의 나와도 연관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내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의욕을 잃고 지내던 시기, 내게 ‘천상의 반주자’라는 호칭을 줬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작곡가 모리스였기 때문이다.
급히 내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자 보이는 풍경은, 김 이사장님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이 거대 연주홀의 귀빈 응접실로 향하는 모습.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소리나 꽥꽥 지르던 그 서양인 할아버지가 정말로 모리스 슈만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이런 경연을 관람하러 왔다는 건 둘 중 하나를 뜻했다.
그가 자신이 작곡한 곡의 적임자를 찾으러 왔거나, 혹은 방금 나와 마주친 그 재상이라는 사람처럼 데리고 다닐 제자를 찾는다는 것.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뭔가 퍼즐 조각이 맞아들어가는 느낌이 파직하고 솟아올랐다.
솔직히, 김 이사장님이 냉정하게 말해서 없어도 되는 특별 공연을 만들어 민호와 나 같은 학생들을 초대한 것.
그리고 너무 철이 없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중, 고등학생의 나이를 제자로 삼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는 모리스 슈만의 말.
그리고 경연장에 나타난 그 작곡가.
그래.
아무래도 김 이사장이 이 특별 공연을 애써 마련한 목적은 민호의 연주를 저 거장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퍽 합리적인 의심을 이것저것 떠올리며 천천히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중요 심사위원이었으며 동시에 ‘한국 예술 종합학교’의 교수이기도 한, 문 교수는 반가운 마음으로 이번 오케스트라 경연의 협주 홀로 향했다.
2천에 달하는 객석 중에서도 김 이사장이 직접 부른 주요 인사들이 앉는 오십 석은 1층에서도 가장 앞에 붉은색 띠로 표시를 해두었고, 문교수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의자를 찾아 앉았다.
국내에서 최고라 불리는 오케스트라들 중에서 무려 세 팀이나 초청한 경이적인 규모의 연주회.
이 자리에 모인 기자나 교수 그리고 흔히 외국에서도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머릿수만 세어봐도 대략 백 명은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 교수의 가슴을 아이처럼 두근거리게 만드는 원인은 이 거대한 오케스트라도, 거장들과 만남도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결국 승패를 갈라놓아야만 했던 김민호와 이성현,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자신만의 색을 찾기 시작한 최지은까지.
이전 콩쿠르에서 1, 2, 3등을 나란히 차지한 그 셋이 오케스트라의 공연 중간중간 무대에 올라 펼친다는 그 특별 공연이 문 교수를 두근거리게 하는 진짜 이유였다.
“아이고, 이 늙은이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다!”
그런데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명상을 즐기던 문 교수의 집중을 깨트리는 괴팍한 목소리.
문 교수는 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모, 모리스 슈만?”
도저히 그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는 괴팍한 언행과 기이한 성품의 소유자.
그런 그가 어떤 연유에서 인지 문 교수와 같은 귀빈 객석에 앉아있다.
이 고요한 객석에서 큰 소리를 냈으니 당연히 모리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막상 그를 꾸짖거나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다들 괴팍한 어르신이라 불리는 모리스의 위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작곡한 곡은 이 시대에 현존하는 그 어떤 작곡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찬란하다.
그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아 곡을 쓰지 않는다.
소문에 따르면 갑자기 골방에 틀어박혀 석 달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어마어마한 곡을 써내고, 그 뒤에는 자신의 곡에 알맞은 적임자를 찾기 위해 세계 곳곳을 여행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마 이번 곡은 한국에서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 중에서 적임자를 뽑고자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가 키운 제자 중에서 절반 이상이 모두 한국인들인 덕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문 교수가 직접 듣게 되니 참,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하아.”
문 교수는 한숨을 내쉬며 갑갑한 심정을 먼저 드러냈다.
모리스의 곡은 언제나 환영을 받지만, 모리스라는 사람은 항상 전문가들 사이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한다.
당연하지만, 그 원인은 모리스라는 사람 자신에게 있는데,
그는 일정 수준 미만의 연주를 들으면 한심하다며 상소리를 툭 내던지고는 그 연주자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안 되는데···.”
문 교수는 다시금 연주 순서가 적힌 프로그램 북을 펼치며 걱정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5시간에 달하는 이 장대한 경연, 그 첫 순서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성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대로 음악을 배운 기간이 반년도 안 된다고 알고 있는 성현.
문 교수의 눈에 그 아이는 분명 천재 중의 천재였지만, 독주라면 모를까 트리오로서는 모리스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삼중주는 독주랑 전혀 다르지. 제대로 음색의 조형을 가다듬지 못했다면···.”
분명 모리스는 연주회장을 나가버릴 것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성현이라도 아직 미성숙한 아이일 뿐이니 큰 상처를 받을 것이 자명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면 뭐하겠나.
연주자가 상처를 받아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리면 끝인데···.
문 교수는 백이면 백 모리스가 뛰쳐나갈 것을 확신했고 성현이 이번 일로 상처를 크게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객석의 조명이 옅어지며 무대는 밝은 스포트라이트로 빛나기 시작했다.
세 남녀가 무대에 올랐다.
첼리스트 강남준, 바이올리니스트 이수정 그리고 피아니스트 이성현.
괜히 객석에 있는 문 교수가 손에 땀을 쥐는 그 짧은 순간,
[Mendelssohn Piano Trio No.1 Op.49](멘델스존 피아노 삼중주 1번)
건반과 두 현이 가히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을 맞춰 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
문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지르고 말았다.
혼자서 잘하면 그만인 혼자만의 연주도 아니고, 숨을 쉬는 타이밍조차 조율을 거듭해야 하는 트리오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색의 조화를 자아내다니!
아무래도 첼리스트인 강남준과 금천문화재단에서 손수 키운 바이올리니스트 이수정의 수완이 문 교수의 생각보다 좋았던 것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반년 배운 아이가 이렇게나 완벽한 협주를···.
홀로 그렇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론을 거듭하던 문 교수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고 말았다.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1번, 그 1악장에 제대로 선율이 안착하자 자연스럽게 알 수 있던 어떤 사실 때문이었는데,
이 트리오에서 중심을 잡고 두 연주자를 이끌고 가는 소리는 현악기가 아니었다.
모든 음을 주도하고 오히려 엇나가려는 현을 짧고 강한 음색으로 신호를 주어 다시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피아노의 이성현!
그때, 당황하는 문 교수의 등 뒤에서 굵직한 서양인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튀어나와 문 교수는 이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ha! Sehr gut!”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작곡가 모리스. 그리고 그가 말한 독일어를 해석하면 ‘Very Good!’이 된다.
다시 말해 그 괴팍한 노인네가 말한 것이다.
트리오의 연주가 아니, 성현의 주도하에 아름답게 진행되는 이 선율이 정말 좋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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