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59
59. 컴포저 (Composer, 작곡가)
젊은 시절에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20세기의 저명한 음악가들에게서 직접 강연도 들어본 한 독일의 작곡가가 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소유했으면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던 음악가였고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등 악기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프로 수준의 성취를 거둬내며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죽는 날까지 생을 탄탄대로로 보낼 것만 같았던 그 거장에게도 중년의 나이에 큰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는 교통사고로 양 다리 십자인대 파열과 더불어 연주자로서 더없이 중요한 손가락을 잃게 되었다.
그 거장의 이름은 모리스 슈만.
전생의 나에게 천상의 반주자라는 호칭을 주어 생에 첫 전성기를 맞이할 계기를 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막상 전생에서는 그렇게 큰 도움을 받았음에도 나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얻지 못했었는데,
“예끼 이놈아. 1분이 아쉬운 이 늙은이를 얼마나 기다리게 할 셈이냐.”
이번 생에는 그 모리스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지난 생에 영상으로 보고, 이번 생에도 지난번에 직접 들은 적도 있었지만, 정말로 독일인 할아버지가 한국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사용한다는 건 참 놀라웠다.
아마 올해로 여든을 넘긴 작곡가 모리스 슈만의 제자 중에서 한국인만 여섯 명이나 되는 게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뭐 하고 있어. 얼른 앉지 않고.”
새삼 새로운 감회를 느끼고 있던 내게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의자를 가리키는 모리스.
나는 다혈질이라는 그답지 않은 모습에 괜히 긴장하며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휠체어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미향예고 1층의 다용도 음악실.
미향예고의 커리큘럼 상 존재하는 모든 악기가 모여있고, 협주, 독주, 음향녹음 등 어떤 형태의 연주든 모두 가능하도록 준비해둔 곳이 바로 이 다용도 음악실이었다.
보통 귀빈이라면 유키에 모리를 맞이했던 그 응접실로 모시고 차를 대접하는 것이 정상이었겠지만, 눈앞의 인물은 괴짜 어르신으로 통하는 모리스 슈만.
아마 이 장소 선택도 그가 직접 결정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 다용도 음악실에 나와 그가 단둘이 있는 것도, 그가 원한 상황이겠지.
“네가 올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한 그 이성현, 맞지?”
“네.”
“어제 김동혁이한테 듣기로는 이번 콩쿠르가 첫 출전이고 다른 경력은 아예 없다는데 맞아?”
“예. 맞습니다.”
내가 착석하자 생각보다 차분한 어조로 무슨 면접에서나 들을 법한 질문을 차례로 하는 모리스.
괴짜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점잖아서 괜히 더 긴장되었다.
“그래서, 음악을 제대로 배운 건 이제 여덟 달 됐다고?”
“네.”
모리스 슈만의 성격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는 무슨 꿍꿍이인지 계속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상태로 그가 언제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모리스는 충분히 질문을 마쳤다는 듯 몸을 틀어 휠체어 옆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어, 내 앞에 올려놓았다.
“열어봐라.”
군말 없이 서류가방 같은 그것을 열자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종이뭉치 아니, 도저히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악보가 보였다.
“악보? 그것도 전부 피아노 독주곡···.”
“녀석 참, 한눈에 알아보는구나.”
“이게 다 뭐죠?”
내가 진심으로 당황해하며 묻자 지금껏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만 짓고 있던 모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중에서 딱 한 곡 아무거나 골라보거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눈치에 나는 진지하게 악보들을 살펴보다가 한 곡을 집어 들었고 모리스는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켰다.
그때 전생에서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무언가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곡가 모리스 슈만이 이따금 국내에 방문해 연다는 비정기 콩쿠르.
정해진 이름도 없고, 애초에 콩쿠르 참가인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띄우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도 않는 그 무명의 경연.
그러나 실제로 그 경연이 벌어진다고 하면 전문가들은 ‘모리스 슈만 콩쿠르.’를 직접 관람하기 위해 벌떼같이 모여든다고 한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맛집.
숨겨진 히든 피스 같은 엑스트라 콩쿠르.
그 예선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그리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들었었다.
바로 지금의 이 순간처럼.
“연주하면 되나요?”
“그럼 피아니스트한테 춤이라도 부탁할까 봐?”
모리스는 우스갯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으나,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다른 단어에 놀라고 말았다.
그가 나를 ‘피아니스트’라 칭한 것이다.
멋 모르는 어린놈도, 그냥 학생도 아닌 한 명의 연주자로 나를 인정해준 것이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세계적인 거장 모리스가 나를.
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꽉 쪼여오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내색 없이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내가 악보 대에 올리는 모리스 슈만의 미공개 피아노 독주곡의 이름은 한국어로 번역하면 ‘겨울을 위하여’.
그는 ‘모리스 슈만 콩쿠르’의 예선으로, 그 어디에도 공개한 적이 없는 자신의 자작곡을 초견으로 연주시켜 볼 심산인 것 같았다.
그야 처음 보는 곡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느끼느냐에 따라 자신과 성향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기본적인 실력은 갖춰져 있는지를 판단하기에 확실히 이만한 방법은 없다만,
문제는 내가 모리스 슈만의 자작곡이자 아직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는 이 ‘겨울을 위하여’라는 곡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곡은 원래 지금으로부터 6년 뒤에 민호가 받게 되는 곡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는 곡이름이 보여서 그 악보 더미에서 집어 든 곡이기도 했고···.
뭐, 내 실력에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나 싶어 나는 전생에 들었던 그 음색을 되새김질하며 아주 천천히 건반으로 손을 움직였다.
딩-
그리고 그 순간, 모리스 슈만이라는 거장의 눈과 입이 상하로 크게 벌어졌다.
***
이틀 전,
모리스는 ‘오케스트라 경연’에서 성현의 임기응변 능력을 본 그 순간, 그 아이를 자신이 비정기적으로 한국에서 개최하는 콩쿠르에 출전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처음에는 흥미였다.
분명 2년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던 이름의 아이가 마치 오랫동안 연주자로 살아온 사람처럼 연주하는 것도 참 인상적이었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트리오 구성원을 카리스마로 리드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모리스가 놀란 건 오케스트라 경연이 끝난 뒤였다.
사실상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모리스와 이재상은 모를지라도,
모리스는 자신을 한국에 초대한 금천문화재단의 이사장까지 이성현이라는 아이의 존재를 진작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직접 전화까지 걸어 연락을 취해봤으나 김 이사장은 이성현이라는 학생에 대해 똑바로 알게 된 건 고작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그 아이의 정식 스승이라고 소개를 받은 마주혁 원장까지 성현이라는 꼬마를 만난 지 아직 여덟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는데···.
“내가 늙은이라서 아주 가지고 놀아보자고 작정이라도 한 게야!?”
모리스는 그 어처구니없음에 참지 못하고 언성까지 높여가면서 진실을 요구했지만, 끝내 두 사람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스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우물 같은 소리를 내는 아이가 정말로 갑자기 나타났다니, 차라리 이성현이라는 아이가 시간 여행자라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예선’의 후보로 점찍어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이성현을 찾았고, 직접 만난 순간 정말 놀라고 말았다.
일부러 더 긴장하라는 뜻에서 항상 자신의 옆에 있던 재상도 나가라고 한 뒤 단둘이 남아 압박 면접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성현은 오히려 모리스와의 만남을 즐기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거장인 모리스와 일개 학생에 불과한 성현의 거리, 이를 똑바로 인지했다면 지을 수 없는 당돌한 표정.
만약 성현이 정말 모리스를 잘 모르는 아이라서 그렇게 여유로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물론 들었지만, 그만큼의 연주를 할 줄 아는 연주자가 자신이라는 거장을 모를 리 없다고 모리스는 확신했다.
그러니 모리스의 눈에 성현의 모든 언행은 당당함으로 비치게 되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그 굳건한 자신감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 마치 2년 전에 재상이와 끝까지 자신의 곡을 받기 위해 경쟁을 펼치던 그 작은 꼬마, 김민호.
이성현이라는 아이는 정말 천재 김민호와 같은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보통은, 모리스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진중한 태도로 말을 걸면 한껏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성현은 그런 긴장감마저 즐기는 사람처럼 미소까지 지었고 모리스는 그 당당함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어차피 자신의 콩쿠르 예선까지는 이 아이를 부를 심산이었으니,
모리스는 내킨 김에 성현의 성형이나 그때 무대에서 보여줬던 임기응변 능력이라도 가까이서 다시 볼 겸 그는 미공개 자작곡을 성현에게 연주시켜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성현이 골라잡은 곡은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한 곡이자, 자신의 야심작인 애상적이고 다채로운 야상곡.
[Maurice: Für den Winter.](모리스: 겨울을 위하여.)
성현은 운이 나쁘게도, 꽤나 기구한 생을 살다 죽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곡을 뽑게 되었다.
이 곡은 모리스가 작곡하는 시간도 길었고, 악장마다 분위기 전환이 심해 절대로 악보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곡이다.
마치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복잡한 곡.
아직 스무 살도 먹지 않은 나이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모리스는 홀로 피식 웃으며 성현의 연주가 아무리 볼품없더라도 이번만큼은 비웃지 않겠노라 다짐, 했는데···.
딩-
미끄러지는 낮은 음계의 아르페지오.
구름에 가려진 별빛을 담아낸 느릿하면서도 강한 주선율과 야상곡 특유의 어둑한 밤의 그림자를 표현하는 반주.
성현의 왼손과 오른손은 마치 이 곡을 들어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모리스의 머릿속에서만 연주되어오던 그 분위기와 감성을 그대로 남아내고 있었다.
완벽한 재현, 마치 모리스의 머릿속에 녹음기를 꽂아 그대로 틀어놓은 것 같은 곡 해석,
‘아니?!’
생각해보니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성현은 애초에 악보를 끝까지 넘겨보지도 않았으니까······.
‘대체 어떻게.’
모리스는 두 눈으로 보고도, 자신의 귀로 듣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소년을 보며 경악스러움에 입과 눈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겨울을 위하여’라는 곡은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했기에 단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곡이었으니까.
그리고 모리스 자신조차도 손을 다쳤기에 완벽하게 연주해본 적이 없던 그야말로 초연.
이 세상에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연주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성현은 그 곡을 마치 모리스 자신이 연주한 것처럼 해냈다.
정말, 완벽하게 말이다.
***
“내 콩쿠르에 나오겠니? 아니, 아니지. 나와라. 넌 꼭 그 자리에 와야 해.”
내가 20분가량의 연주를 마치자 모리스는 단 한 순간의 기다림 없이 그런 말을 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그렇게 말을 하는데, 어찌나 그 기세가 대단한지 휠체어에서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설 기세였다.
다행히 내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얼핏 듣기로 모리스는 ‘겨울을 위하여’라는 곡을 적합한 연주자를 찾을 때까지 7년간 미공개 상태로 묵혀두었다고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미래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연해낸 나의 연주가 엄청나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올 생각이 있냐는 것도 아니고 꼭 와야 한다고 말하다니,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모리스라는 작곡가는 이런 말을 하는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정말 제가 가도 되는 건가요?”
그리고 그의 공인으로 인해 확실시된 모리스 콩쿠르 출전.
“Natürlich!”
그는 나의 질문에 아예 흥분해서 독일어로 ‘당연하지’라고까지 말해주었다.
흥분하는 모리스와 미소짓는 나.
전생에는 그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던 그 전문가들만의 숨겨진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나는 이 순간 얻어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