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63
63. 발룬티어 (Volunteer, 자원봉사자) -3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내가 서 있던 복도를 쓱 지나 이 복지 센터의 정문으로 나가버리는 여성.
워낙 전생에서도 색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얼굴을 보자마자 기억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 센터에 오는 건 훨씬 나중 일 아니었나?’
그녀는 이 클래식 센터에 어떤 특별한 학생의 학부모로 전생의 나와도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 만큼 자식에게 음악을 교육시키려는 열의가 강한 사람이었다.
막상 그녀의 아들이자 정작 교육을 받아야 할 당사자는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태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 민재 어머님!”
원장님은 바로 당황한 얼굴이 되어서는 그분을 쫓아가 버렸고 나와 예린이는 그대로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될 뻔했지만,
“하아. 연주 봉사죠? 일단 저 따라서 들어와요.”
다행히도 방금 거칠게 열린 옆 교실에서 이수정이 나와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두통이라도 느끼는 듯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픽 내쉬고 있었지만,
갑자기 큰 소리를 듣고 바짝 긴장한 예린이와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별말 없이 그녀를 따랐다.
원래 향하려고 했던 교실 문이 열리는 순간 조심스럽게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이 보였다.
자연 갈색의 더벅머리에 괜히 인상만 팍 찡그리고 있는 남자아이.
스쳐 지나가듯이 그 얼굴을 잠깐 보았을 뿐인데, 그 아이와 관련된 기억들은 금방 떠올랐다.
황민재.
전생의 나나 이수정을 꽤 골머리 썩게 만들기도 했고, 가장 클래식 음악 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던 아이.
그러나, 이 센터에서 음악을 배우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플루트 연주자.
그 어떤 기억보다도 가장 빠르고, 강하게 그 아이의 이름이 떠오른 데는 이유가 있다.
매일 클래식만 듣던 미래의 내가 이토록 빨리 기억해낸다는 건 딱 한 가지뿐이다.
김민호와 최지은 그리고 이예린처럼 훗날 클래식과 엮인 직업으로 데뷔를 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저 황민재라는 아이는 훗날, 시각장애 플루티스트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
이수정을 따라 교실로 들어가자 교습생분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불편하신 분들은 청각에 상당히 민감하기에 방금 들린 고함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방금 있었던 소리는 아무 일도 아니니까 잠깐 주목해주시겠어요?”
그 모습에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이수정이 능숙하게 적당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교습생들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반응은 각양각색으로 나뉘었다.
비교적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금세 익숙한 이수정의 목소리에 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에는 아직 중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도 있다.
연령대가 다양한 만큼 완전히 아직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이도 분명 있었으나, 방금까지 황민재와 그 어머니에게 시달리고 온 것으로 보이는 이수정은 그냥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오늘 오신다고 말씀드렸던 미향예고 선배님들 기억하세요? 그분들이 지금, 저랑 같이 왔어요.”
이수정의 말을 듣는 사람이 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반.
본래라면 원장님의 안내를 받아 차분하게 우스갯소리도 나누면서 진행되어야 할 자기소개 시간이 영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조금 특별한 경우이신 이 교습생분들에게 자기 소개시간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아이도 있는 만큼 충분히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해야 하는 이 타이밍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교습생은 대부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이건 이 클래식 센터에 나와 예린이가 녹아들기에 좋은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수정은 정신이 없는지 전혀 듣지 못하고 계신 분들을 챙기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 이어나갔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방문해야 할지 모르는데···. 이건 안되지.’
나는 그 모습에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교탁 앞에 선 이수정에게 말했다.
“잠깐만.”
동시에 내가 거침없이 걸어 향하는 곳은 미향예고의 음악실과 비슷한 구조의 이 교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딩-
주저 없이 전생에 몇 번이고 연주했던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그냥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연주를 시작해버렸다.
선택한 곡은, 얼마 전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위해 죽도록 연습했던 덕에 이제는 눈을 감고도 칠 수 있는
[Liszt- La Campanella](리스트- 라 캄파넬라)
도입부부터 임펙트 있게 퍼지는 고음이 교습생분들의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오오.”
곧바로 들려오는 작은 탄성.
거기서 이어지는 중반부의 매끄러운 기교는 모든 교습생의 이목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인지 이수정과 예린이까지 포함해 주위의 모든 이들이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멈추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라 캄파넬라.
웅장한 종소리를 묘사하기 위해 나는 손끝에 힘을 준 솔리스트 적 강한 연주법을 사용했고, 화려한 끝맺음과 함께 곡을 마치자 큰 반응이 쏟아져나왔다.
“우와아아아”
“진짜 잘한다~!”
“신기하네.”
“방금 그 연주는 대체 우와···.”
마치 예전에 버스킹을 구경해주던 행인들처럼 왁자지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교습생분들,
나는 흩어져 있던 주의가 오직 내 연주로 집중된 그 순간에 이수정을 바라보며 눈치를 주었다.
“자 여러분! 방금 피아노를 연주해주신 분은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삼중주를 리드해주신 미향예고의 이성현 오빠예요~ 어때요! 정말 피아노를 잘 치죠?”
아니, 내 소개가 아니라 자기소개를 다시 하자고 부탁한 거였는데···.
역시 이번 생에는 같이 지낸 시간이 2주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일까. 이수정은 내 몸짓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큰 상관은 없지만.
“안녕하세요. 여러분? 앞으로 한 달 정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연주를 들려드릴 이성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서먹한 반응을 예상하며 그리 말하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방금 만난 사이에 큰 반응을 기대하는 쪽이 원래 더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런데 교습생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우와! 이성현 형이면 그 유명한 사람 아니에요?”
“엄마가 뉴스에서 봤다고 했었어요!”
“저도 얘기 마아아않이 들었어요!”
“버스킹! 저는 버스킹 때부터 연주 듣고 있었어요!”
“누가 먼저 알고 있었냐는 걸로 경쟁하지 말렴”
곧바로 이야기보따리가 풀린 것처럼 유쾌한 목소리로 잡담을 하는 교습생분들.
전생에 미향예고 학생 중에는 아무래도 특수한 경우의 분들이라 흔히 매우 조용하고 음울한 분위기일 것이라 예상하는 학생도 더러 있었는데, 그건 명백한 편견이다.
전생에 피아노에 대한 자존심이건 용기건 모두 잃고 있던 내게 수많은 칭찬과 격려로 힘을 준 사람들이 바로 이분들일 만큼 말이다.
교습생분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 보니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감사했던 추억들도.
“그리고 제 옆에 서 있는 이 예쁜 언니는 말이죠! 무려 성현이 오빠보다 훨씬 피아노를 잘 치는 미향예고 학생이세요~”
“어?!”
그때 이어서 예린이를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이수정.
그 말을 들은 교습생들은 곧장 이수정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엇, 어엇?! 나?”
“우와 진짜요?!”
“성현씨보다 피아노를 잘 친다니 진짜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그러면 현직 피아니스트들 보다 잘 하는 거예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예린이를 향해 좀 과장될 만큼 찬사를 쏟아내는 교습생분들.
이건, 교습생들이 봉사자에게 가끔 치는 가벼운 장난이다. 마구 칭찬해서 부담을 줬다가 막상 연주를 듣고는 갑자기 싹 조용해지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꽤 섬뜩한 장난, 나도 당해봤기에 잘 안다.
“서, 성현아! 뭐라고 말 좀 해줘. 사, 사람들이 오해하겠어···.”
이에 갑자기 부담을 받은 예린이가 이 오해를 풀어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지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암 그럼요. 저 피아노 가르쳐준 친구가 예린이에요.”
“서, 성현아?!”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예린이. 하지만, 당해보면 또 의외로 이분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장난이기 때문에 나쁜 것은 아니다.
“성현씨는 무슨 콩쿠르 우승했다고 하지 않았나?”
“우승이 아니라 준우승일 거예요. 그리고 본인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예요.”
그러자 자연스럽게 바톤을 받아 예린이에게 부담을 주는 교습생분들.
“저, 저는 그거 떨어진 사람이에요!”
예린이는 필사적으로 기대치를 낮추려 그렇게 말했지만, 교습생분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자기들끼리의 말만 이어나갔다.
“이야, 그럼 저기 예, 예린? 이라는 친구는 우승자만큼 잘하겠네.”
“그렇죠, 그렇죠.”
“우와 무지무지 기대돼요!”
화룡점정으로 이 교습생 중에서 가장 어린 9살의 아이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자 예린이는 울상이 되어서 피아노로 향했다.
결과는, 물론 짧은 침묵과 장난이었음을 밝히는 큰 미소.
예린이는 한순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가도 갑자기 터져 나오는 밝은 웃음에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하하!””
다행히도 교습생분들의 유쾌함은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렇게 첫째 날의 짧은 봉사 활동이 끝이 났다.
***
기숙사로 돌아온 저녁.
오래간만에 치킨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데 문득,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에서 떠오른 기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민호의 연주에 귀를 트고 피아노에 미쳐 살았던 20년.
남들에게는 꿈의 위치라는 오케스트라까지 올랐으나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며 살았던 전생.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방향성은 다를지라도 현재의 나를 김민호 최지은과 어깨가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준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도 당장 그 상황으로 돌아가라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거부할 것이지만, 그래도 마냥 밉지만은 않은 그 생.
생각해보면 그 생에 내가 피아노에 미쳐보자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나의 은사님과 그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의 교습생분들의 뼈있는 칭찬에서 용기를 얻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분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그 센터가 2012년에 문을 닫았다 할지라도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원장님이나 교습생분들 중에서도 한참 나이가 많아 내 고민을 들어주던 그분을 찾아봬야 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번 생에는 어떻게, 내가 도움을 드릴 방법은 없을까.
수도권을 넘어 지방에서까지 올라온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2012년에 문을 닫고 나면 막상 내가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어진다.
아예 클래식 센터가 문을 닫지 않으면 좋은 텐데···.
졸업 후에도 나를 많이 신경 써주었던 이수정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일도 막고 말이다.
하지만,
나름 유명해졌다고 해도 나라는 개인이 한 복지 센터의 운명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음.”
어쩌면 좋을까.
나는 그렇게 하염없이 기숙사 천장의 무늬를 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고집만 부릴 생각이니! 네가 그런다고 눈이 깨끗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갑자기 그 강렬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시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한 플루티스트의 얼굴.
“어?”
애초에 ‘리 하모닉 클래식 센터’가 문을 닫은 근본적인 이유는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기 때문 아닌가.
“문, 안 닫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작스럽지만,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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